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
274화 - 괴수 관찰소 (6)
[인간들에게 패배한 뒤로 세 개의 달과 여덟 개의 별을 보며 포효하던 일족은 멸족 당했다. 그럼에도 내가 구질구질하게 목숨을 이어갔던 이유는 오로지 은빛 대지를 다시 밟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 전이되고 삭막한 건축물들 속에서 얻은 것이라곤 낭떠러지 같은 절망감뿐이었다. 죽음으로써 진정 자유를 누리고자 했거늘. 인간이여. 왜 나를 되살린 것인가. 농락거리로 전락한 나를 자연의 섭리가 다할 때까지 비웃기 위함인가?]
“웃긴 놈이네. 내가 뭐 하러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
좌절뿐인 음성에 민성은 실소를 터뜨렸다.
“네?”
뜬금없는 민성의 말에 직원들에게 지시 내리던 이수정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민성은 붉은 눈을 계속 주시했다.
“다만 네 목숨이 붙어있어야 이쪽도 득이 되거든. 그뿐이야.”
[고작 사사로운 이득 때문에 날 살렸단 말인가?]
기가 막힌다는 음성에 민성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아니면 뭐가 이쁘다고 살려주겠어? 너희 때문에 이쪽도 아주 개판이 됐는데.”
민성의 말은 오한이 들 정도로 차가웠다. 외려 돌을 던지던 인간들의 비웃음이 더 따듯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웃기지 마라! 감히 나를 능멸해? 용서하지 않겠다!]
빠득-
갑자기 괴수가 발광하듯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그러자 놈의 몸을 속박하던 쇠사슬에 점차 금이 갔다.
“미친…. 몇 개월 걸려 만든 특수합금인데 저걸 부순다고?”
“젠장! 보고 있지만 말고 빨리 집어넣어!”
그 모습에 기겁한 직원들은 서둘러 괴수를 계란 속으로 넣으려 했다.
[웃기지 마라!]
“크아아아아앙!”
“크윽!”
“아악!”
괴수의 입에서 요란한 괴성이 터져 나오자, 지척에 있던 직원들은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대응이 늦은 탓인지 일부는 귀에서 피를 흘리기도 했다.
띠링-
[바크의 하울링을 들으셨습니다. 15초간 몸이 경직됩니다.]
“얼씨구?”
민성은 갑자기 나타난 메시지를 보곤 피식 웃었다. 기껏 살려줬더니 곧바로 어금니를 보이는 모습이 가당찮게 느껴졌다.
“크릉!”
그 사이 쇠사슬을 박살낸 바크는 네 다리를 사뿐히 땅에 디뎠다. 그리곤 그간 그를 거칠게 다뤘던 인간들을 내려다봤다. 하나같이 겁에 질려 경직되어 움직이지 않는 몸만 벌벌 떨고 있었다.
[모두 죽여도 속이 시원하지 않겠지만….]
바크는 이죽거리는 민성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날 살려준 공을 생각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그간 인간들에게 당한 모멸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몸을 산산조각내고 싶었으나, 일족 최후의 전사라는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살려주긴 개뿔. 하여튼 이 새끼나 저 새끼나 조금만 틈을 주면 발악을 하네.”
[뭐?]
등 돌려 탈출구로 이동하려던 바크는 조롱 섞인 음성에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정작 보인 것은 원수 같은 인간들의 얼굴이 아닌, 검고 굵은 막대기 같은 형상이 얼굴로 내려오는 광경이었다.
[무슨!]
바크는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려 했지만 검의 속도는 그보다 빨랐다.
치익-
검면이 콧등을 강타하자, 체력과 마력이 뭉텅 깎여 나가며 전신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이 몸을 엄습해왔다.
“크아아아앙!”
바크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검의 주인을 죽일 듯 노려봤다. 자신의 체구보다 큼지막한 대검을 든 민성이 그를 보며 손가락을 까딱이고 있었다. 아직 경직시간이 끝나지도 않았건만 어째선지 놈은 멀쩡히 서있다.
“그거 알아? 짐승새끼들도 살려주면 꼬리를 흔들어. 꼬리가 어려우면 뿔이라도 흔들어 보였어야지.”
[이놈! 뇌신화!]
