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8
288화- 호출 (4)
“죽기 싫으면 앞으로 생각을 하고 행동에 옮기는 게 좋을 거야.”
민성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귀부인을 내려다보다 발을 뗐다. 그러자 귀부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쿨럭! 봐요. 이런 데도 힘이 없다고 말하실 건가요? 겸손도 적당해야 아름답지 과하면 오히려 추해져요.”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다음은 없어.”
귀부인이 연신 기침하면서도 제 할 말을 늘어놓자, 민성은 픽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어머, 주의할게요.”
귀부인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교태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귀부인이 꼼작도 못 할 줄은 몰랐는데. 소문이 과장된 건 아닌가 보네.’
‘역시. 괜히 전쟁서 공헌도 1위 먹은 게 아냐. 저런 놈은 그냥 피하는 게 상책이지.’
‘건드리지만 않으면 괜찮겠지. 조용히 묻어가자.’
단 일합이었지만 민성의 움직임을 본 능력자들은 애써 놀란 가슴을 숨기며 덤덤하게 반응했다.
스륵-
캠프가 침묵에 잠겨 들려는 찰나, 막사에서 이 부장이 미간을 찌푸린 채 걸어 나왔다.
“현장으로 이동한다. 준비해.”
“지금요?”
느닷없는 출발 지시에 능력자들은 당혹감을 내비췄다. 장시간 이동했으니 당연히 휴식 후 이동하겠거니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장 들어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리 현장 답사를 하는 편이 너희에게도 유리하겠지. 남고 싶은 놈들은 남아도 된다.”
이 부장의 차가운 말에 능력자들은 툴툴거리며 엉덩이를 털었다. 짜증 나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저희도 가요.”
“아무래도 좋은데 팔은 놓지?”
민성은 슬며시 엉겨 오는 귀부인을 밀어내곤 레토나에 탑승했다. 비포장도로를 달린 지 10여 분. 불길에 가까워질수록 짙은 열기가 차체를 뚫고 안으로 스며오는 듯했다.
“후우.”
긴장한 탓일까. 아니면 더위 탓일까. 굵은 땀방울이 연신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도착했습니다.”
한 상병이 차를 세우자, 민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 문을 젖혔다. 땅에 발을 내딛기 무섭게 열기를 머금은 뜨거운 바람이 이마를 간질였다.
“멋지네.”
민성은 이마를 훔치며 눈앞의 광경을 지그시 응시했다. 수많은 재산과 생명을 앗아 가는 불과 그 속에서 온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 이질적이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깊은 물 속에 잠들어 있다는 전설의 도시처럼…’
“호박 속에 갇힌 벌레 같네요. 추하지만 아름다움이 있어요.”
민성은 슬며시 다가와 품평을 늘어놓는 귀부인을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보는 건 자유지만 굳이 여기서 봐야 됩니까?”
“어디서 보는지도 제 자유니까요.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 자리를 옮기다 보니, 또 본의 아니게 민성 씨 옆으로 왔네요.”
귀부인이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려 하자, 민성은 그녀의 팔을 툭 밀어냈다.
“재밌게 보시죠. 그럼.”
그리곤 손을 털며 자리를 벗어났다. 귀부인은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민성의 등을 가만히 쳐다봤다.
“할 마음은 들었나?”
민성이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자, 이 부장은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다가왔다. 현장을 보여 줬으니 이제 민성이 어느 정도 결론을 내렸을 거라 생각했다.
“아직. 정보가 있어야 판단을 내리지. 내빼기 전에 슬슬 숨겨 둔 것 좀 풀지 그래?”
“숨겨 둔 것?”
민성의 추궁에 이 부장은 실소하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안으로 밀어 넣었다가 연락 두절된 병사들의 인적 사항이라도 듣고 싶어?”
“설마 아무런 정보도 없다고?”
민성이 어처구니없게 바라보자 이 부장은 깊은 연기를 뿜어 댔다.
“가진 게 있어야 줄 것도 생기지. 들어가서 살아 돌아온 놈들이 없으니까. 이미 너희 이전에 1차로 내려왔던 능력자들도 모두 연락이 끊겼다.”
