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
257화 - 곱게 좀 주쇼
‘뭐, 보상도 시원찮아서 깠지만.’
보상 없는 일 혹은 그의 발등에 불 떨어질 일이 아닌 이상 나서지 않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보상도 안 받았네.’
아크네를 처리했으니 약속받은 보상도 챙겨야 했다. 흔히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고는 하지만 사전에 계약했었기에 걱정되지 않았다.
[그거 참 듣던 중 반가운 소식입니다. 그럼 이제 한결 여유가 생기셨겠습니다.]
민성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자연스럽게 뱉으며 혜정의 근황을 넌지시 물었다.
[여유는 무슨. 생존자 탐색부터, 제정신 차리고 도시 구석구석으로 숨어든 잔당 처리까지 해야 할 일이 산처럼 쌓여있네. 황혼기에 접어든 노승을 부려먹어도 너무 부려먹는 것 아닌가?]
‘땅 조각 받으려고 먼저 무리수 던진 땡중이 그딴 소릴 해?’
[그것 참. 정부 놈들, 정도라는 게 없는 모양입니다.]
혜정의 깊은 탄식이 머릿속을 울렸지만, 민성은 물속에 담가놨던 감자 껍질을 벗겨내며 휘파람을 불었다.
“크…. 고놈 튼실하게도 생겼네.”
뜨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노랗고 실한 속살이 드러나자, 민성은 탄성 지르며 한 입 콱 깨물었다.
[뭐, 어쩌겠나. 내가 선택한 길이니 감내해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구먼. 그럼 묻지를 말든가.’
민성은 혀를 끌끌 차며 감자를 한 입 더 크게 물었다.
[그나저나 어쩐 일로 연락한 건가?]
[다름이 아니고 제가 몇 개월 전에 우연히 얻은 정보가 있는데, 고명하신 혜정 스님이시라면 뭔가 알고 계시지 않을까 하여 연락드렸습니다.]
민성은 입 안에 남아있던 감자의 잔재를 목구멍으로 넘기곤 차분히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게 뭔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꼭 알려주도록 하겠네.]
[괜찮으시겠습니까? 좀 민감한 사항일 수도 있어서 말입니다.]
민성은 두 번째 감자를 집으며 뜸 들였다.
[소미의 은인이자 자각사의 은인이 어렵게 내민 부탁인데 당연히 괜찮지 않겠나? 편히 말해보게.]
혜정의 다정한 목소리에 민성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혹시 사계의 열쇠에 관하여 알고 계신 것 있습니까?]
민성은 혈교 놈들에게 얻어냈던 정보를 조각내 슬며시 던졌다. 이미 우철의 입으로 위치와 활용법을 듣긴 했지만 좀 더 상세한 정보를 원했다. 본디 검마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자리에 없을뿐더러 역으로 추궁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혜정이었다.
‘지탱해온 역사도 길고 무엇보다 손녀 구해준 것도 있으니 필요 이상으로 추궁하진 않겠지.’
설령 강하게 추궁한다 한들 모른다며 발을 빼면 그만이었다.
[….]
잠시간 무거운 침묵이 통신기 속을 배회했다.
‘이 땡중. 뭔가 알고 있구먼.’
모른다면 모른다고 하면 될 것을 일부러 침묵으로 대처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성은 재차 질문하지 않았다. 그저 세 번째 감자의 껍질을 벗겨내며 느긋하게 답을 기다렸다. 급한 것은 그가 아니었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나?]
[토벌하는 도중 놈들과 약간의 마찰이 있었고, 와중에 운 좋게 들었습니다.]
예상했던 반응이 돌아오자 민성은 숨죽여 웃으며 느긋하게 답했다.
[그런가. 이거 참… 예상치도 못한 물건을 듣게 될 줄이야.]
[예, 놈들이 꽤나 간절하게 찾는 게 수상하다 싶어 연락 드렸습니다.]
민성은 다시 감자를 크게 물며 천연덕스럽게 거짓을 늘어놨다.
