# 290
290화- 무할름(2)
“무… 무슨….”
병사들에게 명령 내렸던 도마뱀은 삽시간에 찬 시체가 된 부하들의 모습에 당혹을 금치 못했다.
“이제 우리 둘뿐인 것 같은데. 차분하게 얘기 좀 해 볼까?”
민성은 검날에 묻은 체액을 털어 내며 해맑은 미소를 보였다.
잠시 후.
털썩-
민성은 목이 떨어져 나간 마지막 도마뱀 병사의 몸을 의자 삼아 걸터앉았다. 정보는 뽑아낼 만큼 뽑아냈으니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흠. 무할름이라.’
병사의 말에 따르면 무할름은 쓰레기장에서도 독자적인 문화를 영위하던 나라란다. 아두르도 무할름을 통솔하는 건 포기했는데,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나라를 수호하는 신성한 불, 즉 불의 장벽 덕이라는 정보도 토해 냈다.
“신성한 불. 그것만 없애면 되겠지?”
조금 전의 전투로 느낀 점은 도마뱀들의 무력이 형편없다는 것이었다. 전신에서 내뿜는 불은 나름 위험해 보였으나, 코트에 그을림조차 내지 못했다. 아마 장벽에만 의존해 스스로의 능력을 키우지 않은 모양이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신성한 불을 없앨 방도를 아직 모른단 거였다.
“어이, 그란드! 수색 다 끝냈어?”
‘일단 놈이 말한 마을로 가서 정보를 수집하자. 뭐든 나오겠지.’
멀리서 말소리가 들려오자, 민성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유령출몰.”
그리곤 투명해진 몸을 이끌고 마른 숲을 빠져나가는 와중.
“젠장. 망할 파충류 새끼들아! 이거 놔!”
“허튼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조금이라도 수작 부릴 기미가 보인다면 줄이 네놈을 태워 버릴 거니까.”
“빨리빨리 움직여!”
줄줄이 굴비처럼 엮여 도마뱀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호오.’
눈을 빛내던 민성은 자연스럽게 그들 뒤에 따라붙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동한다!”
도마뱀 병사들은 포박한 사람들을 끌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잠시간 걸어 마을에 도달한 병사들은 거대한 불로 이뤄진 성벽 아래서 걸음을 멈췄다.
“케이나! 문 열어!”
“소득은 좀 있었어?”
대장의 외침에 불붙은 성벽 위서 도마뱀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곤 줄에 묶인 인간들을 보곤 반색했다.
“이야! 설마 했는데. 오늘 무슨 날이야? 벌써 몇 놈째래? 축하한다, 베스. 진급은 확실하겠어?”
“시답잖은 소리 말고 문이나 열어. 빨리 감옥에 처넣어야 마음 놓일 것 같으니까.”
베스라 불린 도마뱀 대장이 퉁명스럽게 받아치자, 불길이 잦아들고 성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베스는 노획한 인간들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고, 민성이 뒤를 바짝 쫓았다.
“와아아아아! 무할름의 위대한 전사들이 잔악한 인간 놈들을 생포해 오셨다!”
“무할름이여! 영원하라!”
성안 주민들로 보이는 도마뱀들이 나와 환호성과 꽃다발로 병사들을 반겼다.
“생긴 것 좀 봐. 몸에 비늘 하나 없네. 불쌍해라.”
“꼬리도 없어. 하긴 저주받은 종족이니까.”
도마뱀들은 인간들을 보며 연신 수군덕거렸다. 그러나 민성은 아랑곳 않았다.
‘오오! 저건 또 뭐야! 불을 튀겨 먹어?’
정확힌 마을 구경에 정신 팔려 신경 쓸 여력이 없는 탓이 컸지만 말이다. 마을을 벗어나 사람들이 끌려간 곳은 허름한 목조 주택이었다. 아무래도 이곳 병사들이 생활하는 숙소처럼 보였다. 목조 주택 지하에는 감옥이 있었는데 수감된 이는 없는 것 같았다.
“빨리 들어가!”
