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
272화 - 괴수 관찰소 (4)
그저 힘에 도취된 철부지라고 생각했건만 너무 과소평가한 모양이었다. 적당히 구슬려 정부와 그 사이에 갈등을 유발해 이득 보려 했던 계획도 전면수정이 필요했다.
“그럴 능력은 되고요?”
“글쎄? 두고 보면 알겠지?”
민성이 태연하게 말하자, 그의 행동을 예의주시하던 이수정은 잘근 깨문 입술을 천천히 땠다.
“배짱이 좋은 건진 몰라도 소문이 과장된 건 아닌가 보네요. 뭐, 좋아요. 손잡을 건가요?”
그녀가 재차 제의하자, 민성은 피식 미소 지었다. 에너지 스톤 정보 외에도 아직 숨겨놓은 패가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그쪽이랑 거래를 터서 이득 볼 게 있나? 뭐, 일단 얘기해봐.”
민성이 심드렁하게 손짓하자, 이수정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냈다.
“제가 원하는 건 딱 하나예요. 다시 연구소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줘요. 덤으로 연구소 윗대가리 중 일부 물갈이 할 수 있게 힘도 실어주면 좋고요. 정부 신임깨나 받는 그쪽 한마디면 될 텐데, 쉬운 일 아닌가요?”
“쉬운 일이라고?”
쉬운 일로 포장하여 가격을 깎아보려 하는 그녀의 모습에 민성은 재미있다는 듯 피식 미소를 흘렸다. 그녀의 요청대로 정부 측의 승인을 받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정부 측 또한 무언가를 요구할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그렇게 쉬운 일이면 부탁할 것 없이 네가 하면 되겠네.”
“네? 자… 잠깐만요!”
민성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당황한 이수정은 다급히 민성의 손을 붙잡았다.
“훗날, 아니. 당장 근시일내라도 세상을 바꿔놓을 물건이에요. 하물며 그런 물건의 정보를 미리 선점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르시는 건가요?”
“알지. 잘 알지. 근데 말했잖아. 그쪽 말고도 들을 곳 있다고.”
민성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조금이라도 내 관심을 끌고 싶으면, 간 보지 말고 숨기고 있는 패 꺼내 보이는 게 좋을 걸? 그게 싫으면 대화는 여기까지만 해야겠지.”
“….”
민성의 덤덤하면서도 차가운 눈빛을 맞닥뜨린 이수정은 손가락만 달싹거리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련해 보였던 곰이 간사한 뱀으로 변해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듯했다.
“현재까지 연구된 에너지 스톤의 정보와 앞으로 나올 정보의 우선권. 그리고 아직 정부에는 올리지 않았던 제 독자적인 연구 결과. 제가 제공할 수 있는 전부예요.”
결국 이수정은 백기를 들어 올리곤 중얼거리듯 숨겨놨던 패를 꺼내보였다.
“독자적인 연구 결과라…. 대가는?”
그제야 민성은 흥미를 보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실험의 중추에 있었어요. 어떤 망할 새끼가 제 업적을 강탈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죠.”
이수정은 재차 한숨 쉬며 그녀가 관찰소로 온 이유를 간략하게 늘어놨다. 그녀는 에너지 스톤에서 어떠한 과학 작용을 가할 경우, 마나를 추출할 수 있는 마나석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공로에 눈이 먼 상관에게 결과물을 뺏기고 입막음을 빌미로 이곳에 왔다고 설명했다.
“아, 이건 제가 몇 개 슬쩍해 온 거예요.”
그리곤 품속에서 돌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하급 마나석]
설명: 에너지 스톤에 특수한 공정을 가해 만들어낸 인위적인 광물이다. 사용 시 사용자의 마나를 조금 회복시켜준다.
등급: ★★
남은 횟수: 10/10
“호오. 그럼 아까 그들이 사용하던 것도 전부 그쪽이 개발한 결과물이었던 거네?”
민성은 실드를 관리하던 능력자들이 쥔 돌을 떠올리곤 넌지시 질문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미완성품이에요. 제대로 공정을 거친 건 선명한 푸른색을 띠거든요. 완성품은 엄중히 관리되어 빼내는 건 무리였지만 말이죠.”
