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
263화 - 네 것, 내 것의 차이 (3)
“쯧….”
의미 없는 싸움이다. 기존에 있던 사람은 어떻게든 자리를 유지하고자 애써보지만 피로 쟁취한 권리를 이길 턱이 없었다.
‘어차피 손님 받으려면 시간 좀 걸릴 텐데.’
그 또한 배정 받은 땅이 있었다. 타워 인근에 위치해 손님 받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리였다. 어느 정도 국가가 안정세에 접어들거든 어느새 집 방 한 칸에 가득 쌓인 잡다한 물건들을 팔아치울 계획이었다. 민성은 의미 없는 실랑이를 보며 조소하다 조용히 자리를 떴다.
*
주인 잃은 차들은 한쪽으로 치우거나 장갑차 고리에 연결된 사슬에 걸려 어디론가 빠져나갔다. 안전모 쓴 인부끼리 바삐 논의하더니 반파된 건물을 냅다 허물어버린다. 그 주변을 눈 부릅뜬 병력들이 경계하는 모습도 이제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진입해!”
혹시 남아있을 괴수 처리를 위해 병력들은 사용가능하다 판단된 건물 내로 다급히 진입한다. 그 모습은 사뭇 엄중하면서도 기민했다. 복원이라는 이름 아래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 되어 움직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저들의 앞날을 축복하는 듯했다. 문에서 나온 민성은 잠시간 그 광경을 구경하다 한 건물 앞으로 이동했다.
균열이 생겨 무너졌거나 썩어가는 시체가 조형물처럼 박혀있는 건물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깨끗한 건물이었다. 입구에 접어들자 무너진 건물 자재와 식탁 따위로 세운 바리케이드가 보였다. 그 주변으론 함정으로 설치해놓은 밧줄이 팽팽하게 감겨있었다. 밧줄을 건드리면 화살과 창날이 나가게끔 조작돼 있다. 효과가 있을까 싶었지만, 피난민들이 안정감을 느낀다는 신의 말에 따라 놔뒀다.
“오셨습니까!”
“오셨어요?”
밧줄과 바리케이드를 피해 안으로 들어서자, 조잡한 무기를 들고 입구를 지키던 두 남녀가 그를 반가이 맞이했다.
“별일 없었어?”
민성은 그들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자리를 비운 사이의 정황을 물었다.
“네! 군 병력의 움직임 외에는 이렇다 할 보고거리는 없습니다! 괴수 놈들도 이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는 모양입니다!”
20살 남짓 돼 보이는 갓 소년티를 벗은 청년이 바짝 긴장하여 목에 핏대를 세웠다. 남루한 옷과 달리 초롱초롱한 눈은 그를 뚫어지라 응시하고 있었다.
“계속 말하지만 잠시 빌리고 있는 것뿐이야. 언제고 주인이 나타나면 돌려줘야지.”
“옙! 명심하겠습니다!”
민성은 빙긋 웃으며 며칠이고 씻지 못해 까치집이 된 청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바보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보고거리가 왜 없어!”
낡은 창대를 들고 서있던 소녀는 동료를 질타하며 민성을 쳐다봤다.
“단순한 기우일지 모르지만 요 며칠간 일부 군인들이 이곳 보는 눈치가 좀 심상치 않았어요. 아무래도 차출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흠. 그래?”
‘전달이 제대로 안 된 건가?’
공을 세우고 싶다는 욕망에 눈이 먼 탓인지, 아니면 명령체계에 구멍이 있는지 몰라도 그의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민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찬가지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너무 걱정은 말고.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보고해.”
미연의 사태를 예방코자 여인들에게도 무기를 들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의 불씨는 여자라고 피해가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최소한 제 한 몸은 건사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네. 그렇게 할게요.”
민성은 한 차례 더 미소 지어 보이곤 어린 보초들을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1층의 커다란 홀에 들어서자 형광등의 환한 불빛이 먼저 그를 반겼다. 발전소가 지척에 있는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불빛 아래론 군부에서 얻어온 작은 텐트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고, 꽤나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내부를 배회했다.