병사들의 독촉에 사람들은 인상 쓰며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흠. 왜 굳이 죽이지 않고 가둬 놓는 거지?’
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인다는 편한 선택지가 있음에도 구태여 생포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조금 더 돌아다녀 볼까.’
아직 정보가 부족하다 느낀 민성은 등 돌려 감옥을 빠져나갔다. 감옥에서 나온 민성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지형을 관찰하고 정보를 수집하고자 했다.
‘확실히 바깥의 불과 안의 불은 종류가 다른가 보네.’
중간중간 도마뱀들의 시선을 피해 궁금증을 해소하던 민성은 불붙은 건물 외벽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물체를 거부하던 바깥의 불과 달리 이곳의 불은 그저 아파트의 벽돌 같았다. 뜨겁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마땅한 곳이 안 보이냐.’
민성은 주변을 살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보를 얻으려 수많은 도마뱀 주위를 돌아다녔지만 이렇다 할 소득을 얻지 못했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인간들은 우리보다 크고 강한 존재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 인간은 별 볼 일 없는 종족인 거 아닐까?”
“에이, 설마? 그럼 선조들이 무능했다는 소리밖에 더 돼?
그들의 관심사가 잡혀 온 인간들에게 쏠린 덕이었다. 그럼에도 민성은 계속 염탐을 진행하며 선술집, 거주지 등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날 밤.
온종일 마을을 탐사한 민성은 마을 뒤편의 작은 뒷산에 자리 잡았다. 그리곤 마을서 환히 흘러나오는 빛을 응시했다. 지금 도마뱀들의 마을에선 한창 축제가 진행 중이었다. 듣자 하니 외부 침입자를 무사히 격퇴한 기념이라 열린 것이라 했다.
벌컥-
민성은 수상한 액체가 담긴 나무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몰래 슬쩍해 온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도마뱀들은 이것을 낭주라 불렀는데, 맛은 차게 식힌 고량주와 비슷했다.
“생김새만 다르지 사는 건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종족만 다를 뿐 고유한 문화를 가진 것부터 먹고 살려 애쓰고 노력하는 점은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웃사촌 할 것 없이 서로서로 아끼는 점은 사람보다 나아 보이기도 했다.
‘서로 대화만 됐어도 좀 더 온화한 대처가 가능했을지도 몰라.’
대화의 부재는 의심을 불러와 싸움을 초래한다. 만약 사람과 괴수의 소통이 가능했다면 사회는 지금과 조금 다른 길로 나아갔을지도 모른다. 문명과 문명이 만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을 수도 있다. 다만 그러기엔 이미 너무 많은 피가 흘렀지만 말이다.
‘그래도 씨앗은 뿌려 놨으니 어떤 작물이 올라올지 기다려 봐야겠지.’
민성은 얼마 전 탈주시킨 바크를 떠올렸다. 바크가 어떤 결과를 내놓느냐에 따라 인간과 괴수의 공존 가능성 여부도 갈릴 것이다.
“덤으로 식사 문화도 바뀌겠지?”
민성은 빈 나무 잔을 구석에 던지곤 천천히 자리를 떴다.
*
마을 북쪽의 화산 지대. 산봉우리에선 쇳물처럼 진득한 용암이 흘러나와 성 주변을 휘감고 있었다. 식은 용암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성벽은 유구한 세월을 짐작게 했다.
“마을도 그렇고 파충류 따위가 이런 문명을 갖고 있다는 게 말이 돼?”
명철은 저 멀리 세모꼴처럼 생긴 기묘한 건축물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저 이지 없는 괴수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생각을 바꿔야겠어.”
전경민 역시 그들의 문화에 기가 차 혀를 내둘렀다. 여태껏 그들이 맞닥뜨린 괴수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문명은 고사하고 조잡한 도구 따위를 활용하거나 제 몸뚱이를 믿고 들이대는 놈들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대체 이런 새끼들은 어디서 튀어나온….”
“자꾸 시끄럽게 굴면 주둥이를 자르겠다.”
