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
265화 - 네 것, 내 것의 차이 (5)
실제로 과거 군부는 수많은 장정들의 죽음을 가벼운 사건, 사고로 둔갑시켜 은폐하기 바빴으며, 현재에 이르러서도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튀어나온 배 두드리기 바쁜 친일파들과 달리, 정작 나라를 지켜낸 전쟁용사들은 극악한 처우 속에서 쓸쓸히 여생을 마무리하던 것이 불과 2년 전 일이었다.
“그놈의 애국심 핑계로 의무만 강요하지 말고 정당한 대우를 해줘 봐! 자발적으로 총, 칼 들고 일어나지!”
“국가를 위한 차출? 허울 좋은 개소리지.”
소령이 말을 잃자, 차출을 피해 온 난민들은 이때다 싶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기껏 목숨과 세월을 희생해 괴수들을 몰아내고 사회가 안정되면 무엇 하는가? 과거 전쟁용사들이 하찮은 대접을 받았던 것처럼 안정된 사회에 그들의 자리는 없을 것이었다.
“쯧쯧.”
양측의 언쟁을 가만히 지켜보던 민성은 낮게 혀를 찼다. 한쪽은 국가를 위해, 다른 한쪽은 일신의 안위를 위해. 어감이 주는 무게는 달라도 양측의 이념은 존중받아야 마땅했다. 개인적으론 국가에 대한 애착심이 별로 없었기에 난민들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싸우는 건 좋은데 남의 집에서 싸우지 말고 나가서 싸워.”
‘괜히 받아줬다가 소문나서 죄다 이쪽으로 몰려올 수도 있으니까.’
어디까지나 존중하겠다는 것뿐이지 싸질러놓은 똥까지 치워주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아무리 신이 전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곤 허나 엄연히 주인의 입장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쓸데없는 전례를 만들어 이곳을 난민 천국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괜찮지?”
민성은 건물 내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목소리로 신에게 물었다. 새로 유입된 난민들의 인적사항을 받아 적던 신은 종이와 민성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곤, 종이를 구겨 던져버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 수용할 수 있는 숫자 한계 존재. 명확히 선을 그을 필요.”
“자, 운영장님께서도 그렇다고 말씀하셨으니까 불청객들은 모두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신의 동의까지 얻은 민성은 난민들과 군인들 양측을 향해 냉랭한 시선을 보냈다.
“훌륭하신 판단입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민성의 냉정한 판단에 양측은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소령은 미소가 걸린 빵빵한 볼을 연신 흔들어 댔고, 난민들은 최후 저지선마저 잃은 패잔병의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난민들은 쉽사리 단념하지 않았다.
“부디! 부디 다시 생각해주십쇼!”
“저희는 고기방패로 살다가 인생을 접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난민들은 허겁지겁 민성의 앞으로 달려와 무릎 꿇고 애원했다. 일부는 대성통곡하며 바닥을 내려치기도 했다.
“각하께서는 계엄령을 선포하셨습니다. 지금은 명확한 전시상황입니다. 저들이 한국의 국민인 이상, 저들은 차출에 응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난민들의 애원에 경각심을 느낀 소령은 민성의 옆으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의무를 강요하지 말고 대우부터 제대로 할 생각 하라고!
귓속말을 엿들은 난민들은 발끈하여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라! 그럼 대우는 알아서 따라온다!”
그에 소령도 지지 않겠다는 듯 목에 핏대를 세웠다.
“지랄하지 마! 그런 적 없잖아!”
“기다리면 어련히 알아서 안 해주실까! 개인 하나하나 신경 쓸 정도로 국무가 단순한 작업인 줄 알아!”
쾅-
시장 통이라 여길 정도로 양측이 열을 올리자, 짜증이 치솟은 민성은 대검을 높이 들어 바닥에 내리꽂았다.
“….”
검날이 두부 파고들듯 바닥 깊숙이 뚫고 들어가자, 좌중들은 압도적인 힘에 질려 일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홀이 정적에 휘감기자 민성은 나지막이 한숨 쉬며 입을 열었다.
