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2
282화 - 괴수 연구소 (4)
“설마 벌써 끝내신 건 아닐 테고, 제 얼굴이 그리우셨나 봐요?”
이수정은 가벼운 농담으로 감정을 숨기며 태연하게 민성을 맞았다.
“글쎄. 매력적인 건 인정하지만 단골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이수정의 농담 섞인 말투에 민성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하여튼. 이기려고만 드는 남자는 매력 떨어지는 거 알아요?”
“매력이란 놈이 내 입에 밥 한 술 떠먹여 주거든 생각해볼게.”
민성의 능청에 이수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멍청한 사람들이라도 구경하러 왔나요?”
“이번에 질 좋은 문어를 하나 낚았는데, 회 떠줄 사람이 와야 말이지.”
이수정은 뜬금없는 민성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다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손을 잡은 지 2주가 채 안 지났다. 헌데 벌써 요구조건을 만족시켰다니, 쉽사리 믿기 어려웠다.
“정말요? 최소 반년은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농담이었다고 해도 용서해 드릴게요.”
“정 믿기 어려우면 직접 확인해보면 되지.”
민성은 못 미더워하는 그녀를 이끌고 관찰소의 문들 중 하나로 이동했다. 원체 낡은 건물이었기에 문고리는 흔했다.
“설마 둘 곳 없다고 비품실에 처박아 둔 건가요?”
민성의 장난이라 짐작한 이수정은 샐쭉한 얼굴로 민성을 쏘아봤다. 그러나 민성은 대답 대신 아이템 창에서 열쇠를 꺼내 문고리에 넣고 돌렸다.
이수정은 환한 빛이 흘러나오는 문을 가만히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이게 대도가 사용하는 비밀통로인가요?”
“비밀통로일지 비품실일지는 들어가 보면 알겠지.”
이수정이 정부의 집요한 추적에도 잡히지 않았던 그의 과거를 우회하여 언급하자, 민성은 보는 이를 아리송하게 만드는 미소만을 지어 보였다.
“그러네요. 들어가 보면 알겠네요.”
이수정은 고개를 끄덕이곤 거침없이 빛 속으로 들어갔다. 민성은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민성은 비밀스러운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곧장 저 멀리 보이는 집을 향해 내달렸다.
“냥냥!”
넓은 밭과 호수를 지날 때면, 구슬땀 흘리며 일하던 고양이들이 뭉개진 감자나 잡어를 든 발을 자랑스럽게 흔들어 보였다.
“잘하곤 있는데 뭉개진 건 제발 좀 버려!”
민성은 그런 고양이들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면서도 잔소리를 빼먹지 않았다.
“오오오오! 싱싱한 주…….”
“입 열어!”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간 민성은 곧장 시바에게 소리쳤다. 시바는 콧수염을 몇 번 씰룩이더니 민성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입을 벌렸다. 민성은 동굴 같은 입 속으로 냅다 뛰어들었다.
잠시간 어둠 속을 하강하자, 이윽고 푹신하고 부드러운 털이 신발바닥을 반겼다. 민성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대강 가다듬곤 곧장 그녀를 찾았다. 이수정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짝-
소장을 가둬놓은 방에서 연신 짜릿한 타격 소리가 울려왔기 때문이었다. 민성은 조용히 문을 젖혔다.
“인생 그렇게 살지 마, 새끼야! 나이 처먹고 그렇게 살고 싶어? 어?”
축 늘어진 소장의 멱살을 잡고 뺨을 거칠게 후려치고 있는 이수정의 모습이 보였다. 볼이 터질 듯 퉁퉁 부어도 정신없이 코를 고는 소장의 모습은 어딘가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꽤나 쌓인 게 많았나 보네.”
“그런 감정도 없잖아 있긴 하지만 좀처럼 일어나지를 않으니 손을 쓸 수밖에 없잖아요?”
민성의 덤덤한 음성에 이수정은 몸을 흠칫거리곤 배시시 웃으며 소장의 멱살을 놨다.
“근데 반은 농담이겠거니 했는데 정말 생포하실 줄은 몰랐네요.”