한탄하듯 한숨 내쉬던 명철은 등을 쿡쿡 찌르는 느낌에 입을 닫았다. 그리곤 그들 주위를 삼엄하게 둘러싸고 있는 도마뱀들을 노려봤다. 까끌해 보이는 껍질 사이에 박힌 노란 눈동자들. 그 속에는 짙은 살의가 담겨 있었다.
“젠장.”
명철은 괜히 기죽어 시선을 돌리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리곤 옆에서 덤덤하게 걷는 귀부인을 째려봤다. 만약 앞의 전투에서 저년이 도와줬더라면 포로 신세를 면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걸 체념한 사람처럼 순순히 투항했다. 그 덕에 그와 경민은 도마뱀들이 쏟아 내는 불길과 쇠붙이를 이기지 못하고 백기를 들어야만 했었다.
“얼른 움직여라.”
명철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자, 병사들은 우악스러운 손으로 인간들을 밀치며 세모꼴의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고즈넉한 사원에 세워진 탑. 신을 모시는 신도들이 세운 신전. 가까이서 건물을 본 사람들의 감상평이었다.
“블라인드.”
“뭐, 뭐야!”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시야가 컴컴해지자 사람들은 아우성쳤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 게 전부였다.
“해제하겠습니다.”
“꿇어라!”
“음….”
이윽고 날카로운 음성과 함께 시야가 밝아지자, 명철은 모든 것이 희끄무레하게 보여 눈가를 찌푸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건 목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것이 창날이라는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라.”
묵직한 음성에 사람들은 고개를 들었다. 왕좌에는 정갈한 사제처럼 단조로운 복장을 입은 도마뱀이 앉아 있었다. 명철은 그가 파충류들의 머리임을 직감했다.
“인간을 보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나는 생명과 멸망을 관장하시는 무할름의 사제 폰티우스다.”
“그렇습니까? 저도 존안을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근데 저… 바닥이 많이 딱딱해서 그런데 서서 들으면 안 되겠습니까?”
평온한 음성에 자신감을 얻은 명철은 무릎을 달싹이며 사람 좋은 미소를 보였다. 그러나 병사들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표정을 구겼다.
“일단 질문에 앞서 감사를 표한다. 그대들을 보니 확실히 인간 세상에 넘어왔음을 알게 되었다.”
폰티우스가 지팡이를 까딱이자, 병사들은 사람들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하… 인세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분위기가 호의적인 것 같자, 명철은 얼굴에 미소를 한가득 머금었다. 무사히 살아 돌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을 얻은 것도 컸지만 실제로 괴수들의 등장 덕에 많은 득을 보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큭….”
폰티우스의 고함에 사람들은 바위에 짓눌린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며 무릎 꿇었다. 갑자기 강한 압력이 그들의 어깨를 짓눌러 왔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신성한 불을 뚫고 무할름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설명해야만 할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압력이 점점 강해지자, 전경민은 애써 고통을 이겨 내며 질문했다.
“아두르도, 그의 열 권속도 감히 신성한 불만큼은 넘지 못했다. 하물며 감히 인간 따위가 넘어올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란 말이다!”
무할름은 수많은 주민들이 쓰레기장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낼 때도, 아두르가 한 구역을 아우르는 지배자가 되어 통솔을 시작했을 때도, 온전히 제 삶을 유지해 나갔다. 그런데 그다지 강해 보이지도 않는 인간들이 넘어왔으니 어이가 없었다. 혹시 신성한 불의 힘이 약해진 건 아닌가 하여 성물의 이상 여부를 확인하기도 했다.
“…….”
전경민은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 침묵했다. 갑자기 거대한 파도가 들이닥친 덕에 불길 사이를 헤집고 들어왔다고 말해 봐야 거짓으로 받아들일 것이 뻔했다.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구나. 좋다. 그럼 말하고 싶게 만들어 주마.”
“말하겠습니다! 말하겠습니다!”
폰티우스의 손짓에 병사들이 병장기를 치켜들자, 명철은 다급히 고함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