이 부장은 막사에서 들은 보고 사항을 간략하게나마 민성에게 언급했다.
“그러니까 나도 아무런 정보 없이 불바다 속으로 뛰어들어라?”
민성은 피식 웃으며 검붉은 하늘을 응시했다. 이건 도무지 답이 없는 판이다. 결과가 빤히 정해져 있는 판에 뛰어들 도박사는 없을 것이다.
“나는 빠지겠어. 최소한의 정보는 있어야….”
민성이 발길을 돌려 레토나에 오르려는 찰나.
“2개.”
이종범은 다급하게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며 승부수를 던졌다. 만약 민성을 잡지 못하면 그 여파를 감당하기 어려울 거란 사실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이 무사히 마무리되면 2개 제공하겠어. 최소 5성급으로.”
2개란 말에 민성은 다리를 움찔거렸다. 그러나 곧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2개에 목숨 걸기엔 많이 부족하지. 그 정도는 타워만 열리면 언제든 구할 수 있어.”
매몰찬 반응에 이 부장은 담배를 한 모금 깊숙하게 들이키곤 입을 열었다.
“3개. 그리고 이번에는 네가 직접 고를 수 있는 기회도 주겠다. 이게 지금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최대다.”
이 부장의 아쉬운 소리에 민성은 걸음을 멈추고 바삐 머리를 굴렸다.
‘5성급 3개에 선택권이라… 나쁘진 않은데 리스크가 너무 커.’
“거절하면?”
“최소한의 시도는 해 보고 안 되면 철수해야지. 어차피 올해 내론 무리일 테니까.”
허락된 시간이 길지 않다. 가능성 없는 일에 올인 하느니 어떻게든 질책을 피하는 법을 연구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4개. 그리고 선택권도.”
잠시간 고심하던 민성이 손가락을 펴 보이자 이 부장은 쓴웃음을 흘렸다. 5성급 이상의 아이템 4개. 손실이 뼈아프긴 해도 불가능하진 않았다. 더군다나 사용할 수 있는 놈도 없어 창고에 처박혀 있는 물건들이다. 민성이 갖는다 한들 제대로 사용하기 어려우리라.
“어쩔 수 없나….”
이 부장은 새 담배를 꺼내 물며 작게 중얼거렸다. 놈의 손을 잡아도, 잡지 않아도 출혈이 큰 건 매한가지다. 다만 전자를 택하면 자리를 보전하는 게 가능했다.
“좋다. 수용하지. 대신 전투에서 나오는 부산물들은 전부 이쪽에 권한이 있다. 또한 12월이 되기 전까진 마무리해 줘야겠어.”
“12월?”
민성은 눈을 돌려 손목에 걸린 시계를 응시했다.
‘12월까지 남은 기간은 얼추 한 달. 아마 이 불길도 아크네 때처럼 코어 역할을 하는 괴수만 잡으면 사라질 거야. 그 정도 일로 4개면 완전 이득이지.’
대신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긴 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불길만 잡으면 되는 거지?”
“그거면 충분하다. 이제 병력들도 어느 정도 놈들에게 적응했으니까.”
도시 내로 진입만 하면 그 뒤로는 기타 능력자들과 병사들에게 맡기면 될 일이다. 이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민성의 결정을 기다렸다.
“좋아. 협력하지.”
“잘 생각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최대한 지원하겠다.”
민성과 이 부장은 서로의 손을 잡고 흔들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이, 거기! 너희들!”
민성은 멍하니 불바다를 구경 중인 능력자들에게 손짓했다. 갖고 있는 건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기껏 안으로 들어간들 타 죽는 상황은 면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 걸어 주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영광입니다!”
가장 먼저 달려온 자는 웃통을 벗고 있던 남자였다. 제 몸매를 자랑하려 그런 건지 가관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경민이라 합니다.”
민성은 남자가 내민 손을 흘낏 내려다봤다. 그리곤 손을 잡는 대신 고개만 까딱였다. 쓸데없는 관계는 사양이었다.
