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7
267화 - 행복의 잣대 (2)
“예전과 지금. 세상 여전히 불합리하고 불친절.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 다 너처럼 자력으로 살아남아 행동하는 것 불가능에 가까움. 사람 상상 이상으로 강하지만 나약.”
“그렇긴 하지. 그래서 남하 계획을 서둘렀던 걸지도 모르고.”
민성은 조용히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가능성 있음, 하지만 벌어지고 생각해도 충분. 일단 새로 들어온 사람들의 활용방안 먼저 고려.”
“눈앞의 일부터 처리하는 게 편하긴 하지. 올라가서 편하게 용무 봐.”
민성이 먼저 가보라는 듯 손짓하자, 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이 가지 않나?”
“난 집이 편해서.”
낡아빠진 침대와 시트, 그리고 단체생활을 해야 하는 공간. 뜨끈한 온천과 포근하고 아늑한 침실과 대궐 같은 집, 그리고 뜨끈한 온천과 음식을 비축해놓은 창고가 있는 공간. 둘 중 한 곳을 택하라면 누구든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창 하나 없는 방. 답답할 것.”
그러나 거절에도 불구하고 신은 재차 함께 2층으로 가자며 권유했다. 오직 임시공간에서만 지낸 터라 비밀스러운 집의 본모습을 몰랐기에 그런 것이리라.
“어차피 잠만 자고 나올 거야. 괜찮아.”
“알겠다. 가보겠다. 아, 조만간 사냥 나갈 계획. 괜찮다면 협조 부탁.”
“사냥? 나오는 것도 없는데?”
민성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크네의 수하를 상대했을 때처럼 간혹 진귀한 아이템을 떨어뜨리는 놈들도 있지만, 대개는 크기만 다른 노란 돌덩이를 뱉는 경우가 전부였다.
“괴수들 사체, 식사용도 대체가능 여부 실험할 생각. 아직 여유 있으나 최악도 생각하여 계획.”
난데없는 발언에 민성은 몸을 움찔거렸다. 생각만 해봤지 감히 실천해볼 생각은 못 했던 발상이었다. 그래도 나름 일리 있는 말이었다. 정말 최악까지 치달아 괴수의 살을 뜯어먹어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 그래. 그 정도는 어렵지 않으니까. 근데 이곳 사람들한테 먹일 생각은 아니지?”
“먼저 야생동물들을 포획, 실험할 계획. 이상 없을 경우 이곳 식사에 일부 첨가해볼 생각. 애초에 그러한 실험 위해 만든 곳.”
신이 계획을 설명할 때마다 민성은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앳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실험용도로 활용하겠다는 말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혀버렸다. 하지만 말릴 생각은 없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에게도 득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실험 하는 건 좋은데 되도록 사람들에겐 말하지 말고.”
해골바가지 물도 모르고 마시면 달달하다 하지 않던가. 모르는 게 차라리 약일 것이다.
“알겠다. 쉬어라.”
더 이상 용무가 없는지 신은 종이를 펄럭이며 자리를 떴다.
“앞으로 이곳 음식은 입에도 대지 말아야지.”
민성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신의 등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
삐걱-
신과 헤어지고 비밀스러운 집으로 들어온 민성은 잘 다듬어진 길을 걸었다.
“냥! 냥!”
길 주변으론 집을 확장하며 새로이 개방된 정원을 가꾸고 있는 작은 고양이들이 눈에 띄었다. 자기 몸만 한 정원 가위나 낫 따위를 들고 낑낑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민성은 피식 미소를 흘렸다. 집을 업그레이드하고 나선 항상 봐오던 광경이었지만 질리지 않았다.
“냥!”
작은 발자국 소리에 민성의 복귀를 눈치챈 고양이들은 작업을 멈추고 발을 흔들어 보였다.
“그래. 근데 너희들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제대로 좀 하면 안 돼? 여기 듬성듬성 잡초 나 있는 거 안 보여? 싹 밀어버려.”
다녀왔냐는 따듯한 안부인사에도 민성은 아랑곳 않고 정리 안 된 잡초들을 가리켜 보였다. 아무래도 등급이 하급이라 그런지 일하는 게 영 시원치 않았다.
“냥…….”
