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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캐쉬상점 쓴다-275화 (275/303)

# 275

275화 - 누구를 위해 평화의 나팔을 부나 (1)

“좋아. 내가 도와줄게.”

[정말인가?]

바크는 놀란 듯 눈을 치켜뜬 채 꼬리를 살랑거렸다.

“속고만 살았나. 대신 당분간은 돌 맞으면서 얌전히 갇혀있어. 알겠어?”

[알겠다. 그대의 말을 믿겠다.]

바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민성은 오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됐으니까 집어넣어.”

“괜찮을까요? 사슬도 풀어버린 놈이라 또 난동을 부리면 난감할 것 같은데요.”

민성의 명령에 이수정은 우려사항을 넌지시 질문했다.

“괜찮아. 잘 얘기해뒀으니 별일 없을 거다.”

“그렇다면야….”

이수정은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보이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었으나 다른 이도 아닌 민성의 말인 만큼 믿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조만간 복직시켜줄 테니까 미리 준비하고.”

“알았어요. 복직하면 저도 그쪽을 만족시킬 만한 연구결과를 준비할게요.”

이수정이 손을 내밀자, 민성은 손을 맞붙잡곤 흔들어 보였다.

*

거대한 제전 안. 일정 거리마다 자리한 거대한 기둥들은 끝 모를 천장을 떠받들었고, 천장에 가득 박힌 야명주는 은은한 불빛을 쏟아냈다. 과거의 영광을 담은 조각상들은 기둥 사이사이마다 자리하여 제전 분위기를 더욱 엄숙하게 만들었다.

“실패했다고?”

제전 중앙 끝에는 여의주를 문 흑룡이 똬리 튼 옥좌. 그 위에는 염세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팔을 괴고, 바닥에 바짝 엎드린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 실패했습니다.”

그중 머리가 하얀 소년은 고개를 들어 옥좌에 앉은 남자를 당당히 응시했다.

“앞날을 바라보는 눈을 가진 그대에게 실패라는 말이 가당키는 한가? 혹여 일부러 실패한 건 아닌가? 교의 대업이 코앞에 직면해있음을 알면서도?”

“알고 보니 마교 놈들의 끄나풀일지도 모를 일이지.”

대전 좌우로 늘어선 이들은 이때다 싶어 백야를 몰아세웠다. 아무리 신분고하 막론하고 능력을 우선시한다지만,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를 돌이 세운 업적은 그들의 자리를 위협하기 충분했다. 물론 처음부터 경계심을 표출한 것은 아니었다.

“그 듣기론 아직 혈뇌께서는 가정을 꾸리지 않으셨다 들었는데. 커험, 다름이 아니고 내게 혼기가 찬 딸내미가 있는데… 어떤가?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정말 어디 놔둬도 꿀리지 않는 아이라네.”

미래를 예견하는 소년을 얻고자 많은 가문들이 혼약 혹은 희귀한 재화로 포섭을 시도했었다.

“죄송합니다. 장로님의 여식과 반지를 교환하는 미래는 보이지 않는군요.”

하지만 백야는 유혹하는 모든 손길을 거부했다. 그 덕에 갖지 못하면 차라리 부수겠다는 이들에게 꽤나 많은 적의를 받아내야만 했다.

“입은 모든 죄악의 근원지다.”

제전이 추궁으로 시끄러워지자, 옥좌의 남자는 귀찮다는 듯 하품하며 중얼거렸다.

“읍! 읍!”

그러자 제전의 모든 이들 입에 자물쇠가 채워진 것처럼 사람들은 입술을 떼지 못했다.

“나는 지금 혈뇌에게 묻고 있다. 제전에 입장하기 전에 개인사와 사사로운 감정은 모두 아수라 상에 두고 오라 했을 텐데.”

“읍!”

심드렁한 남자의 말에 좌중들은 일시에 포복하여 이마를 대리석 바닥에 처박기 시작했다.

“혈뇌여. 나는 너의 능력을 높이 사 그에 걸맞은 직위를 하사했다. 하지만 오늘 나를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그대가 보는 미래도 오늘로서 끊기겠지. 또한 그대가 손발처럼 부리는 이들도 예외는 아니야.”