[혹시나 해서 묻는 것이지만… 설마 자네가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여간 늙은 감자라 그런지 감은 좋네.’
[아쉽게도 제가 갖고 있는 건 정보의 편린뿐입니다.]
[그런가….]
‘있다고 하면 뺏으려고?’
어딘가 아쉬워하는 음성에 민성은 조소하며 혜정의 답을 기다렸다.
[자네. 시간 있나?]
[예?]
[이 건은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일세.]
*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한 안전지대 안. 추레한 몰골에 노숙자 같은 사람들 수백이 옹기종기 모여 서로의 온기로 추위를 달래고 있다.
“자네 그거 들었어?”
그중 한 중년 남자가 입을 열자,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남자에게로 쏠렸다. 유일하게 돌아가는 현실의 정보를 물어오는 남자이니 그럴 만도 했다.
“이번엔 또 뭐야? 괴수 놈들 또 경계선에서 격퇴했다는 소식이면 말하지도 마.”
일부는 이제 지겹다는 듯 손사래 치기도 했다.
“아냐. 이번에는 엄청난 놈이라고! 내가 이거 들으려고 짱 박아뒀던 초코바 몇 개를 쥐여준 줄 알아?”
“정말이야?”
중년 남자의 자신 있는 목소리에 손사래 치던 사람들도 솔깃해져 눈길을 돌렸다. 으레 입이 많으면 물건이 귀해지는 법이다. 하물며 안전지대에서 여간해선 얻기 힘든 초코바를 몇 개나 쥐여줬다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거 믿을 만한 정보야?”
“속고만 살았나! 확실하다니까 그러네!”
중년 남자의 확신에 찬 모습에 긴가민가하던 사람들은 하나씩 배급받은 부식을 꺼내 남자의 손에 쥐여줬다.
“크흠! 잘들 듣게! 이번에 혜정 스님께서 이끌던 부대가 드디어 토벌을 끝내고 복귀하신다더구만.”
“저, 정말인가? 그럼 드디어….”
“그래! 드디어 서울 탈환이 끝났다는 거지!”
와아아아-
생존자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거나 환호성을 질러댔다. 6개월 전, 이능력자 대책부와 군부가 합세하여 강서구를 토벌했다는 소식 이후로 최고의 소식이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안전한 거야? 응?
“그렇겠지. 심장을 탈환했는데 다른 곳이라고 못 할 거 있어?”
“제발 빨리 어떻게든 해줬으면 좋겠다. 찜통이라도 좋으니까 보일러로 덥힌 방에서 잤으면 소원이 없겠어.”
“난 뭐라도 좋으니까 따듯하게 익힌 음식이 먹고 싶어.”
사람들은 작고 초라한 소원을 희망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근데 그놈의 발표는 언제 시작하는 건가? 벌써 2시간은 기다린 것 같은데….”
“하여튼 높은 자리에 있는 놈들일수록 엉덩이는 더럽게도 무거워요.”
누군가의 물음에 생존자들은 전방의 커다란 나무 연설대를 보며 구시렁거렸다.
“쉿!
“흠, 흠.”
단상 위 마이크에서 묵직한 헛기침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분산되어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단상 위의 남자에게로 쏠렸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박정후는 나지막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연설의 포문을 열었다.
“안녕하시냐는 의미 없는 안부인사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어떠한 위로도, 따듯한 말도 지금의 여러분들에게 와 닿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박정후는 불안, 기대, 희망, 절망 등 갖가지 감정이 담긴 눈빛들을 응시하며 단상 위에 구비된 물을 한 모금 삼켰다.
“그래서 이 못난 사람은 의미 없는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행동으로 여러분을 위로하고자 합니다.”
박정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상을 비추던 빛이 꺼지고 허공에 커다란 구체가 생기더니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저… 저건 대체 뭐야!”
연설을 듣던 좌중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구체를 응시했다. 그러나 불안이 짙은 열망과 희망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영상은 혜정과 자각사가 이끄는 무리들이 작은 괴수들을 토벌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혜정의 석장이 거대한 나무 괴수의 몸을 뚫기 무섭게 영상은 막을 내렸다.