“아예 시작도 안 했으면 몰라도 착수했으면 확실히 해야지.”
민성은 소장의 이마에 붙은 수면부적을 때냈다. 일회용이라는 부가설명이 달린 아이템답게 수면부적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불길에 감겨 사라졌다.
“곧 일어날 거야.”
민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썹을 꿈틀거리던 소장은 눈을 번쩍 떴다.
“여…… 여긴?”
소장은 작금의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웠는지 입 속에 고인 피를 뱉어내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우리 되게 오랜만이죠? 딱 두 가지만 물어볼게요. 에너지 스톤 빼돌린 장소랑 몰래 연구하던 자료들이랑 샘플들. 어디에 숨겼어요?”
“왜 네년이 여기에……. 억!”
이수정은 웃는 낯과 달리 신발 굽으로 소장의 얼굴을 자근자근 밟았다.
“네년이요?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되시나 본데 여기 연구소 아니에요, 소장님. 이마가 비었으면 눈치라도 챙기셔야죠.”
이수정은 조곤조곤한 음성과 달리 종아리에 힘을 그득 실었다.
“내가 어떤 새끼 때문에 냄새나는 곳에 평생을 처박혀있을 뻔했는데, 그거에 비하면 이 정도 고통은 약과죠. 그렇죠, 소장님?”
“그만……. 아악!”
‘없는 정도가 아니라 넘쳐흐르네.’
독기에 찬 이수정의 행각을 지켜보던 민성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밖에 있을 테니까 다 끝내면 불러.”
민성은 취조를 가장한 고문에 열중한 그녀를 뒤로하고 방에서 나왔다. 그리곤 각 방에 쌓아둔 식량들과 침구류 따위를 확인하거나, 아이템 창을 정리하며 시간을 죽였다.
30분 정도 경과했을까.
“그래서, 성과는 좀 있었어?”
민성은 상쾌한 얼굴로 방에서 나오는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썩 대단한 건 없었어요.”
이수정은 소장이 숨겼던 에너지 스톤 창고를 언급하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에너지 스톤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놈이 숨기고 있는 연구가 더 마음에 걸려요. 어지간하면 털어놓을 법도 한데 말이죠.”
창고 위치는 순순히 불더니 연구에 이르러선 자물쇠처럼 입을 다물었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몸을 짓밟고 때렸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창고의 물건이야 원래 국가의 것이고, 연구 성과는 오롯이 자신의 것이라 생각해 그런 걸지도 몰랐다.
“무슨 연구인데 그래?”
“그걸 알아내려고 간만에 운동 좀 했는데 성과가 없네요.”
이수정은 격한 운동 탓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을 이어갔다.
“뭐, 저놈 연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요. 연구실로 돌아가면 그보다 나은 결과물은 얼마든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요. 물론 그러려면 누군가가 마지막까지 확실하게 책임져줘야 하겠지만요.”
이수정의 눈웃음에 민성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길목 막고 있는 장애물 치워줬으면 내 할 일은 끝난 것 같은데. 오히려 지금부턴 네 능력을 검증받을 시간이지. 네가 정말 뛰어난 연구자라면 그쪽에서 알아서 부를 거고, 아니면 평생 썩은 내 나는 곳에 처박혀 있거나…….”
민성은 바닥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뒷말을 삼켰다. 혹여 그녀가 이번 일을 빌미로 지속적인 관계를 요구할 경우, 그녀를 죽이는 것도 생각해 두고 있었다. 사람의 입만큼 믿기 어려운 것도 없으니 말이다.
“흥. 걱정 마요. 욕심 받쳐줄 능력은 있으니까요.”
민성의 말에서 묘한 기류를 느낀 이수정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건 지켜보면 알겠지.”
*
안전지대 내, 대형 막사 근처. 수많은 사람들이 서류를 옆구리에 끼고 막사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올해 안으론 힘들 것 같다?”
잔잔한 물음이 막사에서 새어나오자 주변을 서성이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몸을 움찔거렸다, 물음이 의미하는 바를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중 일부 사람들은 막사 틈으로 내부 상황을 주시했다. 막사 안에는 종이더미가 산처럼 쌓여있었고, 머리를 쥐고 고심을 거듭하는 관료의 모습도 풍경화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나는 분명 올해 겨울까진 마무리 지으라 했을 텐데?”
