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
259화 - 곱게 좀 주쇼 (3)
6개월간의 강행군. 지칠 때도 있었다.
‘아직 놈의 얼음에 낀 먼지도 이기기 어려워 보인다, 인간! 정진해라!’
그럴 때마다 티노는 꼬리를 채찍 삼아 휘두르며 분전을 요구했다. 지금 그 훌륭한 조교님께서는 쓰레기장의 분위기를 알아보러 잠시 곁을 떠났지만 말이다.
“….”
민성은 저물어가는 햇살이 눈부셔 눈살을 찌푸렸다, 아두르 놈에게서 도주한 후로 어째선지 하늘에 상시 들어차있던 구름들이 가셨다. 툭하면 내리던 눈도 8월이라는 계절에 걸맞게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날엔 한강에 돗자리 펴고 치킨에 맥주 한잔하면 딱일 텐데.’
날이 좋다 못해 더우니 별별 잡생각이 머리를 기웃거렸다. 특히 음식이 귀해진 세상이니 맛있는 걸 먹고 싶다는 욕망이 주를 이뤘다.
“충성!”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며 안전지대를 걷던 민성을 알아본 장교가 다급히 다가와 경례했다.
“어, 그래.”
민성은 대충 고갯짓해주며 인사를 받았다. 오늘 안전지대에 들어와 받은 경례만 벌써 열 손가락을 넘겼다. 아직 입대도 안 한 녀석에게 경례라니. 묘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온 김에 그것도 받아야겠네.’
“수고해.”
군복을 보다 문뜩 떠오른 생각에 민성은 미소 지으며 장교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아, 예…. 예! 충성!”
장교는 기묘한 웃음을 보이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민성의 등을 멍하니 바라봤다.
*
안전지대 내, 막사들이 옹기종기 밀집해 있는 막사타운. 개중 유독 새것처럼 반들하고 가장 커다란 막사 안에선 연신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수고들 했어.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오늘만큼은 취해보자고.”
“예!”
박정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막사 내 좌중들은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높이 쳐들었다. 와인에 절여 잘 구워낸 닭과 육즙을 가둬낸 스테이크 등, 간이 테이블 위에 그득 들어찬 음식들은 달콤하고 향긋한 냄새를 풍겨왔다. 작은 주먹밥 두, 세 덩이로 하루를 연명하는 군인들과 난민들의 식사에 비하면 가히 은나라 주왕이 벌인 주지육림과도 비교해봄 직했다.
“각하의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참. 설마 이런 곳에서 이런 음식을 먹게 될 줄은….”
좌중들은 취사병들이 연이어 들고 오는 음식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머리가 잘 쉬어줘야 몸도 더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는 법이야. 그렇지 않나?”
“허허. 각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암요. 머리야말로 신체의 중추를 담당하는 부위인데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이미 평소보다 풀어져 얼굴이 살짝 발개진 박정후의 말에 좌중들은 폭소하며 맞장구쳤다.
“어디 그뿐입니까? 저는 오늘 각하의 연설을 듣고 말랐던 눈물샘이 터져 곤혹을 치렀습니다 그려.”
“서울이 되살아나서 그런가, 김 장관 입심도 살아났구먼그래.”
평소 근엄하기 그지없는 박정후의 농에 좌중들은 연이어 웃음보를 쏟아냈다.
“어이. 이 부장은 안 먹나?”
“그래!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 구석에서 뭐 하고 있는 건가?”
막사 구석에서 조용히 술잔만 기울이던 이종범은 좌중들의 권유에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는 좀 전에 수하들과 식사를 하고 와 괜찮습니다. 저는 괜찮으니 드시지요.”
“에이, 이 사람도! 무말랭이나 넣은 주먹밥 따위로 배가 차겠나? 자자, 그러지 말고 있을 때 먹게. 있을 때.”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이종범은 배를 쓰다듬어 보이며 재차 권유를 거절했다. 권유하던 좌중이 그릇을 들고 식탁으로 돌아가자, 이 부장은 한숨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샴페인 터뜨릴 시점이 아니건만….”
