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6
286화 - 호출 (2)
[뭐, 이쪽도 공짜 밥만 먹기는 그러니까 들어는 볼게.]
잠시 잠잠하던 메달에서 긍정적인 답이 흘러나오자, 이종범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잘 생각했다. 그럼 기다리지.”
그리곤 최대한 담담한 말투로 통신을 종료했다. 메달의 웅웅거림이 잦아들자, 그의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담뱃갑으로 향했다. 이종범이 담배를 꺼내 들자, 옆에서 바삐 무전을 취하던 장교가 잽싸게 달려와 불을 붙였다.
“부장님. 초소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현재까지 10명의 인원이 모였는데 어떻게 할지 방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번호 매긴 놈들 중 온 놈들은 있대?”
장교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이종범은 꽁초를 털며 피식 웃었다.
“그… 보고가 없는 걸 봐선 아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권 보장해 달라고 발악을 해 대서 챙겨 줬더니 알맹이만 처먹고 쏙 빠지겠다?”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잘 대해 줘 봐야 소용이 없다. 언제나 같은 결과만을 불러오니 말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쩌긴? 일단 온 놈들은 대기시키라 그래. 어차피 잡것들 모아서 내려보낸들 달라지겠어?”
적어도 번호 매긴 것들이 와야 변수를 만들 것인데, 1차 수송에 포함된 3번을 제외하곤 알맹이들이 오지를 않았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후우….”
이종범은 하얀 연기를 무겁게 뱉어 내곤 안경 너머의 장교를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이번에 호출 무시한 새끼들은 따로 명단에 빼놔.”
“전부 말씀이십니까?”
장교는 흠칫거리며 놀란 눈으로 부장을 바라봤다.
“그래, 전부. 먹이를 줬으면 최소한 눕는 시늉이라도 보였어야지.”
잠깐 미간을 찌푸리던 부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번호를 붙인 능력자들을 잡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미 많은 것을 양보했다. 더 이상의 양보나 타협은 용납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충청도만 먹으면 나머지 지역은 금방이야. 토벌 끝나는 대로 말 안 듣는 금수 놈들도 싹 치워 버리는 게 국가에 충성하는 길이야.”
잠시 현실과 타협했다곤 허나 이능력자 대책부의 본질을 잃은 건 아니었다.
“어쨌든 온 놈들은 대기시켰다가 특이 사항 없으면 곧장 내려보내라 그래.”
“알겠습니다. 충성!”
명령을 전달받은 장교는 힘차게 경례하곤 무전병 옆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들 누구도 국가 위에 올라설 수는 없어. 그렇게 만들어서도 안 되고.”
이종범은 통신기를 붙잡고 바삐 송신하는 장교를 지켜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
3일 뒤. 안전지대 외곽 제8 경계지 안. 기다란 도로 위로 수많은 플라스틱 의자가 구비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여러 사람들이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대개 심드렁한 얼굴로 주변 환경이나 하늘을 멍하니 봤는데 그 모습이 꼭 입소를 기다리는 예비군 같았다.
꿀꺽-
좌석 주변에 배치된 군인들은 그런 이들을 곁눈질하며 목울대를 꿀렁거렸다. 뉴스나 언론에서야 무법자들과 통제를 거부하는 능력자들을 때려잡는 소식들을 내보냈지만, 현장에 있는 그들은 누구보다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부서 인정한 무법자들. 어떠한 범죄도 저들이 벌이면 정당화된다. 자칫 저들의 심기를 거슬러 죽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개죽음이나 다름없었다.
“하, 시발. 불러 놓고 이게 뭔 짓거리야?”
기다림의 시간이 점차 길어지자, 얼굴 곳곳에 피어싱을 박은 남자가 자리서 일어나 병사에게 다가갔다.
“야, 이병!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 내가 버린 시간은 3일이지만 여기 사람들의 시간을 합치면 30일이야, 30일! 엉? 알아?”
남자는 이병의 어깨에 팔을 올리곤 조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른 이들도 말은 않았지만 동의의 눈빛을 보냈다.