박정후는 눈앞의 관료를 응시하며 서류를 휙 던졌다. 충청도는 전국 각지로 병력들을 파견하기 용이한 요충지다. 그렇기에 무리수를 둬서라도 탈환하려 했건만. 찬바람 같은 목소리가 막사를 훑자, 관료들은 머리를 처박고 들 생각을 못 했다.
“그것이…….”
관료는 흔들리는 눈알만 데굴 굴리며 타개책을 모색했다. 그러나 딱히 좋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올 겨울 내로 충청권까지 토벌하기는 어렵다고 호소했지만 각하께서는 오직 진군만을 명하지 않으셨던가.
“최선을 다하곤 있습니다만 이미 불바다가 된 도시에 진입하는 건 불가능한지라…….”
한참 머리를 굴리던 관료는 겨우 입을 벙긋거리며 의견을 설파했다.
“자각사에서 받아온 특수복으로도 어렵나?”
“네! 강한 열기에 모두 녹아내리는 탓에 진입은커녕 접근조차 어려운 상황입니다.”
관료는 살았다는 듯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얘기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일반 병사들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던 이종범은 슬며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흠.”
이종범마저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치자, 박정후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적어도 화염을 잡아야 병사들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 아이템, 화학품으로도 잡지 못하는 걸 무슨 수로?”
박정후는 보석보다 희귀한 미소를 보였다. 언제나 해결책을 물어오려 하는 충실한 개에게 주는 보상이기도 했다.
“자유권을 제공한 능력자들을 부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종범은 과거 협약을 맺었던 능력자들을 넌지시 언급했다. 다만 민성처럼 조건부 협조가 아닌 무조건적인 협조를 채결한 점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다른 놈들이야 그렇다 쳐도 놈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으려 할 텐데?”
박정후는 민성의 얼굴을 떠올리곤 주름살을 구겼다. 더욱이 놈에게는 보상까지 제공해야 하니 여러모로 활용하기 불편한 놈이었다.
“일부러 저희가 굽혔으니 저쪽도 과거처럼 마냥 거절하려고만 하지는 않을 겁니다. 각하께서 연락만 취해주시면 이후는 제가 책임지고 진행해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올해 내로 끝낼 수만 있다면 뭐든 해봐.”
이종범의 호언장담에 박정후는 살며시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며 손을 까딱였다.
“다만 결과에 따른 책임도 오롯이 네 몫인 건 알고 있지?”
“명심하겠습니다.”
이종범은 안경이 코 밑으로 흘러내릴 정도로 바짝 허리를 숙였다. 그리곤 다시 허리를 들어 올리려는 찰나,
“각하! 큰일…… 큰일 났습니다!”
누군가가 다급하게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다만 어깨 위 한 개의 별이 그의 지위를 짐작케 했다. 박정후가 얘기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장교는 잠시 숨을 고르곤 보고를 시작했다. 실험소에서 원인불명의 대형사고가 벌어졌으며, 그 여파로 실험소장 외 1명이 실종됐다는 것이 내용의 중요 골자였다.
“후…….”
하필 연구소 중대사를 관리하는 소장이 행방불명 상태란 말에, 박정후는 잘게 흔들리는 나무 폴대를 보며 나지막이 한숨 쉬었다. 안 그래도 처리해야 할 사항들이 넘쳐나건만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고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사고 원인은?”
“아직 조사 중에 있습니다만 내부 관계자의 말로는 연구물이 폭발작용을 일으킨 것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또한 사건 발생 전 행방불명된 둘 사이에 설전도 있었다고 합니다. 관계자는 아마 그 여파로 싸움이 과열돼 그들이 연구소재를 다툼에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의문을 제기해? 사고 발생지의 감시 카메라를 확인하는 편이 확실할 텐데?”
“그……. 회의내용 보안 유지를 위해 사건 발생지에는 설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박정후의 물음에 장교는 잔뜩 굳은 얼굴로 바닥만 내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