사실 그는 이 자리가 썩 반갑지 않았다. 이제 겨우 작은 땅덩이 하나 되찾았을 뿐, 아직 그들이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했다. 더욱이 각하께서 생각하시는 북진까지 염두에 두면 길은 그 이상으로 험해질 게 뻔했다. 이 부장은 답답함에 슬쩍 막사를 빠져나왔다. 그리곤 산 중턱에 걸린 해를 응시하며 담배를 꼬나물었다.
“후….”
한 모금 깊게 빨고 내뱉자, 그제야 답답함이 좀 가시는 듯했다. 물론 심장을 탈환하여 기쁜 마음에 연회를 벌이는 저들의 심정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적어도 나라가 안정되기까진 민중들과 마찬가지의 생활을 하겠다고 스스로 세운 잣대가 저 자리를 용납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민심을 핑계로 놈의 공을 가로챈 일이 거북하여 그런 걸지도 몰랐다.
“후….”
이 부장은 다시 한 모금 깊숙이 들이키며 그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민성이 숨긴 보물창고의 행방을 알아내고자 보낸 수하들의 연락. 그들이 둥지에 들어섰다는 희한한 보고를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겼을 적엔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것이 마지막 연락이 될 줄도 모르고 말이다. 나중에 민성이 귀찮다는 티를 내며 토벌 완료했음을 알려왔고 서둘러 병력을 파견했었다. 하지만 이미 괴수에게 당했는지 그들의 것으로 보이는 뼛조각 몇 개만 겨우 회수할 수 있었다.
‘그냥 자연재해라 생각하고 수용하고 타협하는 쪽으로 가는 게 나을까?’
국방강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행위지만 어째 놈과 연관되면 좋은 꼴 보는 이가 없다. 약간의 단맛이라도 봤다면 끝까지 감수했을지도 몰랐으나, 단맛은커녕 오만 가지 쓴맛만 맛보니 의욕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괴수들까지 감안하면 놈에게 투입할 병력도 아쉬웠다. 이 부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꽁초만 남은 담배를 자근자근 밟았다. 그리곤 저녁 준비로 한창인 이들을 응시했다.
“빨리 준비해!”
“밥은 10분 정도 더 걸려요!”
자각사에서 공수해온 쌀을 씻고 밥을 짓는 취사병들과 그들을 돕는 여자들. 늘어난 난민 덕에 땅을 고르고 무너진 건물 자재로 집을 짓는 남자들. 때 묻은 식판과 반합을 들고 서로 눈치만 살피는 어린아이들. 삶의 질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지만 어디선가 사람 사는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무너진 세상이 아니었다면 결코 볼 수 없었을 광경이었기에, 이 부장은 가슴 흔드는 묘한 감정을 느끼고 쓴웃음을 지었다. 와중에 먹음직스러운 고기에도 반응하지 않았던 배가 밥 냄새에 허기짐을 알려왔다.
“거참….”
이종범은 묘한 감정을 안고 막사 안으로 돌아왔다. 연회는 슬슬 막바지에 접어들었는지 좌중들은 술잔 대신 커피 잔을 하나씩 쥐고 있었다. 하나같이 진중한 것이 아까까지 보이던 연회의 흥겨운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병사들이 치웠는지 테이블 위의 음식들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 같은 날은 일찍 보내주고 싶지만 그래도 할 일은 확실히 끝내고 들어가야 마음이 편하지 않겠어?”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오늘은 인류, 특히 우리 한민족이 괴수들을 몰아내고 터전의 일부를 찾은 역사적인 날.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고삐를 바짝 당겨야 합니다!”
홀로 술 몇 병 비운 이답지 않게 낮고 뚜렷한 박정후의 목소리에 좌중들은 동의했다. 하나 같이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누구 하나 토 달지 않았다.
“이 부장도 앉지.”
“예.”
각하의 손 까딱임에 이종범은 고개 숙여 보이곤 박정후 바로 좌편에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각하의 우편과 좌편. 박정후와 가장 밀접한 자리로서 그에게 압도적인 신뢰를 받고 있음을 암묵적으로 보여주는 자리다. 이번 서울 토벌 총 지휘를 별 잡음 없이 매끄럽게 진행한 대가로 앉을 수 있었다.