“지금까지 여러분께서는 강동구 토벌을 끝낸 혜정 스님과 자각사의 활약을 압축한 동영상을 보셨습니다.”
“허….”
“대한민국 만세! 만세!”
“자각사 만세! 혜정 스님 만세!”
내레이션이 끝나기 무섭게 홀린 듯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 둘 일어나 박수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빠르게 달아오르자 박정후는 손짓으로 좌중들을 진정시키곤 말을 이어갔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의 저력을 잘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현재 우리는 수많은 암초를 만난 배와 다름이 없습니다. 여전히 무수히 많은 암초들과 보이지 않는 어려움이 항로를 막고 저희들의 위대한 항해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연설에 몰입한 청중들은 그들이 겪었던 일을 떠올리곤 눈시울을 붉혔다. 인생을 지탱해주던 가족을 잃고 포근했던 가정을 잃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 방식만 다를 뿐, 같은 아픔을 겪은 건 자명한 일이었다.
“이미 수많은 국민들이 괴수 놈들의 손에 희생됐고,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놈들은 여전히 저희 삶의 터전을 짓밟고 무너뜨리는 중입니다. 하지만 이 못난 사람 서울을 탈환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겁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박정후는 단상을 힘차게 내려치며 좌중들을 오시했다.
“무너진 건물은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며, 조각난 희망의 파편들도 제가 붙여나가겠습니다! 이미 한 번 일으켰던 한강의 기적! 제가 그 이상의 기적을 일으켜 보이겠습니다!”
사실여부를 떠나 저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와아아아아아!”
실제로 박정후가 청중들이 원하는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자, 청중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열광하며 기립박수를 보냈다. 일부는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단상으로 오르려다가 대기하고 있던 군인들에게 가로막히기도 했다.
“서울은 도화선의 시작일 뿐입니다. 서울을 기점으로 남부 지역을 차례차례 탈환하여 한반도에 퍼져 있는 우환의 씨앗들을 반드시 제거할 것을 이 자리에서 약속드립니다! 이 못난 사람, 행동으로 모든 걸 보여드리겠습니다!”
분위기가 최고점에 도달했음을 직감한 박정후는 분위기에 편승하여 주먹을 하늘 위로 불끈 쥐어 보이며 연설을 끝마쳤다.
“자, 난세의 영웅들이신 자각사의 전사들과 혜정 스님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부디 박수로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박정후가 눈짓하자 단상 위로 혜정이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올라왔다.
“가관이네, 가관이야.”
생존자들 틈에서 연설을 지켜보던 민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땡중을 바라봤다. 혼자 올라간 것을 봐선 아마 대표로 홀로 나온 모양이다. 잠시간 의미 없이 오가는 대화를 듣던 민성은 한숨을 내쉬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
혜정의 막사 안. 간이침대와 침낭 등 어딘가 단출한 내부의 모습을 작은 전등이 비추었다.
“설마 상장 받는 걸 보여주시려고 부르신 건 아니리라 믿습니다.”
좌중들 속에 섞여 연설을 감상한 민성은 반쯤 농담을 섞어 말했다.
“허허. 설마 그것 때문이겠나? 본디 자네의 공이 이능력자 대책부와 군부의 것으로 돌아갔다니 내가 다 안타까워서 그러네.”
혜정은 씁쓸하게 웃으며 염주를 굴렸다. 본디 민성이 일궈낸 업적들이건만 내막을 모르는 국민들은 알 도리가 없었다.
“호의는 감사드리지만 전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오히려 고마울 정도니까요.”
“정말인가? 자네의 이름과 무위를 알릴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일세.”
“이미 필요 이상으로 관심 받았고 더 받기는 거북하군요.”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것보다 슬슬 중요한 주제로 넘어가고 싶습니다만.”
민성이 슬며시 운을 떼자, 혜정의 얼굴은 진중하고 무겁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