민성의 조롱에 눈이 뒤집어진 바크가 고함치자, 그의 새하얀 털에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곤 한 줄기 벼락처럼 지나간 잔상만을 남기며 자취를 감춰버렸다.
“속도전이라면 이쪽도 환영이지. 바람을 타다.”
민성은 바크의 잔상을 보며 작게 읊조렸다. 그러자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세상이 펼쳐졌다.
“개과라 그런가, 거 요란하게도 뛰어다니네.”
[어… 어떻게 내 움직임을 쫓아올 수 있는 건가!]
“글쎄? 맞다 보면 알게 되겠지?”
당혹스러워하는 음성에 민성은 답 대신 대검을 높이 쳐들어 보였다. 그리곤 바크를 향해 매섭게 돌격했다.
빠직-
치익-
하얀 벼락과 검은 기둥이 맞부딪힐 때마다 요란한 굉음 소리가 울려댔다.
“으으으….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사람이 아니라 괴수 아니야?”
직원들은 폭풍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오직 이수정만이 오롯이 서서 입술을 물어뜯을 뿐이었다. 하나뿐인 표본이 죽는 것도 문제지만, 자칫 전투의 여파로 다른 괴수들이 갇혀있는 감옥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었다. 허나 무엇보다 두려운 건 혼란보다 복귀가 힘들 수도 있다는 점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걱정과 달리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벼락이 계란에 닿을 찰나면, 검은 기둥이 그것을 가로막았으니 말이다.
치익-
“오오오!”
벼락과 기둥이 몇십 번이고 맞부딪히던 중, 하얀 벼락이 점차 힘을 잃고 느려지자 사람들은 기세가 한쪽으로 기울었음을 느꼈다. 이윽고 검은 기둥이 벼락을 삼켜버리는 듯한 모습이 보이기 무섭게,
“크렁!”
바크는 외마디 괴성을 지르며 벽에 처박혔다. 칼자국 대신 몸 곳곳에 검은 멍이 든 것이 점박이처럼 보였다.
“지금이에요! 빨리 포획해요!”
민성의 승리를 직감한 이수정이 직원들에게 화급히 명령했다.
“기다려. 아직 안 끝났어.”
“알았어요.”
그러나 민성이 손을 들어 제지하자, 고개를 끄덕이곤 뒤로 물러났다.
[어찌 신께서는 이다지도 인간들을 아끼신단 말인가….]
“물론 너희를 보면 불쌍하다는 감정도 들어. 근데 생각해 봐. 도박을 할 거면 그 결과에도 순응할 줄 알아야지.”
바크의 서글픈 목소리가 울리자, 민성은 작게 숨을 몰아쉬며 답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의구심 가득한 물음에 민성은 한숨 쉬며 말을 이어갔다.
“쓰레기장에서 도망치면 고향으로 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배팅하고 나온 거 아니야? 나오지 않는다는 선택지도 있었을 텐데 굳이 전자를 선택한 대가를 치르라는 소리지.”
민성은 놈도 이해하기 쉽게 말을 풀어 설명해줬다.
[애초에 인간들의 거처로 이동될 줄 알았다면 시도조차 않았을 것이다!]
바크는 힘 들어가지 않는 몸을 겨우 일으키며 소리쳤다.
“몰랐으니까 물러달라고? 그건 개소리지. 결과를 미리 알고 배팅하는 게 도박이야? 사기지. 너흰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배팅했고 도박에 실패한 거야. 알아들었어?”
현실을 직시시키는 민성의 시린 음성에 괴수는 붉은 눈동자만 크게 부라릴 뿐이었다.
“뭐, 백번 눈감아줘서 침입이야 그렇다 쳐. 너희 머릿속에는 타협이라는 게 없나 보더라? 너처럼 인간과 대화할 줄 아는 놈들이 있으면 그걸 이용해서 대화할 생각이라도 해봐야지. 그냥 죽자고 달려들기만 하니까 이런 결과를 초래하는 거 아냐.”
실제로 민성이 대화를 시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티노가 위협적이지 않거나 오히려 살려두면 세상에 이로움을 주는 종족이라 설명한 경우에는 먼저 손을 내밀어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적개심을 보였기에 목을 벨 수밖에 없었다.
[나 또한 전쟁보단 화평을 원하는 입장이지만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얼씨구? 화평을 원한다는 놈이 제 맘에 안 든다고 발부터 쳐들어?”