냉정한 질타에 대표 격으로 인사한 고양이는 세상 잃은 표정으로 바닥만 바라봤다. 그러나 안쓰러운 모습에도 민성은 차가운 시선을 유지했다.
‘매달 6,000코인씩 받아 가는데 확실하게 부려먹어야지.’
공짜라면 몰라도 월급 받아가는 만큼 적당히 봐줄 생각은 없었다. 과거, 간혹 밥을 주면 그릇만 비우고 눈길조차 주지 않던 길고양이 탓은 결코 아니었다.
“확실히 해. 알았어?”
“냥!”
민성은 몇 차례 더 지시하고서야 정원을 떴다. 정원을 지나 얼마간 걷자, 길 주변 나무에 가려있던 거대한 성이 시야에 잡혔다. 고풍스러우면서도 웅장한 외관 탓에 서양의 마법사들이 배움을 청하는 곳처럼 보이기도 했다. 누가 침입할 일도 없건만 정문과 땅을 잇는 교두보 주위로는 도랑이 파여 물이 찰랑이고 있었다.
‘하여튼 센스하곤…….”
민성은 교두보 언저리에 배치된 고뇌하는 고양이 석상을 보곤 고개를 저었다. 인테리어는 전적으로 자신이 맡겠다던 시바의 요청을 허락한 대가였다. 민성은 한숨 쉬며 성 인근의 커다란 호수와 밭에 들렀다. 과거에는 아무것도 살지 않는 호수와 쓸모없는 농경지였지만 루비의 힘은 위대했다.
“너희가 먹는 건 좋은데 나 먹을 건 남겨야 할 거 아냐. 하루 할당량 못 채우면 해고야! 알았어?”
“냥…….”
생선을 낚아 올리는 낚시꾼 고양이들과 밭에서 한창 곡괭이질 중인 농사꾼 고양이들에게도 한소리 하고서야 민성은 교두보를 밟을 수 있었다. 교두보를 지나 기묘한 문양들이 박힌 철문을 젖히자, 소파와 TV등 자질구레한 물품들이 놓인 거실이 보였다.
본디 웅장한 외관에 걸맞게 수십 개가 넘는 방들과 기다란 복도 등이 있었지만, 남정네 혼자 사는 집이 너무 커봐야 좋을 것 없다는 걸 깨닫곤 방 네 칸이 딸린 집으로 축소했다.
“오오오오오! 싱싱한 주인 돌아왔나!”
“예. 별일 없었죠?”
민성은 거실 중앙에 박혀있는 고양이 머리의 환대를 받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별일 없었다, 주인! 별일 좀 생겼으면 좋겠다! 냥냥냥!”
“아무 일 없는 게 좋은 거예요. 것보다 고급 고양이들은 아직이에요?”
시바는 고양이들의 등급이 올라갈수록 녀석들의 일 능률이 올라간다고 했다. 또한 시킬 수 있는 일도 더 다양해진다는 말도 곁들였었다. 그 말에 하급의 10배에 달하는 월급을 주고 중급 고양이들을 고용했으나, 하급과 큰 차이가 없어 전부 해고했다.
“아직 부족하다, 싱싱한 주인! 더 능률 좋은 일꾼들을 쓰고 싶으면 집을 더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냥냥냥냥!”
“여기서 더요?”
이미 루비를 퍼부어 20단계를 올렸건만 얼마나 더 올리라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힘들면 다시 중급 고양이들을 고용해도 된다, 싱싱한 주인!”
“건설 목록이나 보여줘요.”
민성은 시바의 제의를 단칼에 거절하곤 녀석이 띄운 창을 바라봤다. 창 안에는 방앗간부터 대장간, 헛간 등 현재 지을 수 있는 건물 목록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특수 건물로서 임시안전지대가 아닌 이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게스트 하우스 따위도 존재했다. 본디 눈길조차 주지 않을 법한 것들이었으나, 바깥 환경이 열악한 만큼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온천 이후로 마땅히 끌리는 게 없단 말이지.’
건설시간과 비용은 루비로 메워버리면 되나 활용여부가 문제였다. 주로 하급 고양이들이 이용할 텐데 일하는 모습을 봐선 영 미덥지 못했다. 그렇다고 스스로 하기엔 바깥일도 신경 쓸 것이 많았다.
