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3
283화 - 괴수 연구소 (5)
“그래서 행방불명된 둘도 폭발에 휘말려 사라졌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럼 시체조각이라도 남았을 테고……. 설마 제대로 조사조차 안 끝내고 보고하러 온 건 아니겠지?”
박정후의 딱딱한 언사에 장교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 그건 아닙니다! 다만 실종자 중 한 명의 옷자락만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장교의 보고에 박정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말이 행방불명이지 거의 죽었다 봐도 무관한 사항이었다.
“외부침입 가능성은?”
“불행 중 다행히도 이렇다 할 침입 흔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박정후는 주름진 이마를 문지르다 천천히 입을 땠다.
“앞으로 보안 떠나서 사람 지나다니는 곳에 무조건 감시 카메라 설치하라 전해. 그리고 남은 놈들끼리 회의든 투표든 뭐든 해서 새 소장 선출하라 그래.”
박정후의 결정에 좌중들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력도 부족하거니와, 아무래도 이쪽에서 새 인물을 붙여주는 것보단 기존 인물 중 하나를 머리로 세우는 것이 저들에게도 편할 것이다.
“그리고 보안도 강화해. 지금 몇이나 주둔중이지?”
“57사단 소속 14연대가 주둔 중에 있습니다!”
바짝 긴장한 장교는 곧바로 물음에 답했다
“그럼 사단장보고 일개 연대 더 투입시키라 그래. 그리고 이번에도 이런 사고 발생하면 그땐 옷 벗을 각오하라고도 전하고.”
“그……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박정후가 나가보라 손짓하자, 장교는 우렁차게 경례하곤 허겁지겁 막사를 빠져나갔다. 잠시간 흔들리는 막사 문을 가만히 응시하던 박정후는 고개를 돌려 이종범에게 눈짓했다.
“지금 놈들에게 연락 취해둘 테니 놈들 모이는 대로 이끌고 충청도로 내려가. 그리고 반드시 탈환해라.”
박정후는 덤으로 유사시 충청도 토벌 병력들을 통솔할 수 있는 명령권까지 허락했다.
“반드시 낭보를 들고 돌아오겠습니다.”
이종범은 재차 허리를 숙여 보이곤 막사를 빠져나갔다.
*
연구소가 사고로 아수라장이 되고 2주가 지났다. 그사이 연구소의 인선 개편은 빠르게 이뤄졌다. 연구소는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에 따라 투표를 실시해 비어 있던 소장 자리를 금세 인물로 대체했다. 투표함을 뒤집은 결과 당선자는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나왔다.
“다들 오랜만이에요. 기존에 뵈었던 분들도 계시고, 못 보던 분들도 계신데 이번에 새로 소장 자리를 맡게 된 신입 소장 이수정이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이수정은 경쟁자들과 압도적인 차이로 연구소장직에 당선됐다. 사실 의외랄 것도 없었다. 그녀가 개발한 마나 스톤은 대다수 연구원들이 인정하고 있는 업적이었다. 또한 그녀가 능력 부족이 아닌 기존 소장과의 다툼으로 쫓겨났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다만 신의 물방울을 개발한 체액 융합 팀장만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연구원이라면 세상의 이치를 파헤치고자 하는 열망 정도는 갖고 있을 테니까요. 연구마다 결과가 나오는 시기가 다를 뿐 세상에 필요 없는 연구는 없어요. 그래서 간섭은 최소화하고 지원은 최대한 할 수 있도록 계획 중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오로지 연구에만 집중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와아아아!”
취임 연설을 끝으로 이수정은 우렁찬 갈채를 뒤로하고 군인 둘의 호위를 받으며 소장실로 들어갔다. 조사를 핑계로 한바탕 군인들이 휩쓸고 지나간 탓인지, 소장실은 깔끔하다 못해 공허했다.
“이제 끝났네.”
이수정은 의자에 앉아 멍하니 형광등을 바라봤다. 민성에게야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지만 얼마나 많은 불안감과 싸워야 했던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불러 주지 않으면 답이 없었다. 다행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한 팀장에게서 새 소장 선출 투표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거다 싶었다.