민성이 정곡을 찌르자 바크는 몸을 움찔거렸다.
[어… 어쨌건 누구든 적지에 들어오면 경계하고 또 경계할 수밖에 없다.]
“그건 너희들 입장이고. 너희가 자꾸 발악을 하는데 집주인이 호구도 아니고 집 털리는 걸 가만히 보고 있겠어?”
[네 말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런 노예만도 못한 처우는 정당치 못하다. 그대는 친족이 우리에 갇혀 웃음거리가 되도 방관할 것인가?]
바크의 불평에 민성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얼빠진 놈이네. 그럼 애초에 그럴 상황을 만들지 마. 불평만 하지 말고 바꿀 생각을 하라고.”
[뭐?]
바크는 민성의 눈을 찢어놓을 듯 노려봤다.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잠깐의 자유는 작은 유리창 속에 갇혔고, 신체는 차가운 사슬에 묶여 있다. 헌데 자유라니? 민성의 말은 그저 그를 비웃는 조롱처럼 들려왔다.
“그렇잖아? 사람과 대화할 줄 알면 어떻게든 그걸 활용할 생각을 해야지. 내가 너였으면 일단 잡히지도 않았거니와, 이쪽으로 건너온 다른 주민들이랑 손잡고 최소한의 세력을 만들었을 걸? 어느 정도의 힘이 있어야 상대방도 귀 기울여 주니까.”
민성의 현실적인 조언에 바크는 망치에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 지금부터라도 계란 속에서 잘 생각해봐.”
민성은 작별의 뜻으로 손을 저어주곤 고개를 돌려 이수정을 바라봤다.
“죽을 정도로 때리진 않았으니까, 앓는 소리 해도 치료해주지 마.”
“그럴게요. 고마워요.”
이수정은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하나뿐인 표본의 치료도 모자라 자칫 괴수의 손에 죽을 뻔한 것을 구해줬으니, 당연한 처사였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라!]
이수정과의 대화를 끝으로 민성이 등 돌리려 하자, 바크는 다급히 민성을 불러 세웠다.
[화음을 원하는 조율자여. 계속되는 불행에 지쳐 깊은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네 말을 듣고 나니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내 용맹함을 이용해 주민들을 규합하고 화평의 초석을 닦아보겠다! 그러니 부디 이곳에서 나를 풀어주길 바란다!]
“흠….”
바크의 외침에 민성은 눈가를 긁적였다. 괴수와 인간의 공존. 혼란스러운 현실을 빠르게 타개할 방법 중 하나이긴 했다. 그러나 솔직히 실현가능성을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것이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니까. 뭐, 그래도 한번 배팅해봐? 되면 좋은 거고, 아니면 편안한 생활이 조금 늦춰지는 것뿐이니까.’
“크어엉!”
“뭐, 뭐야!”
“또 발광하려 하잖아! 빨리 넣어버려!”
그러나 간절한 외침도 다른 이들에게는 분노의 울부짖음으로 보일 뿐이었다. 직원들은 황급히 기계를 조작하여 바크를 계란 속에 넣으려 했다.
“놔두라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민성의 명령에 직원들은 몸을 움찔거리며 버튼에서 손을 땠다. 인간 같지 않은 능력을 가진 자의 말을 거부할 정도로 용기 있는 자는 없었다.
“그렇게 자신만만한 놈이 그런 부상이나 입고 골골대고 있었어?”
민성의 빈정거림에 바크는 황급히 머리를 꿈틀거렸다.
[그건 인간들에게 입은 부상이 아니다! 이곳으로 전이되기 전 아두르와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었다!]
“호오. 그래? 전력 차가 뻔했을 텐데?”
민성은 입술을 꿈틀거렸다. 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배짱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리 한 구역의 지배자더라도 내 작은 영역에 침입한 만큼 싸울 수밖에 없었다.]
‘배짱도 있고 아두르나 아크네 말고는 딱히 강력한 녀석도 못 봤으니 어지간하면 죽을 일은 없겠지.’
손실 없는 도박에 배팅하기로 마음먹은 민성은 놈의 몸통을 툭툭 건드렸다. 어차피 이수정과의 약속을 위해 움직이는 김에 조금 더 고생하면 그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