“매일 있는 자리도 아닌데 말이야. 즐길 때는 즐겨야 진정한 일류 아니겠나?”
이 부장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담배 냄새를 맡은 박정후는 한 번 보기 힘든 값비싼 미소를 보였다.
“명심하겠습니다.”
“큼….”
편애라 여길 정도로 살가운 모습에 일부 좌중들은 부러움, 시샘 따위의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작금의 세상은 더 이상 펜대를 쥔 자의 것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부디 자네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실질적으로 놈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자네뿐 아니겠나? 혜정 대사도 자네의 그런 점을 높이 사는 것 같았으니 말이야.”
“더 분발하겠습니다.”
이례적이다 싶을 정도로 과대한 칭찬. 이 부장은 담배가 당기는 것을 억눌러야만 했다.
‘통제라. 정말 통제하고 있다고 봐야 할까?’
아니다. 놈은 교활한 맹수다. 다만 큼지막한 고깃덩이로 잠시 입을 틀어막고 있을 뿐이다. 입 안의 고기를 삼키고 나면 언제든 다시 발톱을 세울 맹수. 그래서 어떻게든 발톱을 뽑고 갈기를 뜯어내 무기와 방어구를 만들고 싶었지만….
“좋아. 슬슬 본제로 들어가지.”
박정후는 눈을 돌려 안경 쓴 중년 남자를 응시했다.
“도시 복원 진행 상황은?”
“예. 다행히 생존한 기술자들을 여럿 확보한 덕에 진행 속도는 예상보다 10% 정도 빠르며 약 3% 정도 진행되었습니다.”
술기운 덕인지 남자는 평소보다 자신 있게 답했다.
“그렇게 말하면 알아듣겠어? 구체적으로 얘기해.”
“…예, 예!”
그러나 돌아온 꾸짖음에 벌개졌던 얼굴이 하얗게 변해갔다.
“혀… 현재 저희 국가복원부는 병력들을 이용하여 사용 불가한 건물들은 신속히 철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술자들을 적극 활용해 무너진 도시 배관, 하수 처리 시설 등 라이프 라인 복구에 열과 성을 다하는 중입니다! 이변이 없는 한, 올해 내로 한강 이남에 한하여 가스, 물, 전기 등 필수 에너지를 보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오오오!”
“아내가 들으면 좋아하겠어.”
국가복원부장의 보고에 좌중들의 붉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또한 각하께서 말씀하셨던 자연친화적 도시 조성을 위해 일부 건물들은 주요 공사가 끝나는 대로 철거할 계획입니다. 이상입니다!”
“훌륭하군.”
박정후는 그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산업화로 급격히 건물이 들어서 어수선한 서울의 모습이 얼마나 꼴 보기 싫었던가. 더군다나 앞으로 남북이 합쳐진 한반도의 중심부가 될 곳이다. 이번 기회에 싹 갈아엎고 재건하면 국가의 위상과 그의 명성은 더욱 오를 것이었다. 차후 신문 1면지 기사도 미리 정해놨다.
폐허에서 꽃 피운 무궁화. 상상만으로 뿌듯함이 밀려왔다.
“한강 이북지역까지 넓히면?”
“적어도 2년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복원부장은 질문의 요지를 이해하곤 재빨리 답했다.
“2년이라….”
간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던 박정후는 우측 말미에 앉아있는 연구원장을 바라봤다.
“그 돌을 사용하면 어떨 것 같나? 더 단축할 수 있지 않겠어?”
“분명 에너지 스톤은 절망과 함께 떨어진 희망의 산물입니다. 하지만 어떤 위험성을 안고 있을지 모릅니다. 더 명료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사용해선 안 됩니다.”
연구원장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에너지 스톤. 군 병력이 들고 온 괴수의 사체에서 발견한 노란 돌로서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괴수의 담석 정도로 생각했던 연구진들은 연구와 실험을 거듭할수록 경악을 금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