‘조금 더 늘어난 것 같기도 하고….’
안에 있기보다는 바깥 활동에 더 주력하는 탓에 아직도 사람들의 얼굴이 익숙지 않았다. 민성은 어색하게 웃으며 홀 중심으로 걸어갔다.
“언제 되는 겁니까?”
“20분 정도는 더 쪄야 돼요.”
홀을 식당 겸으로 사용 중인지라 그런지, 가구 따위를 부수어 피운 불 위로 커다란 철 냄비들이 여럿 올라가 있었다. 냄비 사이론 고소하면서도 부드러운 냄새가 새어나왔다. 홀을 지키는 사람들도, 요리를 만드는 당사자들도 하나같이 침을 꼴깍이며 냄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세상에…. 민성 씨! 언제 오셨어요? 마침 식사 준비 중이었는데.”
민성이 냄비 옆으로 다가가 조용히 인기척 내자, 그제야 민성이 온 것을 인지한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면서도 반가이 맞이했다.
“조금 전에요. 그나저나 고기 삶으시는 것 같은데. 무슨 날입니까?”
민성은 재차 질문하며 코를 킁킁거렸다. 세상은 예전보다 조금 더 밝아졌지만 아직 부족한 점투성이였다. 대표적으로 식량이 그러했다. 조금 나아졌다곤 허나 여전히 입은 많았고 식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랬기에 어지간히 기쁜 날이 아니곤 여전히 즉석식품으로 해결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래서 남하를 서두르는 거겠지.’
하늘과 바다도 괴수들에게 봉쇄당했으니 타국의 원조는 기대할 수 없다. 자각사의 지원이 있다곤 하지만 겨우 군 병력과 일부 난민들의 굶주림을 해결할 정도다. 식량 생산지의 회복과 그것을 유통하기 위한 도로망을 회복하지 않고선 올해를 넘기지 못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라디오를 들었어요. 오늘부로 서울 수복을 끝냈다고….”
“죄송해요. 미리 언급을 드렸어야 했는데.”
민성의 질문을 추궁이라 생각한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답하며 눈치를 살폈다. 그들의 반응에 민성은 씁쓸한 감정을 숨기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 맞아요. 안 그래도 그 소식을 전하러 잠시 들른 겁니다. 다 먹고살자고 움직이는 건데 오늘 같은 날은 맛난 것도 먹고 해야죠. 잘하셨습니다.”
적당히 그들을 위로해준 민성은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한 술이라도 뜨고 가시지….”
안타까워하는 아낙네의 음성에도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신은 2층에 있습니까?”
남자 중 한 명이 그렇다고 답하자, 민성은 식사하라는 인사와 함께 홀 끝의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이동했다. 1층과 5층은 공동구역으로, 2층부터 4층까진 남성들, 6층부터 8층까진 여성들, 그 외에는 가족을 꾸린 자들과 노약자들의 공간으로 층마다 구역을 나눠 사용 중이었다. 2층에 올라온 민성은 익숙하게 길쭉한 통로를 누비다 한 방 앞에서 멈추고 노크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민성은 천천히 문을 젖혔다.
“….”
문틈으로 작은 침대에 걸터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종이를 노려보는 신의 얼굴이 보였다.
“무슨 이상이라도 있어?”
“왔나.”
민성이 인기척 내자, 신은 서류를 침대에 내동댕이치곤 그를 응시했다.
“물자와 약품 부족. 그러나 아직 감당할 수준. 그 외 이상 없다.”
“어쩔 수 없지. 입이 많으니까. 수색하면서 뭣 좀 건진 건 없고?”
신은 예의 감정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난민 몇과 약간의 식량 발견.”