2주간 바삐 발품을 팔아 각 팀장들을 만났고 그들을 회유했다. 각 팀 연구를 전적으로 지원하고 필요하면 그녀 또한 연구에 도움을 제공하겠다는 등, 달콤한 말로 구슬리니 쉽게 승낙을 받을 수 있었다. 애초에 자리에 욕심 없는 이들이 많아 다행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자리에 앉았다.
“아니. 오히려 시작인가?”
홀로 중얼거리던 이수정은 책상에 놓인 작은 거울을 쳐다봤다. 유리 안에는 기쁨의 미소를 실실 흘리고 있는 낯선 여인의 모습이 들어앉아 있었다. 이제야 악취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곳을 벗어났음을 실감했다.
“바보야. 이럴 땐 웃어도 돼. 언제 또 웃겠어. 호호호호!”
이수정은 거울을 붙잡고 중얼대다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어 젖히기 시작했다.
“가식적으로 웃는 것보다 그게 훨씬 낫네.”
“누구야!”
방 한쪽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이수정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검은 코트 위로 걸린 익숙한 얼굴에 이수정은 안도함과 동시에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혔다.
“사회인이라면 적어도 노크는 하고 들어오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카드 단말기가 노크에 반응했으면 그렇게 했겠지?”
민성은 출입용 카드가 없음을 언급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여튼요! 갑자기 무슨 일로 불쑥 튀어나오셨대요?”
“협력자가 생각 이상으로 출세했으니까 잘 보이려고 왔지.”
민성이 장난스럽게 손바닥을 비비자, 발끈해 있던 이수정도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운이 좋았죠. 곧바로 차기 소장을, 그것도 투표로 뽑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에요.”
“능력이 밑바탕 되니까 운도 따라오는 거지. 아무것도 없었으면 운도 외면했을걸?”
민성은 빙긋 웃으며 코트 속을 뒤적였다. 그리곤 넓적한 수첩 한 권을 꺼내어 그녀의 손에 쥐여 주고 책상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어머, 이건 뭔가요?”
“취임 선물. 화환이라도 보내려 했는데 파는 곳이 있어야지.”
“선물이요?”
이수정은 수첩을 받아 찬찬히 안을 훑었다. 빼곡히 적힌 글자들을 읽어 내릴수록 그녀의 얼굴엔 묘한 흥분이 일렁였다. 그녀는 한참 수첩을 넘겨보곤 민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몰래 호박씨 까고 있는 줄은 알고 있었는데 설마 이런 걸 만들어 내고 있었을 줄은 몰랐네요.”
“그래서 놈이 추진하려고 했던 게 뭔지 알겠어?”
복잡한 수식과 글자들이 난잡하게 얽혀 그로선 해석이 불가능했다.
“선물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민성의 물음에 이수정은 곱게 눈을 흘기다 말을 이어 갔다.
“아시다시피 에너지 스톤은 괴수 종류에 상관없이 나오죠. 각각 크기만 다르다뿐이지 모양이나 형태도 별 차이가 없고요.”
민성은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의 말대로 에너지 스톤은 모래알만 한 것부터 알이 굵직한 것까지 크기의 다양성은 있었어도 종류의 다양성은 없었다.
“사람의 신체도 각기 다른 특징을 갖고 있는데 하물며 에너지 스톤은 어떻겠나. 전 소장 놈은 거기에 의문을 품었었나 봐요. 식충이가 생각한 것치곤 꽤 참신한 아이디어네요.”
이수정은 수첩을 뒤적이며 감탄하면서도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어떤 연구를 진행했다는 건데?”
“흠흠. 수첩 내용으론 괴수의 에너지 스톤을 빼내 같은 괴수의 몸에 심는 실험을 진행했나 봐요. 뭐, 전부 실패한 모양이지만요.”
