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
255화 - 아무르 (3)
“웃기고 있네. 궤변도 정도껏 지껄여.”
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챈 민성은 손 위의 조각상을 바닥에 떨구곤 형체조차 남지 않도록 자근자근 밟았다. 발 밑 사이로 작고 투명한 알갱이가 새어나오자 그제야 민성은 동작을 멈추곤 아두르를 노려봤다.
“그러니까 너는 그놈들이나 네가 약해 전쟁에서 패배한 게 인류의 잘못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거네.”
민성의 낮은 으르렁거림에 아두르는 무심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쓰레기장에 곱게 처박혀 있을 것이지 뭔 미련이 그리 남으셨대?”
민성은 과거 지배자가 언급했던 단어를 꺼내어 놈의 심기를 흔들고자 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티노가 종종 말하던 저쪽 세계와 쓰레기장. 괴수 출현의 원인지인 저쪽 세계와 쓰레기장의 의미. 확실치는 않지만, 사실 둘이 하나일 가능성은 예전부터 의심해왔다.
“큭….”
시종일관 무심하던 얼굴에 미소가 걸리자 민성은 긴장하여 부르튼 입술에 침을 적셨다. 웃음 속에 담긴 것이 경멸도, 조롱도 아닌 진정 흥미로워 나오는 것임을 알았기에 그럴지도 몰랐다.
“차라리 모르면 편하다고 했던가. 네 무지가 안쓰러우면서도 부러울 뿐이구나.”
아두르는 멈출 줄 모르는 눈발을 처연히 응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저 흙 한 줌, 풀 한 포기조차도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닐진대, 모든 탄생에는 응당 희생 혹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따르는 법은 당연하고도 합리적이며 나 또한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탄생을 위한 무조건적인 희생이 올바르다 말할 수 있는가?”
“….”
이해불명. 쉽사리 납득가지 않는 말에 민성은 침묵을 고수했다.
“그것까지는 모르는 건가….”
“주인님….”
아두르의 슬픈 미소에 눈밭을 내달리던 토끼는 끽끽대며 앞발로 눈물을 훔쳤다.
“전쟁에서 패배한 자의 처우를 아나?”
“…다 죽었지.”
민성은 처음 타워로 끌려 들어가 치렀던 전투를 떠올리곤 조용히 읊조렸다.
사실 가장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기도 했다. 처음 타워가 출현했을 때, 관리자는 전쟁에서 패배할 경우 승리한 차원에 흡수되어 무엇 하나 남지 않는다고 했다. 거기까지는 납득이 갔다. 하지만 저쪽 세계가 쓰레기장과 동일한 곳이라고 가정했을 때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정말 다 흡수되어 죽는 거라면 왜 아직까지 티노가 있을 수 있는 거지? 괴수들은?’
그러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러나 그건 결과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파편이자, 승자를 도취시키기 위해 보여주는 작은 쇼이기도 하다. 나 또한 여러 차례 봐왔던 광경들이니까.”
아두르는 속삭임 같은 한숨을 내쉬며 계속 말했다.
“그러나 인간들의 생존욕구에 밀려 패배하고 나와 나의 피붙이들. 친우들 모두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피부와 살은 조각조각 갈려 밭에 비료 뿌리듯 너희 차원에 흩뿌려졌다. 어째선지 나만은 살아남아 쓰레기장에 떨어졌지만 말이다.”
“그래서 뒈졌어야 했는데 혼자 살아남은 게 억울해서 복수하겠다는 거잖아?”
민성의 빈정거림에 아두르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분노, 절망, 체념. 갖가지 감정들이 날 옭아맸지만 난 최대한 현실을 받아들이려 했다. 지혜 또한 무력의 일부이며 어쨌건 난 전쟁에서 패배한 패자니까 말이다. 그러나 점차 쓰레기장에 들어오는 여타 종족들을 보며 난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낮고 진중한 음성에 민성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여부를 떠나 어디에서도 구하지 못할 정보라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아직, 아직은 괜찮아.’