“양쪽의 의견은 전적으로 존중해. 각자의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난민들과 소령은 마른침을 삼키며 민성의 말을 기다렸다. 민성이 어떤 판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결정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선 모두 받아주고 싶지. 아직 방도 여유가 있는 것 같으니까.”
난민들이 희망이 담긴 눈으로 달싹이는 입을 응시했다.
“근데 그런 사정들까지 다 받아주기에 이곳은 너무 좁아. 거기다 오는 사람들을 모두 수용할 수도, 수용할 이유도 없고. 자비와 은총은 나한테 바라지 말고 신께 갈구해.”
이번엔 소령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방법이…. 방법이 없겠습니까?”
새로 유입된 난민들은 애써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방법? 없는 건 아니지. 너희가 정말 갈 곳 잃은 난민들이란 사실을 입증하면 돼. 그마저 싫으면 나도 행동으로 나설 수밖에 없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애초에 너희를 거부하는 이유가 뭔지 생각해봐.”
민성의 뜻 모를 말에 난민들은 쥐고 있던 희망의 끈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애초에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아이고! 이제 더 움직일 힘도 없다! 그냥 죽여라, 죽여! 이놈들아!”
노인들은 체념하여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차출 대상인 자식과 남편을 둔 여인들은 눈시울을 훔치거나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울기도 했다. 그러나 와중에 민성의 말에서 묘한 기류를 읽은 일부 남자들은 눈을 번뜩였다.
“치우라는 뜻은 저들을 죽여도 묵과하겠다는 뜻입니까?”
“해석하기 나름이겠지.”
대담한 말에 민성은 어깨를 으쓱였다.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무슨 짓을 벌여도 상관없었다.
“할 수 있을까?”
갖고 있는 무기라 해봐야 철물점에서 주운 망치, 톱 따위가 전부였다. 하지만 상대는 총으로 무장한 군인이다. 전력에서 압도적으로 밀렸다.
“할 수 있을까가 아니고 무조건 해야 돼. 여기서 물러나면 사선으로 끌려갈 게 뻔한데? 게다가 저 새끼들 지금 죄다 부상 입었잖아. 마냥 불가능한 것도 아니야.”
저들끼리 눈짓을 교환하던 젊은 층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하나둘 조잡한 무기를 들기 시작했다.
“음? 젠장! 멍청한 새끼들이….”
그 모습에 승기를 잡았다 생각하고 여유 부리던 소령은 부푼 볼만큼이나 눈을 부릅떴다. 그리곤 부상당한 병사들에게 냅다 소리쳤다.
“발포 준비해!”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엉거주춤 사격자세를 취했다. 다리를 다친 병사는 그나마 포복하여 조준했으나 팔을 다친 병력들은 있으나 마나였다.
“전부 죽여 버려!”
난민들은 볼품없는 무기를 휘두르며 채 정비가 끝나지 않은 군인들을 향해 달려들었고,
“조정 간 단발! 어차피 전시상황이다! 여차하면 발포해버려!”
“예!”
군 병력들은 난민들의 가슴에 차가운 총구를 겨눴다. 그마저 여의치 않은 자는 총에 착검했던 검을 빼, 손에 쥐었다. 이념의 격돌이 무력다툼으로 변질되려는 일촉즉발의 상황.
“멈춰!”
탕-
갑자기 문 쪽에서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명한 총소리에 소령은 화급히 고개를 돌리곤 반색했다. 디지털 무늬 군복을 입은 장정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로 지원을 요청한 적 없어 작은 의문이 들었으나, 어쨌든 그에게는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젠장!”
마지막 불꽃이 사그라졌다. 전의를 잃은 젊은 난민들은 무기를 놓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부상자들을 상대로도 우위를 장담할 수 없건만 하물며 추가병력을 상대로 이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저 백기 들고 목숨을 보전하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추가 병력인가? 끝났네.’
민성은 돌입하는 군인들을 보곤 또 한 푸닥거리 해야 한단 생각에 한숨 쉬며 대검을 빼들었다. 어차피 설명해봐야 들어먹지 않을 테니 먼저 매를 드는 편이 빠를 것이다.
