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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캐쉬상점 쓴다-253화 (253/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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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화 - 아무르 (1)

“좋아요. 적어도 그 발언만큼은 신뢰가 가네요. 그렇다고 오해는 말아요. 당신을 신뢰하는 건 아니니까. 애초에 우리가 그럴 사이도 아니고 말이죠. 제가 신뢰하는 사람은 오직 한 분뿐이니까요.”

“알고 있어.”

신뢰의 중심축이 되는 이가 없다면 한순간 무너져버릴 제방. 그들 관계의 현실이었다. 우철은 눈살을 찡그린 채 어서 가라는 듯 손사래 쳤다.

“항상 조심해요. 이화는 몰라도 전 다르니까요.”

슥-

경고 섞인 상냥한 음성을 마지막으로 자하의 신형은 완전히 그림자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빌어먹을 년.”

그림자를 빤히 바라보던 우철은 그녀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곤 나지막이 한숨 쉬었다. 민성에게 속은 스스로의 머리를 탓해야 할지 그녀의 촉을 탓해야 할지 여러모로 씁쓸한 감정이 가슴을 타고 흘러내렸다.

“크릉….”

주인의 심적 변화를 느낀 것인지 백호가 곁으로 다가와 그의 볼에 조심스럽게 얼굴을 부볐다.

“믿을 놈이라곤 너밖에 없구나.”

우철은 백호의 턱을 긁적여주며 민성이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

“더 이상 쫓아오는 놈들은 없다. 여유를 가져라, 인간.”

도주 중, 중간에 날아와 합류했던 티노가 후방에서 되돌아와 민성의 어깨에 털썩 앉았다. 그리곤 민성을 불안하게 바라봤다. 눈이 반쯤 감긴 것이 달리다 잠들진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안심하긴 이르죠.”

민성은 지친 모습을 숨기고자 일부러 목소리를 최대한 밝게 했다. 두 번의 전투. 그 여파일까. 외관은 말짱했지만 속은 피로에 곯아 문드러지는 듯했다. 어깨는 처지다 못해 축 늘어졌고, 다리는 자꾸 힘이 풀리는 것을 겨우 다독여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발길의 끝이 집 문턱을 넘기 전까지 멈출 수 없다.

“누구랑 얘기하시는 겁니까?”

민성이 빈 허공과 대화하는 걸 바라보던 중대장은 자칫 민성의 심기를 거스를까 하여 조심스럽게 물었다.

“혼잣말이에요. 안 그러면 당장이라도 누워버릴 것 같아서요.”

갑작스레 들려온 질문에 민성은 피식 웃으며 눈 돌려 옆구리를 내려다봤다.

“그렇습니까?”

중대장은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또한 괴수들과 한바탕 총질하고 나면 피로감에 쓰러지고 싶은데 하물며 짐 덩이를 들고 생사투를 벌인 민성은 오죽할까 싶었다.

“….”

중대장이 조금이라도 민성을 배려하고자 입을 다물자, 그들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휙-

“큼….”

민성의 옆구리에 끼인 채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던 중대장은 어지러워 눈을 꽉 감았다. 빨리 감기를 누른 영상처럼 순식간에 스쳐가는 배경 탓에 멀미가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어지럽게 한 건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아직 귓전에서 맴돌고 있는 탓인지도 몰랐다.

“저…. 질문 하나해도 되겠습니까?”

“뭡니까?”

민성은 조용한 질주 사이로 들려오는 질문에 반문했다.

“저는 제 일에 나름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국민들을 지키는 총칼이 되어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 제 긍지였고 또한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렇군요.”

민성은 떨리는 음성에 나지막이 호응하며 거듭 앞으로 질주해 나갔다. 조금씩 시야에 안개가 들어서는 것처럼 흐려지는 것이 자칫했다간 정신의 끈을 놓쳐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늘 제 믿음은 산산이 부서져 나갔습니다. 수중에 있는 병사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놈이 어떻게 국민들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

자조 섞인 음성에 민성은 조용히 침묵했다. 상대가 좋지 못했을 뿐 딱히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다만 중대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강해질 수 있는 겁니까?”