다만 초침이 딸각거릴수록 정보와 죽어가는 동료들의 목숨과 저울질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불쾌하기도 했다.
“한때 힘만이 세상의 전부이자 진리라 여기던 나는 수많은 시간 동안 고민하고 고민했다. 힘이 없어 당하는 건 죄인가? 힘만이 절대적인 진리이고 세상의 잣대인가? 우리는 그저 생존해야 한다는 사실에 등 떠밀려 누군가의 장기 말이 된 건 아닐까하고 말이다. 와중에 한 영역을 지배하게 됐지만 그 또한 나의 의문을 지우진 못했다.”
“실질적으로 운영하던 건 아크네였으니 아주 거짓은 아닌 것 같다.”
민성의 눈짓에 티노는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얼굴로 동의했다.
“그리고 반년 전, 놈이 나타났을 때 나는 깨달았다. 놈이 만들어낸 장치에서 환상 속의 것이라 여기던 토토가 대량 출현하고, 고향으로 보내준다는 달콤한 독에 속아 수많은 주민들이 부나방처럼 달려들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아두르의 말이 끝나자, 민성은 애써 담담한 얼굴을 유지하고자 했다. 버섯 속에서 만났던, 분노와 좌절로 얼룩진 수많은 얼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정말 고향으로 갔을지도 모르지.”
민성은 씁쓸한 미소를 흘리며 나지막이 반대했다.
“아니, 우리는 에너지를 소화하고 남은 찌꺼기에 불과하다. 그런 자들을 위한 배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토토가 찌꺼기를 치워버리기 위한 함정이라는 사실을 확신한 나는 깨달았고 결심했다. 차원 전쟁은 서로의 욕심에서 비롯된 전쟁이 아니라, 지배자들의 머리 위에 존재한다는 놈들의 단순한 오락거리일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난 그것들을 부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끽끽! 이 한센!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주인님을 보필하겠습니다요!”
평소 감정표현이 없다시피 한 아두르가 주먹을 쥐어 보이자, 한센은 머리를 눈 속 깊숙이 파묻곤 경배를 올렸다.
“뭐, 취지는 좋은데 그 이유가 사람들을 죽이는 걸 정당화할 수 있다 생각하는 건 아니지? 네 말이 사실이라면 서로 협조하는 편이 더 좋을 거 같은데?”
나름 대화가 통하는 놈이라 생각한 민성은 피부색이 파래진 신들을 가리켰다. 이미 대화로 4분가량을 소비했다. 목숨의 심지가 꺼져버리기 전에 살릴 수 있다면 어떻게든 구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내가 구상하는 이상적인 세상에 인간은 없다. 비록 인간들 또한 장기 말이었겠지만 의도가 어떠했건 우리를 쓰레기장에 몰아넣은 장본인들과 함께할 수는 없지.”
“지랄하고 있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말에 민성은 온 힘을 쥐어짜 대검을 쳐들었다. 그리곤 아두르가 앉아있는 옥좌를 향해 달려들었다.
“뒈져!”
민성은 함성과 함께 벼락같이 하늘로 솟아 아두르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툭-
그러나 검날은 빨려 들어가듯 아두르의 손가락 사이에 잡혔다.
“그 몸으로도 기세가 꺾이지 않은 건 칭찬받을 만하다.”
피와 먼지로 범벅이 된 몸과 과다출혈로 잘게 떨리는 볼은 그의 상태를 대강 짐작케 했다. 그럼에도 물러나지 않는 용맹만큼은 참으로 칭찬 받아야 마땅했다.
“하지만 스스로의 상태를 확실히 인지하는 것도 전사가 가져야 할 덕목이지.”
“개소리도… 정도껏 해야… 들어주지!”
민성은 검을 뽑아내고자 자루에 있는 힘을 다 실었다. 그러나 대검은 본드를 붙인 듯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민성은 요동도 않는 대검을 보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그저 힘 빠진 작금의 상황이 원통했다.