“무기를 바닥에 둬!”
“움직이는 자는 즉시 사살하겠다!”
새로 돌입한 병력들의 명령하에 내부소동은 빠르게 정리돼갔다. 무기를 들었던 젊은 난민들은 포박되어 바닥을 굴렀고, 부상 병력들은 다른 병사들과 의무병의 도움을 받아 들것에 실려 나갔다.
어느 정도 사태가 안정되어 가자, 새로 들이닥친 병사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가 민성들을 향해 걸어왔다.
“거참. 안 그래도 애먹고 있었는데 정말 잘 오셨습….”
새로이 병력을 끌고 온 지휘관은 그를 반갑게 맞이하는 소령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리곤 바짝 군기든 자세로 민성 앞에 섰다.
“충성!”
“어, 그래.”
칼 같은 경례에 민성은 귀찮다는 티를 내며 대강 경례해줬다.
“음?”
난데없는 상황에 소령은 얼빠진 얼굴로 둘을 바라봤다. 새로 들어온 지휘관의 어깨에는 무궁화 두 개가 박힌 견장이 걸려 있었다. 그런 이가 먼저 경례했다는 건 민성이 그보다 높은 계급자라는 뜻이기도 했다.
“구, 군인이셨습니까? 허허. 특수한 임무를 수행중이셨나 봅니다.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소령은 어설픈 웃음으로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해보고자 했지만, 민성들의 시선을 돌리는 데 실패했다.
“빨리도 왔네.”
민성은 새로이 등장한 지휘관을 보며 한껏 빈정거렸다. 명호. 본의는 아니었지만 아두르의 손에서 탈출하면서 구해냈던 대위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작 대위였으나, 한 지역을 안정화 시킨 공으로 두 계급 특진한 덕에 지금은 중령의 직위를 달고 있다. 그 또한 본디 민성의 공이었지만 민성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보고를 전파 받고 최대한 빨리 온다는 것이 그만….”
민성의 빈정거림에 중령은 안색이 어두워져 군화 발만 작게 달싹였다. 그러다 갑자기 묘수가 떠올랐는지 커다란 군수용품 상자를 든 병력들에게 손짓했다.
“그건 또 뭔데?”
호기심이 동한 민성이 흘낏 상자에 눈길 주자, 명호는 신이 나 잽싸게 상자를 열어 보였다.
“아, 이건 예전에 부탁하셨던 향신료들입니다. 이름은 몰라도 향이 좋은 것들로만 골라 가져왔습니다!”
상자 안에는 수통들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너저분해 보이는 병력들의 것과 달리 수통은 새것처럼 깔끔했다.
“오오오! 그래?”
민성은 보물 상자를 발견한 탐험가처럼 내용물들을 바라보다 수통 하나를 집고 뚜껑을 열었다. 강렬하면서도 산뜻한 허브 냄새가 코 안을 맴돌다 정수리를 뚫고 올라왔다.
‘아…. 그래. 이거지.’
민성은 향내에 취해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돼지 비린내를 풍기는 수육, 밍밍하기 그지없는 볶음밥 따위 등. 자극적인 식단이 익숙해진 현대 사회에서 양념 없는 식사를 한다는 건 꽤나 고역이었다. 더욱이 맛난 음식을 갈구하는 민성에게 맛없는 식사는, 괴수 무리에 포위돼 사투를 벌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괜찮은데?”
민성은 뚜껑을 닫고 박스를 아이템 창에 넣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최근 마트와 식당 등에서 쓸어왔던 향신료가 슬슬 바닥을 보인 탓에 흘러가는 투로 부탁했건만, 이리 성실하게 수행해줄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렇습니까? 만족하시니 저도 기쁩니다. 아, 그리고 그 외에도 소금, 설탕 등 최대한 챙겨 넣었습니다.”
민성의 안색이 풀어지자, 명호도 따라 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그는 더한 부탁도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목숨을 구했을 뿐더러, 두 계급 특진 배경에도 민성의 도움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