“읍!”

교주의 말이 끝나자, 우철과 자하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항변하려 했다. 그러나 막힌 입에선 무의미한 신음만이 나올 뿐이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

대답 여부에 따라 죽이겠다는 경고에도 백야는 평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오늘 이곳이 제 무덤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호오. 그래?”

백야의 자신 있는 모습에 교주는 얘기해보라 고개를 까딱였다.

“제 능력이 닿지 않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래? 누구든 예외는 없다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백야의 발언에 교주는 귀찮은 눈빛을 벗어던지고 관심을 보였다.

“저 또한 그러리라 생각했지만 전부 오만에 불과했습니다. 역시 세상은 넓고 인재는 많더군요.”

백야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보이며 민성을 인정했다. 그리곤 수하들의 보고와 현재까지 진행한 일들을 종합하여 간략히 언급했다.

“미래를 볼 수 없다 한들 그대 수족들의 상대가 되긴 어려웠을 텐데.”

“안타깝지만 그 방법 또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백야의 발언에 순간 제전은 묘한 분위기로 술렁거렸다. 배알 꼴리긴 해도 백야를 따르는 장로들은 교내에서 알아주는 실력가들이었다. 헌데 그마저 통하지 않았다니 점점 상대가 궁금할 지경이었다.

“재밌는 놈이네. 마교가 키워낸 놈인가? 아니면 양놈들이 열쇠에 대해 뭔가 눈치채고 들어온 것 같던가?”

“전부 아닙니다. 확인 결과, 놈은 자각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긴 하나 이렇다 할 소속은 없었습니다. 정보를 종합해 봤을 때 놈이 어디선가 비고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다만 워낙 영악한 놈이라 좀처럼 뒤를 잡지 못했습니다.”

백야는 그간 자하가 이종범의 그림자에 숨어 들은 이야기를 전달했다.

“흥. 잡것들이 눈치챈 게 아니면 됐다. 그깟 비고는 얼마든 넘겨줘도 된다. 가장 중요한 건 열쇠다. 정말 놈이 갖고 있을 거라 확신하는 건가?”

얼마를 가지건 알바 아니지만 열쇠는 아니었다. 대업을 이루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물건. 문을 확보한 만큼 반드시 손에 넣어야만 했다.

“떠돌이 용병들은 놈이 마지막까지 열쇠를 지키는 수호자의 방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놈이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신출귀몰한 놈이라 행적을 종잡기 어렵습니다.”

“늑대를 잡기 어렵다면 가족을 붙잡으면 될 거 아닌가?”

어째서 가족을 볼모로 붙잡지 않았냐는 물음에 백야는 고개를 저었다.

“그 방법 또한 시도해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친은 과거에 사망했고, 아버지 또한 과거에 행방불명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그의 새어머니 역시 이번 이변으로 행방불명되어 친지를 볼모로 붙잡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가진 것이 많은 자일수록 겁박하기 쉽다.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잃을 것 없는 놈은 다르다. 잃을 것이 없기에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른다.

“혈뇌여. 이제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조만간 문의 시공이 끝난다. 비록 너를 아끼지만 만약 시간 안에 열쇠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백야는 귀찮다는 표정 너머로 보이는 씁쓸한 감정을 읽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제 목을 잘라 교내의 광장에 높이 거시고, 능력은 수거해 저보다 더 나은 이에게 하사하시면 됩니다.”

“필요한 것은 없느냐.”

“자하가 있다곤 하나 횡단에 꽤나 시간이 걸렸습니다. 곧바로 한국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천리단의 단주를 붙여주십시오.”

“읍읍! 읍!”

교에 하나뿐인 공간이동 능력자를 붙여달라는 말에 좌중들은 거칠게 반발했다. 그러나 백야의 요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놈은 상당히 민첩합니다. 놈을 겁박할 물건이 필요합니다. 어지간한 물건으로는 힘들 것이니 진노의 섬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십시오.”