“이 세상은 희생과 고통을 밑바탕 삼아 만들어졌다. 너희 인간들은 죄악을 거름 삼아 자란 잡초들과 다름이 없다. 태어난 것은 죄가 아니나 주변 작물의 양분을 빨아먹고자 하는 욕망은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가 되어도 바뀌지 않는다.”
“지랄!”
궤변. 놈이 내뱉는 것은 그저 허울 좋은 포장으로 덮은 궤변에 불과하다. 그가 루비를 얻기 위해 주민들을 학살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스스로와 타협한 것처럼 말이다.
“어떻게 생각해도 좋다.”
아두르는 무뚝뚝한 음성을 뱉으며 잡고 있던 검날을 툭 밀었다. 민성이 반동에 저만치 밀려나자 아두르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 잡설은 네게 주는 첫 번째 상이자, 나의 마지막 속죄이기도 하다.”
“뭐?”
“적어도 잡초가 뽑혀나가는 이유를 잡초 하나쯤은 알아주길 바랐다.”
어처구니없는 말에 민성은 헛웃음을 흘렸다.
“지랄도 다양하게 할 수 있다는 걸 제대로 보여주네.”
그리곤 스산하게 중얼거리며 신들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놈의 의도 따윈 알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지금은 그저 어떻게든 동료들을 챙겨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민성의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무슨 짓이냐, 인간! 도망치려면 지금이 기회다! 다른 인간들까지 챙겼다간 이 기회마저 놓친다!”
“5분. 그 안에 방도를 찾아내 살려낼 겁니다. 그러려면 일단 데려가야죠.”
티노의 만류에도 민성은 시계를 흘낏 보곤 보폭을 유지했다.
“마지막 상으로 그들의 해방을 원하는가?”
팽팽한 긴장감만이 흐르는 와중, 민성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만 보던 아두르가 하얗게 서리 내린 입술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상, 상, 하는데 뭔 개소리야?’
민성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두르를 노려봤다.
“아크네 말이다. 본디 내가 죽였어야 할 일. 대신한 내게 상을 주겠다는 소리다.”
“…상?”
“일개 인간 나부랭이가 아두르 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걸 영광으로 생각해라! 끽끽!”
토끼는 못마땅하고 배알 꼴린다는 듯 배를 붙잡곤 끽끽거렸고, 얼토당토않은 말에 민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놈을 노려봤다.
‘무슨 생각이지? 역시 함정인가?’
민성은 가늘게 뜬 눈으로 아두르를 응시했다. 분명 티노의 말에 따르면 아두르와 아크네는 상하관계였던 걸로 기억한다. 헌데 수하의 죽음에 분노는커녕 상을 내린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왠지 알아요?”
민성은 티노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그래도 현지 주민인 만큼 무언가 내막을 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글쎄다…. 아무리 박식한 이 몸이라도 모든 걸 알지는 못한다, 인간.”
“역시 그렇죠?”
녀석이 저쪽 세계의 정보에 능통하다 한들 모든 걸 알고 있진 않을 것이란 생각에 민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추측은 가능하다. 내가 봤을 땐 아무래도 저들끼리 암중의 계약이 있었던 것 같다.”
“계약이요?”
티노가 안광을 빛내며 뼈를 달싹이자, 민성은 조용히 되물었다.
“그래. 계약 말이다. 인간도 봤다면 알겠지만 아크네가 사용했던 스킬, 개중에는 아두르의 것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그년한테 흡수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뭐, 그렇다 치고요. 근데요?”
민성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기에 적당히 호응해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자존심 강한 아두르가 그냥 뒀을 리가 없다. 분명 놈은 아크네에게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수를 썼을 것이고, 위기에 처했던 그년은 그걸 저버린 탓에 놈이 이곳까지 온 게 틀림없다.”
“그러니까 아두르가 직접 죽이려 했는데 제가 죽여서 온 거라고요?”
“그년이 인간을 상대하지 않았다면 그럴 일도 없었겠다만 어쨌든 정확히 알아들었다.”
녀석이 생각한 것치곤 꽤나 그럴싸한 가정에 민성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