민성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구석에 놓인 커피포트기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곤 금 간 벽에 박힌 콘센트에 선을 연결하고 물을 끓였다. 포트 입구에서 김이 오르자 민성은 미리 준비해뒀던 종이컵에 물을 부었다. 물은 곧 황갈색을 띠어 달달한 냄새를 풍겼다. 이제는 기호식품에서 사치품이 되어버린 커피지만 문명을 일부 되찾게 한 이에게 이 정도 사치는 정당한 권리였다.
“군과의 쓸데없는 마찰은 피하는 게 운영하기도 좋을 테니까. 힘들지는 않아?”
민성은 커피를 홀짝이며 신이 내던진 종이를 흘낏 살폈다. 안에는 운용할 식량의 양과 이곳 사람들의 과거 직업들이 적혀 있었다. 괴수와의 싸움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일 또한 만만찮은 작업이다. 붕어빵 틀에서 찍어낸 것처럼 일관성 있으면 좋으련만 인생이란 게 반죽 만들 듯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내가 제안. 괜찮다.”
키우는 가축 정도라 생각해라. 넌 오로지 군림하고 사람들이 다른 생각하지 못하도록 약간의 힘만 보여줘라. 네가 신경 쓰지 않도록 관리는 전적으로 내가 하겠다. 6개월간 버섯을 찾아다니거나 숨어있는 잡 괴수들을 죽이러 다니다 생존한 난민들을 만날 때면, 신이 입버릇처럼 뱉던 말이었다. 비밀스러운 집의 임시공간에 살던 사람들에게 한계가 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민성 또한 그에 동의하여 지금의 공간이 생길 수 있었다.
‘오래 버티긴 했지.’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하지만 몇 달이고, 몇 달이고 임시공간에 박혀 있었으니 오래 버텼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고 저들이 제공할 부산물 큰 힘.”
‘아직까지 실력 좋은 요리사가 없다는 게 아쉽지만.’
확고한 신의 모습에 민성은 졌다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래도 무리는 하지 마. 난 정말 가축처럼 생각하고 있으니까.”
물론 정말 도축할 돼지처럼 여긴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그만큼 정줄 생각 없다는 걸 넌지시 표현한 것이었다.
“당연. 이곳의 주인은 너. 너라는 축 이곳 지탱. 네가 없으면 이곳 없다.”
양분을 빨아들일 뿌리가 없는 나무는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흠. 그건 그렇고….”
과다하다 싶을 정도의 칭찬에 민성은 괜스레 낯 뜨거워져 화제를 돌렸다. 주된 내용은 안전지대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
민성의 말을 귀 기울여 듣던 신은 문장이 끝날 때마다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태세 전환한 이종범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유독 눈을 빛냈다.
“그들도 급하단 소리. 받아들여도 괜찮을 것으로 예상. 놈들 불합리하나 국가 안정은 곧 우리의 편함과 귀결.”
“함정일 가능성은?”
이미 이 부장과의 대화로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걸 파악했으나, 신의 의견 또한 듣고 싶었다.
“의외로 낮을 것. 점차 늘어날 것이나 아직 전력에 보탬 되는 능력자 부족. 전략적 요충지 될 수 있는 네게 구태여 함정 팔 이유 전무. 머리에 우동사리 들어있지 않고선 생각 어려운 일.”
“그 정도로 멍청한 놈들은 아니니까.”
신의 단호한 음성에 민성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가 추구하는 이권과 과거의 원한 탓에 대립하는 것이지, 생각이 없는 놈들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적당히 도우며 이득 챙기는 것 현명. 정부 시선 네게 쏠린 사이 난 최대한 조직 키울 계획.”
“더 키워서 뭐 하려고? 능력자 협회 같은 거라도 세우게?”
민성이 농담조로 던지자 신은 재차 눈을 빛냈다.
“생각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
“뭐, 잘해봐. 도울 수 있는 건 도울 테니까.”
민성이 빙긋 웃으며 신의 어깨를 다독이려는 찰나,
“꺄아아악!”
밑층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려댔다. 그와 동시에 꾀죄죄한 남자 하나가 문을 거칠게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