“미완성?”
“후…. 미완성이건 뭐건 이제 아무래도 좋아요. 어차피 대외적으로는 전부 그 새끼가 개발한 걸로 알고 있을 텐데 무슨 상관이겠어요? 확 터져버려야 그 새끼 낯짝 어두워지는 걸 볼 수 있을 텐데. 뒷배 없는 연구원 처지가 다 이렇죠. 부속품처럼 다뤄지다 연식이 다 되면 폐기되고.”
민성이 되물었으나, 그녀는 듣지 못했는지 이를 갈며 가슴에 담아둔 감정을 쏟아내기 바빴다. 그러다 갑자기 날카롭게 민성을 노려봤다.
“평생 괴수들 몸이나 관리하면서 늙어죽겠거니 생각하던 찰나에 위쪽에서 연락이 왔었어요. 그쪽이 온다고 말이죠.”
민성의 방문 소식은 그녀의 심장을 거칠게 두들겼다. 정부도 통제를 포기하고 손을 놨다는 존재. 그라면 틀림없이 작금의 상황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존재라 생각했다.
“이거 개인정보 관리가 너무 허술한 것 같은데.”
민성은 피식 웃으며 농담조로 정부의 정보 관리 능력을 질타했다.
“정부가 관심 대상으로 지정한 능력자들의 정보는 이쪽 라인으로도 내려와요. 그럼 우린 그걸로 모의토론을 진행하죠. 혹여나 연구 자원으로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민성은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인간을 실험재료 취급하는 상황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그쪽 정보는 더 이상 내려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죽었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쨌건 제게는 행운이라는 놈이 작용한 셈이 됐네요.”
그녀는 얇은 입술을 치켜 올려 보였다. 민성 또한 그녀를 따라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뭘 주냐에 따라 행운이 될 수도 있고 불행이 될 수도 있겠지.”
“대충 눈치채셨겠지만 이곳으로 좌천되기 전까지 저는 실험의 중추에 있었어요. 제가 복귀하면 연구에 탄력이 붙을뿐더러 마나석 변환 외에도 에너지 스톤이 지닌 여러 가지 가능성을 밝혀낼 수 있겠죠?”
그러나 민성이 오묘한 눈웃음만을 짓자, 이수정은 서둘러 뒷말을 이어갔다.
“제가 얻어낼 연구 결과물들 중 핵심은 그쪽에만 드릴게요. 그쪽이 원하면 정부에 보내야 할 정보도 통제하겠다는 뜻이죠.”
꽤나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정보의 우선권이란 생각 이상으로 가치 있는 무형자산이다. 더욱이 그녀의 지위가 올라갈수록 그녀가 물어올 정보도 더 다양해질 것이다.
‘다만 부탁하지 않고 복귀시키고 싶은데.’
이종범에게 넌지시 귀띔한다면 그녀의 복귀는 일사천리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의심 많은 놈인 만큼 그의 저의를 의심할 것이고, 그녀에게 감시의 눈이 붙을 게 뻔했다. 또한 당연히 복귀에 대한 대가도 요구할 것이다.
“혹시 연구소도 안전지대 내에 있어?”
“아뇨. 그러기엔 부지가 좁아서요.”
“그래?”
그녀의 답에 민성은 괜찮은 발상을 떠올리곤 악마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구원 복귀와 귀찮은 상관 제거. 그거면 돼?”
“그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겠죠. 솔직히 이딴 곳 관리하는 것보다 연구하는 게 천직이거든요.”
민성이 긍정의 신호를 내비추자, 그녀는 화사하게 웃으며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혹여나 민성이 변심할까 하여 서둘러 민성의 손을 잡곤 흔들었다.
“정 믿기 어려우면 계약서를 작성해도 좋아요.”
“됐어.”
계약이란 비슷하거나 혹은 우위에 있는 자를 옭아매기 위한 수단이다.
“그보다 이제 한 배를 탔으니 세부사항에 대해 좀 더 얘기하고 싶은데.”