중대장은 올라오는 울분을 애써 억누르며 질문했다. 만약 그 역시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자들과 같은 능력을 갖고 있었다면 그리 쉽게 병력들을 잃진 않았을 것이었다. 욕심이 났다. 능력자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분명 일반인들이 보는 것보다 조금 더 밝아 보일 것 같았다.

“글쎄요. 일단 기회를 잡으려면 사자 굴로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발급받아야 되겠죠?”

“타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능력을 얻으려면 그것밖에 없죠. 얼마 전에 열렸으니 잘만 하면 당첨되실 수도 있겠네요.”

떨리는 목소리에 민성은 긍정했다.

“들어가면 죽을 가능성이 높다고 들었습니다.”

“전쟁에 강제로 참여해야 하니까요. 대가 없는 보상은 없습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도전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단호한 민성의 답에 중대장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합니다만…. 후…. 타워 같은 것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애초에 그 흉물이 생기고 나서 이 사달이 난 것 아닙니까?”

중대장의 말은 틀리다 보기 어려웠다. 실제로 타워가 생기고 나서부터 사회는 조금씩 어지러워졌고, 괴수들이 대거 출현해 혼란에 방점을 찍어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민성은 의견에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지금 현실이 거지같긴 해도 마냥 나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당장은 혼란기 중추에 있어 그 여파를 직격타로 맞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 하지만 어느 정도 안정되면, 홍수가 범람했던 곳에 새 생명이 자라듯 기회가 소멸되다시피 한 사회에 새 활력의 바람이 불어올 거라는 게 민성의 생각이었다.

“민성. 여기다.”

짧은 대화 중 어느덧 공원을 벗어나자, 저 멀리 경비실 앞에서 손을 흔드는 신과 아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의 혼란은 분명 위기지만 기회이기도 합니다. 위기를 위기로만 끝낼지, 기회로 승화시킬지는 오롯이 당신 몫이고요.”

“….”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민성은 생각에 잠긴 짐 덩이를 들고 신들에게 향했다. 발전소 옆에 위치한 작은 경비실. 인적 없는 그곳에는 부러진 청소도구 몇 개가 어지러이 쓰러져 있다. 문에는 열쇠 구멍이 있는 것이 도어락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무사해서 다행.”

활을 꼬나 쥔 채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신이 민성에게 달려왔다. 그리곤 민성의 몸을 흘낏 살폈다. 점박이처럼 군데군데 새겨진 핏자국과 코트 아래로 떨어지는 핏방울이 그의 상태를 짐작케 했다.

“걱정했어.”

아루 역시 뒤따라와 민성의 몸 상태를 살피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운이 좋았어.”

민성은 탈주를 단순한 운으로 돌리며 적당히 신들을 달랬다. 민성이 구태여 내색 않자, 신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무덤에서 본 놈들. 널 노린 이유 궁금.”

“그러게. 나도 이유 좀 알았으면 좋겠네.”

민성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열쇠의 용도를 알았다곤 하나, 아직 신들에게 말할 필요는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괜히 놈들이랑 엮였다가 좋은 꼴 보기도 어려울 것 같고.’

“그보다 얼른 돌아가자. 일단 몸 좀 추스르고 싶어.”

“맞다. 우리 휴식 필요.”

민성이 지친 기색을 보이자, 신들은 서둘러 길을 내주었다.

“저…. 여긴 일개 경비실인 것 같습니다만….”

민성의 옆구리에서 내려와 그들의 대화를 멍하니 듣던 중대장은 용기 내어 말문을 열었다. 한강을 타고 넘어갈 줄 알았건만 기껏 도망쳐 온 곳이 한낱 경비실이라니. 피곤함에 절어 판단력도 상실한 걸까. 어디서부터 딴죽을 걸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당장 돌려보내 드리긴 어렵지만 회복하는 대로 인근 부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예?”

중대장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지만 민성은 빙긋 웃을 뿐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아이템 창.”

민성이 작게 중얼거리자, 그의 손에는 열쇠 하나가 잡혀 들었다.

