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
254화 - 아무르 (2)
‘이 미친 토깽이 새끼가.’
상황을 지켜보고자 했건만 한낱 미물 따위에게 간파 당하자 민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한 발 앞으로 나가 남자의 시선을 돌리려는 찰나,
“인간…. 당장 도망쳐야 한다!”
“네? 무슨 소리예요?”
옆에서 들려오는 티노의 매서운 음성에 민성은 슬쩍 고개를 꺾었다.
“놈이다. 냉혹한 군주 아두르. 저놈 때문에 이 몸과 교류관계에 있던 몇 종족들이 멸망했다.”
“그래요?”
티노가 으르렁거리며 남자를 노려보자, 민성은 실없이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렀다. 평소 자신감 덩어리인 녀석이 긴장했는지 뼈를 계속 움찔거리는 게 꼭 털 세운 고양이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장 문으로 도망쳐라, 인간. 지금의 인간으로선 다시 태어나도 이길 수 없는 존재다.”
“컨디션 100%인 상태에서도요?”
“그래도 어림없다. 그러니 허튼 생각일랑 않는 게 좋을 거다, 인간.”
티노가 강력하게 반대하자, 민성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녀석이 이토록 경계하니 작은 호기심이 일었지만 안전선을 넘을 만한 크기는 아니었다. 더욱이 녀석이 저렇게 경고한 놈치고 강하지 않은 놈들이 없었을뿐더러, 조금씩 흘러나오는 피가 판단력을 완전히 삼키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거기다 가능하면 나도 이딴 놈들 상대 안 하고 편하게 지내고 싶지.’
죽여 봐야 손에 남는 거라곤 땀방울뿐인데, 어지간하면 상대 않는 편이 그에게도 좋았다.
깜박-
민성은 어질한 정신을 애써 지탱하며 신과 아루에게 눈짓을 줬다.
“신….”
“안다.”
그러자 신호를 인식한 신들은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문가로 다가왔다. 눈치만 살피던 중대장 또한 엉겁결에 그들을 따라 행동했다.
“그래서 무슨 용건이지?”
민성은 신들이 문가로 다가오는 동안 시선을 끌기 위해 아두르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티노의 말따마나 벽 안의 한 측을 담당했던 괴수 놈이 갑자기 그들 앞에 튀어나왔으니 말이다.
“흠.”
그러나 민성의 물음에도 아두르는 진열대에 올려진 물건 구경하듯 싸늘한 눈으로 민성을 관찰했다. 어딘가 불편한 곳이라도 있는지 새하얀 미간에 팬 주름이 잘게 일렁였다.
“끽끽! 겉으로 보이는 게 다는 아니라지만 그런 것치곤 상당히 약골처럼 보이지 말입니다요. 차라리 저놈이 아두르 님을 빼닮은 게, 저놈이 잡았다고 하는 게 더 믿을 만하겠습니다요.”
주인의 얼굴에서 불편함이라는 감정을 읽은 토끼는 잽싸게 손으로 신을 가리키곤 앞발이 불나도록 비볐다.
“냄새는 저놈한테서 난다고 하지 않았나?”
“아이고! 물론 그렇습니다만 외적으로 봤을 때 그렇다는 것이지요! 외적으로! 끽끽!”
주인의 물음에 토끼는 펄쩍 뛰며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물음에 호응했다.
“그나저나 아두르 님! 잠시만 기다려 보십쇼! 이제 보니 그뿐만이 아닙니다요! 쓰레기 같은 냄새도 섞여 나오는 것 같은데 제가 더 자세히 맡아보겠습니다요!”
연신 허공에 대고 코를 씰룩이던 토끼는 미묘한 냄새를 감지하곤, 냄새의 근원지를 쫓아 폴짝였다.
“아두르 님! 이놈한테서 나는 것 같습니다요! 아주 더럽고 추잡한 냄새가 지배자놈의 것과 똑 닮은 것 같은데, 제가 더 자세히 맡아보겠습니다요!”
이윽고 근원지인 민성의 코트에 도달한 토끼는 코트자락에 얼굴을 처박곤 냄새를 맡으려 했다.