“굉장히 과묵하신 분이셨군요. 더욱 마음에 듭니다. 자고로 남자란 입이 무거워야죠,”
그러나 말과 달리 전경민은 민성의 옆에 붙어 바삐 입을 놀렸다. 간단한 개인사부터 돌아가는 정세 등, 내용도 다양했다.
“아, 예. 근데 전 별로 관심 없는 사항이라.”
민성은 전경민의 말을 대충 흘려 넘기며 시선을 돌렸다.
“것보다 다들 들어서 아시겠지만 저희는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전에 서로 팀원의 능력에 관해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서로 거리낌 없이 얘기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민성은 그를 주목하는 눈동자들을 마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시선 사는 일은 사양이었으나 필요한 일이었다.
“밥줄 공개해라? 미치지 않고서 누가 말하겠어? 것보단 협조는 했지만 우리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 하고 대충 짬밥이나 얻어먹다가 돌아가면 되는 거 아냐? 뭣 하러 사서 고생하려 해?”
앞전의 다툼으로 심기가 불편해져 있던 명철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
그러자 어느 정도 민성의 힘을 인지하고 있던 이들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가만히 있으면 적어도 중간은 간다고 했다. 자칫 입 잘못 놀려 민성의 심기를 거슬러 죽는 일은 사양이었다.
“뭐? 왜? 불만 있어?”
그러나 이미 신원이 까발려져 잃을 게 없다 생각한 명철은 외려 목청을 높였다.
“그럼 불만 있는 사람은 저쪽으로 좀 빠져 주시고 남은 사람들끼리 거리낌 없이 얘기해 봅시다. 각자 가진 능력을 종합해 최상의 결과를….”
“네가 뭔데 빠지라 마라야? 내 상사라도 돼? 엉?”
민성은 명철에게 한쪽으로 빠지라 손짓하곤 대화를 지속하려 했다. 그러나 발끈한 명철이 성큼 다가와 멱살을 움켜잡았다.
“네가 어떤 여자랑 어떤 방식으로 뒹굴었건 내 알 바 아냐. 근데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일 망치는 건 용납 못 해. 그러니까 놓지?”
“어린놈의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민성이 싱긋 웃으며 목덜미 잡은 손을 치우려 하자, 명철은 오히려 우악스럽게 팔을 들어 민성의 얼굴을 때리려 들었다. 민성은 살짝 고개를 틀어 주먹을 피하곤 그대로 명철의 이마에 박치기를 먹였다.
퍽-
수박 터지는 소리 사이로 마나 타는 소리가 미세하게 섞여 캠프를 울렸다.
“끄아아아악!”
민성은 이마를 붙잡고 바닥을 뒹구는 명철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끊겼던 대화를 이어가려는 순간.
“이… 이 시발 새끼가 끝까지 해 보자는 거지? 매혹의….”
고통에 발광하던 명철이 벌떡 일어나 핏발 선 눈으로 그를 쏘아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중얼거림은 목에 드리운 검은 물체에 끊기고 말았다.
“스킬 쓰는 건 좋은데, 쓰는 순간 네 목을 날릴 거야.”
“…….”
명철은 고통도 잊고 목덜미를 자극하는 차가운 물체를 내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분명 대검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민성의 등에 자리해 있었다. 한데 언제 손에 쥐었는지 마술에 현혹당한 기분이었다.
“놔둬도 괜찮겠습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교는 이종범에게 조심스레 질문했다.
“놔둬. 들어가기 전에 저들끼리 미리 우열을 가리는 편이 편하겠지.”
이종범은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히 답하며 불씨 남은 꽁초를 발로 짓이겼다.
“왜?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사용하려 했던 거 아냐?”
“…….”
민성의 빈정거림에도 명철은 분노로 거칠어진 숨을 애써 넘길 뿐이었다.
“자, 자. 인사는 그 정도로 끝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으나 싫으나 같은 차 탔는데 기왕이면 같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착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눈치 보며 다툼을 지켜보던 전경민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둘 사이로 다부진 몸을 디밀었다.
“병신 새끼. 그러게 자존심도 상대 봐 가면서 부렸어야지. 이제 빚은 없는 거다.”
그리곤 명철에게 소곤거리며 눈을 부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