“죄… 죄송합니다!”
“아, 누가 사과 듣고 싶댔어?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냐고 물었잖아. 하. 이 새끼 어리바리해서 군 생활 하겠나? 내가 좀 도와줘?”
남자는 선심 쓰듯 말하며 허공에서 굵은 철봉을 꺼내어 들었다.
“이게 뭔 줄 알아? 마법의 방망이야. 엉덩이에 딱 꽂으면 그냥 정신이 번쩍 들 텐데. 어때?”
“죄… 죄송합니다!”
이병은 잔뜩 경직되어 울먹거렸다. 군 생활만으로도 충분히 벅찬데 미친놈에게 물려 죽을 상황이 되니 절로 눈물이 나왔다.
척-
그때, 갑자기 도로 끝에서 다수의 군인들이 절도 있는 걸음으로 신속하게 걸어왔다.
“쳇.”
그 모습에 남자는 이병의 어깨에서 팔을 떼곤 자리로 돌아갔다. 괴수 토벌 덕에 능력자들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지만 총은 여전히 그들에게 부담스러운 무기였다. 괜히 쓸데없는 마찰을 일으켰다 총 맞는 일은 사양이었다.
“좌우로 정렬!”
이종범은 호위하던 군인들과 요원들을 옆으로 물리곤 좌중들 앞으로 나섰다. 그리곤 의자에 앉아 있는 이들의 얼굴을 훑더니 자조 섞인 미소를 흘렸다. 항시 주시하던 놈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 작전은 실패로 돌아갈 확률이 높아 보였다.
“결국 이게 전부인가.”
그래도 한 놈 정도는 올 거라 생각했건만, 있는 것이라곤 넘버즈들 덕에 겸사겸사 무임승차한 승객들이 전부였다. 이종범은 답답함에 담배를 꺼내 물곤 불을 붙였다.
“이미 구면들이니 소개는 생략한다. 일단 지령 전달에 앞서 소집에 응한 이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다.”
그리곤 무거운 연기를 뿜어 대며 의례적인 인사를 던졌다.
“거, 인사가 너무 건조한 거 아니여? 피부가 바싹 말라 버리것어.”
누군가의 장난스러운 말에도 이종범은 무심하게 연기만 뿜어 댔다.
“내가 너희들을 소집한 이유는 딱 하나다. 현재 충청 전역에 발생한 불로 인해 병력들이 진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뿐더러 국토 회복도 늦어지고 있다. 병력들의 전진을 가로막는 불 혹은 그 원인을 제거해라. 그를 위해 어떠한 방법도 전부 허용하겠다. 필요한 게 있다면 지원도 아끼지 않겠다. 질문?”
“그러니까 요약하면 우리보고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불 꺼라? 그럼 소방관을 불러야지 왜 우리를 불렀대? 번지를 잘못 찾은 거 아니요?”
한 중년 남자의 물음에 좌중들은 실소를 터뜨렸다. 범법자들을 모아 한다는 소리가 고작 불이나 끄라니, 농담처럼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었으면 너희를 부르지도 않았겠지.”
이종범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을 이어 가려는 찰나, 그는 갑자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곤 도로 끝자락을 쳐다봤다. 그러자 좌중들 또한 이종범의 시선이 쏠린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철컥-
검은 것이 움직일 때마다, 이불 사이로 튀어나온 발처럼 옷 밑으로 삐죽 튀어나온 대검 자루가 좌우로 흔들거렸다. 이윽고 검은 것이 그들에게 접근해 오자, 얼굴을 인지한 다수의 사람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 소식도 안 들리길래 죽은 줄 알았는데 멀쩡하네.”
“아니, 저런 새끼가 뭐가 아쉬워서 여기에 온 거야?”
특히 소집에 응한 능력자들이 경계의 빛을 띠었다. 아무리 정보가 죽은 사회라 한들 과거의 정보마저 사장된 건 아니었다. 과거 차원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전파까지 탔던 능력자. 상당수의 사람들이 죽어 나간 전투들과 달리 최소한의 희생으로 승리를 따낸 인물이었다. 아직도 능력자들 사이선 간간히 그때 일을 언급하기도 했었다.