“이슬을 머금은 황금 양배추 동상을 짓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황금 양배추요?”
시바의 조언에 민성은 건물 칸에서 특수 건물 칸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곤 몸체가 금빛으로 번뜩이는 양배추 동상의 정보를 확인했다.
[이슬을 머금은 황금 양배추 동상]
설명: 새벽녘의 이슬만을 먹고 자란다는 황금 양배추의 형상을 본 떠 만든 동상이다.
단계: 1/1
능력: 질 좋은 농작물을 수확할 확률이 2% 증가한다.
필요코인: 300,000
‘150루비라……, 짓는 건 별 문제가 아닌데 정말 효과가 있긴 한가?’
과거 시바의 조언을 듣고 낚시 성공률을 1% 상승시켜주는 대왕 고등어 동상을 지었다. 하지만 낚시꾼 고양이들의 손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 텅 비었거나 혹은 10cm도 안 되는 잡어만 잡아왔으니 더 고민이 됐다.
똑똑-
“얼마 일한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퇴근 시간이야?”
건물 칸을 보며 눈가를 긁적이던 찰나,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민성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곤 문을 열었다.
“냥!”
문을 젖히자 머리나 옆구리에 소쿠리를 끼고 있는 녀석부터 잡어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고양이 등, 기다란 고양이 대열이 눈에 들어왔다. 성내부터 교두보 끝까지 일렬로 늘어서있는데 그 모습이 꼭 숙제 검사를 맡으려는 학생들처럼 보였다. 하루 할당된 작업시간이라도 있는지 일정 시간이 되면 이처럼 수확한 결과물을 보고하러 온다. 그가 없을 때면 으레 지어놓은 창고에 놔두고 가는데 그걸 정리하는 것 또한 일이었다.
“가져와.”
“냥!”
민성이 손짓하자 선두에 있던 고양이는 감자 하나가 담긴 소쿠리를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호미질에 패어 상한 감자]
설명: 거친 호미질로 몸체에 상당한 생채기가 난 감자다. 상품으로 팔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당사자가 직접 먹거나 썩혀서 거름으로 재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
등급: ★
“…….”
감자의 정보를 확인한 민성은 어깨에 힘을 잔뜩 준 고양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녀석들은 그날 수확한 작물들 중 가장 상태가 좋은 것 하나를 가져온다. 그 뜻은 녀석의 손에 작살난 감자가 수십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차라리 가져오지나 말지.’
그럼 적어도 욕은 먹지 않을 텐데 참으로 단순한 녀석들이다.
“하아……. 이런 건 못 먹는 거라고 천 번은 말한 것 같은데. 설마 이걸 먹으라고 가져온 건 아니지?”
“냥?”
한숨 섞인 그의 말에 고양이는 지진 난 동공으로 민성을 올려다봤다. 나름 자신 있게 가져온 것이 분명했다.
“돌아가기 전에 거름 쌓아두는 곳에 던져두고 가.”
“냥…….”
냉정한 결과발표에 고양이는 감자를 돌려받곤 축 처진 등을 돌렸다. 처음에는 저 모습이 안쓰러웠으나 이제는 스스로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냥냥냥!”
“냥냥!”
아직 검사를 맡지 못한 고양이들은 축 처져 성 밖을 빠져나가는 고양이를 비웃었다. 다들 제 결과물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다음.”
“끙…….”
“냥냥…….”
하지만 검사관은 냉정했고 결국 태반에 가까운 고양이들이 거름 쌓아두는 곳으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깡통은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
“냥…….”
마지막 낚시꾼 고양이를 돌려보내고서야 민성은 바닥에 놓인 결실을 확인했다. 대략 감자 한 박스, 잡어 열댓 마리가 전부였다. 이건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파 두 단, 양파 한 개 등 새로이 재배를 시작한 작물들 상황은 더 처참했다.
“고양이한테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가.”
민성은 씁쓸히 웃으며 작물들을 들곤 안으로 들어갔다.
*
안전지대 내.
거대한 타워를 산수화처럼 뒤에 두고 나무로 된 강단에 서 있는 남자는 그를 주시하는 수천의 눈길을 내려다봤다.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다. 그의 말 한 마디, 몸짓 하나하나가 모두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 생각하니 몸이 저릿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