“드디어 돌아가네. 안에만 있을 때는 마냥 지겨웠는데, 지금은 그게 너무 간절해.”

안전이 보장된 장소에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 때문일까, 아루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였다.

“맞다. 드디어.”

신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과 달리 잔뜩 상기된 얼굴에선 묘한 흥분이 피어올랐다.

“얼른 돌아가자.”

민성은 빙긋 웃으며 구멍에 열쇠를 꽂아 넣으려 했다. 그때,

쩌적-

갑자기 경비실 앞 공터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울리며 커다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슨….”

‘혈교 놈들인가? 아냐. 더 추격해오는 놈들은 없었을 텐데.’

난데없는 상황에 민성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균열을 노려봤다. 균열 사이에서 한기가 스멀스멀 새어나와 민성들 주위를 둘러쌌다. 심지어 그들의 숨결도, 옷과 살결 사이의 온기도 한기에 얼어붙어갔다.

“끽끽!”

한기에 긴장감마저 점점 얼어붙어가는 찰나, 기묘한 생명체 하나가 균열 사이로 뜀박질하며 뛰쳐나왔다.

‘토끼?’

민성은 문 여는 것도 잊고 멍하니 생물체를 바라봤다. 검은 중절모에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그것은 이족보행하며 연신 코를 씰룩댔다.

“끽끽! 아두르 님! 여깁니다! 여기요! 얼른 오십셔!”

느닷없이 나타난 토끼는 구멍 난 곳에 대고 두툼한 손을 휘적거렸다. 토끼의 손짓이 끝나기 무섭게 균열이 더 넓적하게 벌어지더니, 차가운 한기가 쏟아져 나와 주변 모든 것들을 천천히 얼리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하자는 건데?’

민성은 벌어진 틈을 시작점으로 얼어가는 지면을 경계했다. 왜인지 저것에 근접했다간 몸을 건사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 사이 틈에서 누군가가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흠.”

나지막한 음성 소리를 기점으로 틈 속에서 모습을 보인 것은, 사람의 형태를 띤 누군가였다. 이윽고 그것이 완전히 틈새를 빠져나오자, 민성은 그것의 실체를 더 명확히 볼 수 있었다.

‘저건 또 뭐하는 놈이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백색의 장발 머리였다. 티 없이 새하얀 것이 달빛에 반사되어 언뜻 은발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은 아름답지만 어딘가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더욱이 놈이 걸치고 있는 얇고 하얀 모피 외투는 윤기를 뽐내는 것이 예사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사람인가?’

민성은 한기에 떨리는 눈을 애써 치켜떴다. 저것은 사람일까. 혹은 사람의 껍데기를 덮어쓴 무엇일까.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놈의 옷 사이로 언뜻 드러난 신체 부위는 따듯한 살색이 아닌 동사한 사람의 시체처럼 푸르댕댕한 것이 보였으니 말이다.

“누가 아크네를 죽였지?”

남자의 첫 한 마디에 민성들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갔다. 싸늘한 말투 속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은 아크네의 것보다 더 차갑고 불쾌했다.

‘그년의 동료 같은 건가? 설마 복수하러 온 건가? 아니, 그전에 놈들에게 그런 의리 따위가 있었어?’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교차해 지나갔다. 만전의 상태에서도 아크네를 상대하는데 애를 먹었는데, 하물며 지금은 몸도 성치 못한 상태다. 헌데 아크네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강해 보이는 놈이 튀어 나왔으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누가 아크네를 죽였지?”

“….”

민성은 잘게 떨리는 시선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그러면서도 몸으로 손을 가리곤 몰래 문고리에 열쇠를 꽃아 넣고 돌렸다.

“없는 건가?”

백발의 남자는 감정 없는 눈으로 민성들을 쓱 둘러보며 담담히 물었다. 그러나 민성이 침묵으로 일관하자, 신과 아루도 그를 따라 입을 동여맸다.

“아두르님! 이놈인 것 같습니다! 이놈한테서 그년의 알싸한 냄새가 풍겨옵니다요!”

그때, 먼저 나와 한참 코를 씰룩이던 토끼가 두툼한 앞발로 민성을 가리키며 삿대질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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