“앞에서 설치지 말고 네 주인 냄새나 맡아!”
미물에게 품평당하는 것 같아 짜증이 치솟은 민성은 토끼의 배를 냅다 걷어찼다.
치익-
“캑!”
체력 타는 구수한 소리와 함께 토끼는 비명을 내지르며 공중으로 치솟아 이윽고 주인 발치에 떨어졌다.
“아이고! 아이고, 나 죽네!”
토끼는 배를 붙잡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러나 주인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몸을 일으켰다. 허나 생각보다 멀쩡한 토끼의 모습에 민성은 차가운 눈빛으로 놈을 노려봤다.
‘왜 마나 디스트로이어는 발동이 안 됐지? 마나가 아예 없는 놈인가?’
다양한 종류의 괴수들이 있는 만큼 마나가 없는 놈도 존재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흠…. 확실히….”
아두르는 민성의 한쪽 눈을 바라보며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보… 보셨습니까요! 애초에 이런 놈들입니다! 대화라곤 개뿔도 모르는 쓰레기 같은 종족입니다요! 다 박멸시켜야 마땅한 놈들입니다요!”
토끼는 젤리 같은 발바닥으로 바닥을 내려치며 의사를 토로했다. 한낱 인간 따위에게 상을 주시러 온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헌데 수상쩍은 냄새를 풍기는 놈에게 얻어맞아 체력도 뭉텅 깎여나가기까지 하니, 불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말은 지극히 합당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순서를 잊지 마라. 모든 일에는 원칙과 섭리가 있다.”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주인님의 뜻이 곧 제 뜻 아니겠습니까요! 끽끽!”
무뚝뚝한 음성에 아차 싶은 토끼가 잽싸게 발을 비비며 아두르의 뒤로 빠졌다.
“그래서 그 아크넨지 뭔지 하는 뱀년 복수라도 하려고 온 건가?”
방해꾼이 빠지자 민성은 다시 남자의 눈을 응시하며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나 여전히 발끝은 문을 향해 있었고, 기습을 대비해 쥔 검자루를 쥔 손 사이에선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건 아니다만 아주 아닌 것도 아니야.”
아두르는 슬금슬금 문가로 이동하는 신들을 보곤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움직여도 된다 허락하지도 않았다. 프로즌 쓰론.”
냉혹한 군주의 음성이 끝나기 무섭게 아크네의 것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나운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아두르의 몸 주변을 타고 부유하던 눈발들 중 일부는 하늘로 치솟았다.
“가… 갑자기 웬 눈이지?”
“….”
“젠장! 빨리 와!”
민성은 낯선 광경에 당황한 신들에게 삿대질하듯 손짓하며 소리쳤다. 아크네에게 당해 점토가 되어 정신을 잃었으니 저러한 반응도 이해는 갔지만 지금은 당황이란 감정조차 사치였다.
“아… 알았어!”
“간다.”
“알겠습니다!”
민성의 고함에 정신 차린 신들은 황급히 문가로 달려왔다. 그사이 민성은 열쇠를 열쇠 구멍에 넣고 힘껏 돌렸다.
달칵-
잠금장치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민성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그러나 문 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이 활짝 벌어지려는 찰나,
“몸소 경고까지 해줬건만 스스로 위기를 초래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구나.”
아두르는 문에 근접한 신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그의 주변을 맴돌던 눈발들이 생명을 얻은 것처럼 표적을 향해 세차게 날아갔다.
“큭….”
민성은 반사적으로 바닥을 구르며 정면에서 들이닥치는 눈발을 피했다. 앞선 전투에서 눈에 닿기만 해도 얼어버린다는 사실을 터득한 덕인지,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버렸다.
쩌적-
“꺄아악!”
“이건….”
“으어어어어!”
다만 미처 피하지 못한 세 남녀의 몸은 싸늘한 얼음에 포장되어 기둥이 되어갔다.
‘젠장.’
그 모습에 민성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경고음은 들려오지 않았어도 저들의 상태는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10분 내로 해제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차가운 기둥 속에 갇혀 영원한 잠에 빠질 것이다.