“진노의 섬을?”

교주는 의아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인스턴트 던전 개방도구로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상대방의 동의 없이 강압적으로 입장시킬 수 있는 점을 이용하려 합니다.”

“옳거니!”

백야의 뜻을 이해한 교주는 옥좌 손잡이를 탁 내리쳤다. 여타의 인스턴트 던전과 달리 진노의 섬은 특정 조건을 만족할 경우, 상대방을 강제적으로 밀어 넣는 것이 가능했다. 그 뜻인즉슨 민성을 던전 안으로 몰아넣고 공간이동 능력을 이용해 빠르게 복귀하겠다는 말이었다.

“음. 음.”

간단하지만 가장 이상적인 납치방법에 입을 봉인당한 좌중들도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다. 허락하겠다. 또한 내 호위무사들을 붙여주겠다.”

교단 내 최고의 전사들을 붙여주겠다는 말에, 좌중들은 주억거리던 고개를 움찔거렸다.

“반드시 열쇠를 갖고 오거라.”

“천년 대업을 반드시 성사시키겠습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백야의 외침이 울리자,

“읍읍! 읍읍! 읍읍읍!”

좌중들도 따라 목청을 높여 제전을 울렸다.

*

“케케케!”

티노는 서글픈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얼어붙은 대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두르의 지배를 받던 영역이었다. 선생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구역부터 둘러보다 보니, 결국 이곳까지 오게 됐다. 새도우 데몬 일족의 영역에도 들렀었지만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아름답지만 춥다….”

갖가지 색으로 물든 오로라가 내려와 얼굴을 감싸는 듯했다. 인간 세상에도 비슷한 것이 있었다. 민성은 그것을 커튼이라 부르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지배자도 예속된 주민들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짙은 한기를 품은 북풍이 피부를 베어버릴 것처럼 날카롭게 불어댔다.

“이럴 땐 피부가 없어 다행이다. 케케케케!”

다만 뼈마디가 시린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티노는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허공을 부유했다. 평소라면 인간이 호응해줬겠지만 지금은 답해줄 이가 없다.

“음….”

외로움만이 남은 공간에 있는 탓일까. 문뜩 북풍보다 차가운 옛 생각이 떠올라 뼈마디를 엄습해왔다. 그가 처음 쓰레기장에 발을 디뎠을 때만 해도 이렇다 할 권력자가 없던 시절이었다. 좋은 말로는 자유가 있는 곳, 나쁜 말로는 무법지였다.

털썩-

“지옥…. 우린 지옥에 와 버렸어….”

쓰레기장에 함께 떨어진 몇 안 되는 동족들은 너무도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다만 신의 자그마한 자비였을까. 그중에서도 극소수는 어찌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아 질긴 목숨을 이어갔다. 그러나 불행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왔다.

“소수 부족이다! 죽여서 양식으로 삼자!”

똑같이 인간에게 패배해 땅을 잃고 가족을 잃은 신세들이었지만, 스스로를 지킬 힘을 잃은 종족은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그런 고통은 다시 겪고 싶지 않다.”

티노는 그 당시 상황을 떠올리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로잡혀 살점을 발려내는 고통은 지금도 뇌리에 뚜렷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정확힌 눈 떠보니 선생의 집이었다는 표현이 더 올바른 듯했다.

“왜 나를 살렸나, 인간. 우리 종족을 파멸로 밀어 넣은 걸로는 부족했나?”

선생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경계했다. 어째서 인간이 쓰레기장에 있는지 의문도 들었지만, 호기심보다는 증오심이 더 컸기에 개의치 않았다.

“아니. 그 반대야. 언제고 세상이 합쳐질 때 필연적으로 혼란이 발생할 거야. 그때 네가 누군가의 힘이 돼줬으면 좋겠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아, 지금은 굳이 이해하려 할 필요 없어. 것보다, 차 마실래?”

하지만 선생은 온화함과 따듯한 감정으로 내 경계심을 조금씩 허물어갔다. 더불어 인간에 대한 증오심도 조금씩 사그라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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