“좋아요. 저도 하고 싶은 말이 꽤 많으니까요.”
“마나석 말고도 다른 능력을 가진 돌로도 변환….”
저벅-
민성들이 구체적인 사항을 두고 논의하려는 찰나, 아주 미세한 걸음 소리를 감지한 민성은 대화를 중지시켰다.
“손님이 오는 것 같은데.”
“네?”
이수정이 민성의 말을 채 인지하기도 전에 발소리는 그녀가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그리곤 그들은 곧 복도에서 누군가가 다급히 뛰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목에 직원용 카드를 건 남자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수정 앞에 다가왔다.
“저… 소장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잠시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죠?”
필시 무슨 사단이 났음을 직감한 이수정은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여기서 말씀드리기는 조금 곤란한 일인지라….”
“아뇨. 그냥 말하세요. 이분도 관계자시니까 상관없어요.”
직원이 민성을 힐끗 보며 작게 속삭였지만, 그녀는 단칼에 직원의 걱정을 잘라버렸다. 그 모습에 민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것이…. 일부 괴수들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뭐라고요?”
직원의 보고에 이수정은 목소리를 높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나랑 장난해요? 시민들 반응 과해지면 시간 안 됐어도 그냥 뚜껑 덮으라고 제가 누차 말했죠?”
“죄송합니다. 실드 관리자가 배가 너무 아프다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그만….”
직원의 안쓰러운 변명에도 그녀의 굳은 표정은 좀처럼 펴질 생각을 않았다.
“그럼 바지에 싸라고 했어야죠. 그렇게 무책임해서 어째요? 샘플 하나 포획하는 데 평균 100명가량의 정예 병사가 죽었다고 봐야 하는데, 당신 부주의로 샘플이 죽기라도 하면 당신 손으로 100명의 군인을 죽인 거나 다름없겠죠? 100명이나 죽였으면 못해도 사형이나 무기징역 확정이네요.”
“그, 그건….”
끝없는 질타에 말문이 막힌 직원은 헛소리만 연발했다.
“그렇게 일해서 밥은 먹고 살겠어요?”
“그럴 시간에 일단 상황을 보고 빠르게 조치를 취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보다 못한 민성이 중재하자, 그제야 이수정은 잔소리를 멈췄다.
“지금 관리시설로 갈 건데, 같이 가시겠어요?”
본디 관계자 외에는 엄중히 출입금지 조치를 취했지만, 그녀와 손잡은 민성에겐 예외사항이었다.
“좋지.”
민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괴수들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가요.”
그리곤 입술을 깨문 채 서둘러 달려가는 그녀의 뒤를 여유롭게 따라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자 폭이 좁고 길쭉한 복도를 마주할 수 있었다. 길이 여럿 있어 미로처럼 보였으나 이수정은 익숙하게 걸음을 옮겼다. 민성은 시설에 대한 궁금증이 동했으나 대화를 나눌 상황은 아닌지라 조용히 뒤를 따랐다.
“끼아아악!”
“쿠웍! 쿠웍!”
와중에 여러 문을 지날 때마다 괴수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점차 시끄럽게 울려왔다. 이수정은 이곳이 괴수들을 수용하는 시설인 동시에 시민들의 분풀이를 받아낸 괴수들의 치료소 역할을 한다고도 말했다.
“여기예요. 마스크도 있으니까 필요하면 말해요.”
이윽고 이수정은 마지막 문을 젖히며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문 사이로 퀴퀴한 피 냄새와 구역질을 일으키는 오물냄새 등 역한 냄새들이 섞여 코를 찔러왔다.
“시설이 많이 열악한 것 같은데.”
민성은 문 너머의 광경을 힐끗 보곤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어요. 옛날에 만들어졌던 지하 벙커를 개량해서 사용 중이거든요. 더럽게 열악하긴 해도 죽을 정돈 아니에요.”
무덤덤한 말투와 달리 그녀의 얼굴에는 지긋지긋하다는 감정이 가득해 보였다. 그녀가 이곳을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도 조금은 납득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