‘어쩌지? 지금은 무슨 짓거리를 해도 못 구해. 혼자 내뺄까? 젠장…. 젠장….’
그렇다고 전투를 벌이기엔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이 버텨줄지도 의문이었다. 스킬은 전부 소모했고, 과한 출혈 탓에 피부는 창백해져 갔으며, 초점은 맞지 않아 잘게 흔들려댔다. 이제껏 수많은 위기를 맞닥뜨려 왔지만 단연코 이번만큼은 무사히 벗어나리라 호언장담할 수 없었다.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때 아닌 폭설을 뿌려대는 하늘이 괜스레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가라.”
신은 아직 건재한 팔을 들어 휘적거렸다. 그럼에도 민성은 고뇌의 추를 던져버리지 못했다.
“무뚝뚝한 인간 말대로다, 인간. 재차 당부하지만 죽고 싶지 않다면 싸울 생각은 마라. 우정도, 자존심도 살아 있을 때나 부릴 수 있는 거다.”
“….”
티노의 조언에도 민성은 터진 입술 사이로 나오는 피로 목을 축일 뿐, 자리에서 요동도 않았다.
“이제 좀 대화하기 적절한 장소가 됐어.”
아두르는 어느덧 만들어 놓은 반투명한 옥좌에 앉아 내려오는 눈발을 지그시 응시했다.
쩌적-
‘영원한 빙결’의 여파일까. 떨어지는 눈발에 닿는 모든 것들이 얼어갔다. 나무의 굵은 가지도, 공터 한편에 있던 철봉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민성의 몸 위로 쌓이기만 할 뿐, 그를 얼리지 못했다.
“주인님의 은총 덕에 저도 숨쉬기가 좀 편해졌습니다요! 너무 더웠습니다요! 끽끽!”
진정 왕좌가 어울리는 제왕의 풍모에 감격한 토끼는 눈 덮인 공터를 제 집 안마당처럼 뜀박질하며 돌아다녔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깨끗하지 않나?”
“깨끗하다고?”
얼음 옥좌에서 들려오는 잔잔하고 고요한 음성에 민성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희생과 고통을 거름 삼아 만들어진 세상의 일부를 정화해줬으니, 이를 깨끗하다 않고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을 터. 그렇지 않은가?”
아두르가 투명한 손을 들어 민성의 손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눈꽃을 가리키자, 눈꽃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대더니 사람을 닮은 작은 조각상으로 변했다.
“….”
민성은 가만히 조각상을 내려다봤다. 짧은 단발,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눈동자, 무릎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코트까지. 그것은 꼭 그를 빼닮아 있었다.
“무슨 생각이지?”
이미 싸움을 걸고자 했으면 진작 그를 얼리려 했을 터. 놈의 저의가 궁금했다. 그러나 마냥 시간을 흘려보낼 수도 없었다. 이미 전신이 얼음 속에 갇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는 신들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탓일지도 몰랐다.
“물론 이 세상이 더러움으로 가득한 것이 인간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나 또한 잘 안다. 출생은 종족을 막론하고 고귀한 행위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방패가 되기는 어렵지. 탄생의 이유가 타 종족을 양분으로 삼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라면 더욱더 말이다.”
빠직-
아두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성의 손 위에 얹혀있던 조각상은 여기저기 실금이 나 부서지기 시작했다.
“이건….”
떨어져 나간 조각상의 머리 안에선 새싹이 자라나듯 여러 얼굴들이 조각된 새 머리들이 피어 올랐다. 머리들은 제각각 생김새가 달랐다. 허나 무엇보다 신기했던 건 이것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한 꿈틀거림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물건이나 갖가지 공예품 만들기를 좋아했지만 전투 능력은 뛰어나지 못했던 종족들이다. 모두 너희 인간의 손에 바스러진 비운의 종족들이지.”
민성은 당장이라도 들고 있는 망치로 손톱을 내려찍으려 하는 둥그스름하고 주름진 얼굴을 응시했다. 비록 조각상이라지만 얼굴에 드리운 고집과 분노는 생전의 것을 그대로 재현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