“좋은 일 있어? 뭘 그렇게 히죽거려?”
그러나 민성은 경계와 두려움 섞인 시선 따윈 아랑곳 않고 이종범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어느 때보다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 왔는데 웃어야지 눈물을 보일까?”
적일 때는 골머리를 썩이지만 아군일 때는 누구보다 듬직한 산과 같았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민성이 퉁명스럽게 묻자, 이종범은 앞서 능력자들에게 설명했던 내용을 재차 언급했다.
“그러니까 병력 소비하긴 싫으니 이쪽보고 해결하라?”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지. 아니면 너도 소방관들에게 맡기라고 할 건가?”
“그편이 편하긴 하겠지만 그 정도로 잡힐 불이었으면 부르지도 않았겠지.”
이종범의 날 선 물음에 민성은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눈으로 부장을 쳐다봤다.
“맞다. 다만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도 생각 못 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물어봤다.”
이종범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방관을 언급했던 능력자를 흘낏 쳐다봤다. 부끄럼을 느낀 것인지 그의 얼굴은 벌겋게 익어 있었다.
“잡설은 이 정도로 하고….”
그러나 이 부장은 아랑곳 않고 대화를 이어 갔다. 특히 충청도를 덮은 불에 관하여 상세히 설명했는데, 건물과 콘크리트 바닥 등 무생물은 불이 붙어도 멀쩡하지만 생명체는 가차 없이 태워 버린다는 것이 내용의 골자였다.
“그러니까 우리보고 지옥 불을 끄거나 안으로 들어가 원인을 해결하라는 소리 아뇨?”
좌중 중 한 사람이 불안한 목소리로 묻자, 이종범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능하다 생각되는 자들은 포기하고 돌아가도 괜찮다. 다만 지금 누리고 있는 이권의 유통 기한도 함께 끝난다고 생각하면 된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묵과했던 범죄들도 합쳐 가중 처벌 할 거니 최소 사형이겠지?”
“그… 그건….”
이종범의 덤덤한 협박에 말문이 막힌 좌중은 얼굴만 붉혔다. 자리를 뜨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대가로 따라올 대책부의 압박은 두려웠다. 핍박받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건 사절이었다.
“많은 분들께서 이번 일에 관심 갖고 계신다. 리스크가 큰 만큼 너희에게 돌아가는 것도 크겠지.”
“…….”
이 부장이 채찍에 이어 당근을 내밀자, 능력자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피며 말을 아꼈다.
“무생물은 멀쩡하다면 장갑차에 탑승해서 뚫고 들어가면 되는 거 아냐?”
“장갑차가 열기까지 막아 주는 건 아니다. 찜닭이 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민성의 물음에 이종범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실패로 돌아갔던 도전을 구태여 재시도할 정도로 머리가 굳지는 않았다.
“좀 더 자세한 정보를 듣고 싶은데. 생존자는 없어?”
잠시간 눈가를 긁적이던 민성이 질문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이미 해당 지역 거주민들은 전부 타 죽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거다.”
“쯧. 차라리 농담이길 바랐는데. 진짜 지옥인가 보네.”
민성은 혀를 끌끌 찼다. 생존자가 없으니 내부 상황을 알 길이 없다. 그야말로 맨땅에 머리 박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협력할 건가? 협력한다면 일전에 말했던 보상은 물론이고 적어도 내가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에는 최대한 협조할 걸 약속하지.”
이 부장의 제안에 민성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썩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으나 너무 저자세로 나오니 괜히 의심이 들었다.
“그럼 내려가서 보고 결정하는 걸로 할게. 아니다 싶으면 발 빼야 되니까.”
민성은 어깨를 으쓱이며 김이 서린 안경 속 눈동자를 응시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고 판단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거절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
그러나 의외로 이종범은 순순히 승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