이수정은 수첩 뒷부분을 읽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취지는 좋았으나 예상된 일이기도 했다. 현재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괴수의 심장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에너지 스톤이었다. 그런데 인위적으로 심장을 또 심어 버리니, 갑작스러운 신체 변화에 실험체들이 버티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만… 마지막 부분이 조금 걸리네요.”
이수정은 수첩 끝부분을 읽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아무리 에너지 스톤을 변형시켜도 괴수끼리의 융합에는 한계를 느껴 인간을 실험체로 써야겠다는 내용이에요. 이게 마지막인 걸 봐선 그래도 선을 넘진 않았나 보네요.”
인간과 괴수의 융합. 매력적이지만 미친 시도다. 어쩌면 신이 그어놓은 경계선을 넘어가는 일일지도 몰랐다.
“글쎄. 자의는 아니지만 넘었을지도 모르지.”
민성은 슬쩍 옆으로 비켜 몸으로 가리고 있던 보따리를 내보였다.
“그건 뭔가요? 아, 그게 진짜 선물인가 보네요?”
이수정의 농담에 민성은 피식 웃으며 보따리 끈을 풀고 보따리를 털었다. 그러자 안에선 이마에 부적이 붙은 검은 덩어리가 천천히 모습을 보였다.
“어… 음… 이건 뭔가요?”
이수정은 낯선 물체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호기심을 보였다.
“전 소장 외에 행방불명된 한 사람. 아니, 이제 한 마리라고 표현해야 되나.”
“네? 농담이죠? 어딜 봐서….”
민성의 말에서 대강의 상황을 유추해 낸 그녀는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새끼… 설마 정 팀장님한테 에너지 스톤을 사용한 건가요?”
민성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너라면 꽤 재밌는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생포하긴 했는데. 마음에 안 들면 다시 가져가고.”
“줬다 뺏는 건 아니죠!”
놀란 것도 잠시. 이수정은 보따리에 다시 혼합 생물체를 넣으려는 민성을 막아섰다. 어차피 물은 엎질러졌고, 엎질러진 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여튼 너도 멀쩡한 편은 아니야.”
“세상을 움직이는 건 대다수의 정신 나간 사람들이죠. 칭찬 고마워요.”
민성은 옅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보따리를 인계하며 몇 가지 경고도 함께 전달했다.
“생각보다 난폭하니까 조심해서 관리하는 게 좋을 거야.”
“어머,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민성의 조언에 이수정은 싱글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성공한 거래자가 꼬챙이에 꿰인 꼴은 보고 싶지 않으니 해 주는 경고 정도로 생각해.”
그러나 민성의 덤덤한 말에 이수정은 한 번을 안 져 준다 구시렁대며 말을 이어 갔다.
“그래도 인간이 모체가 됐는데 최소한의 인간성은 있지 않을까요?”
“그냥 위험한 괴수라 생각하고 연구하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민성은 소파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취임 선물 전달도, 선물의 위험성도 충분히 경고했다. 이제 씨앗이 결실을 맺기 전까지 연구소에 올 일은 없을 것이다.
“벌써 가려고요?”
“왜? 헤어지려니 아쉬워?”
민성의 장난스러운 반문에 이수정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 외에 다른 주의 사항은 없나 물어보려 했죠?”
“글쎄. 거기서부턴 신임 소장님께서 해야 할 일이겠지? 유령출몰.”
민성은 어깨를 으쓱이곤 삽시간에 자취를 감춰 버렸다.
덜컥-
그와 동시에 작은 울림과 함께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이수정은 다급히 닫히는 문을 젖히고 복도로 나와 크게 소리쳤다.
“선물 고마워요! 약속은 반드시 지킬 거니까 걱정 말고요!”
고운 외침은 텅 빈 복도를 작은 파도처럼 한차례 휩쓸곤 잔잔히 가라앉았다.
연구소 밖.
“후... 이제 한 건 끝냈나.”
민성은 한결 더 강화된 경계 지역에서 멀찍이 떨어진 장소에 도착하고서야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나온 김에 마무리 짓는 편이 좋겠지?”
민성은 잿빛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다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