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
250화 - 사계의 열쇠 (3)
치익-
뿐만 아니라 마나와 체력 타는 고통이 우천을 엄습했다. 예전과 달리 한결 더 뜨겁고 쓰라린 감각에 우천의 동공은 커다랗게 팽창해 들어갔다. 그러나 우천은 입술을 뿌득 깨물 뿐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 독한 구석이 있네.”
“이놈….”
불의의 일격을 허용한 우천은 피가 스멀스멀 새어나오는 옆구리를 만지며 민성을 노려봤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 내용은 진짜니까.”
민성은 다시 대검을 쳐들며 우천만이 들을 수 있도록 나지막이 말했다.
“…그걸 나한테 얘기해준 의도가 뭐냐.”
우천은 입술에서 번져 나온 피를 뱉어내며 민성을 노려봤다. 아무리 전투를 중시하는 그인들 열쇠가 있음을 들은 이상 섣불리 공격을 가하기 어려웠다. 우천이 움직임을 멈추자, 민성은 곧바로 앞으로 돌진하여 우천의 목에 대검을 휘둘렀다.
“등신아. 멈추지 마. 계속 공격해. 그래야 저년들이 의심을 안 할 거 아냐.
민성의 작은 속삭임에 우천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민성의 움직임에 호응했다.
챙-
“나는 아이템을 그대로 복사할 수 있는 스킬을 갖고 있어. 복사본을 네게 넘겨줄게.”
“이놈…. 무슨 생각이지?”
대검들이 허공에서 부딪칠 때마다 비밀스러운 대화가 오고갔다.
챙-
“다만 그냥 넘길 생각은 없어. 조건이 있다.”
“…뭐냐?”
챙-
“열쇠의 용도와 사용법, 그리고 이쪽의 안전. 단, 열쇠는 네가 먼저 정보를 알려준다는 전제 하에 넘기지.”
“….”
“좋은 건 나눠 먹자는 거지. 잘 생각해봐. 어차피 주도권은 너희가 갖고 있잖아?”
챙-
“나쁜 제안은 아닐 텐데?”
“그 열쇠가 진품이라는 증거가 없다. 거기다 네놈이 열쇠를 넘긴다는 확신도 없어.”
‘등신이라도 아주 생각이 없는 건 아니네.’
민성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쉽사리 넘어올 줄 알았건만 의외로 생각이란 걸 할 줄 아는 듯했다.
챙-
“어차피 네놈들이 포위망을 구축해 놓은 탓에 도망갈 구석도 없어. 거기다 그 백야인지 뭔지 하는 꼬마한테 너의 필요성을 더 증명할 수도 있고. 어차피 너희 딱히 좋은 사이도 아닌 것 같던데, 아냐?”
“….”
확실히 민성의 말은 그럴싸하게 들렸다. 실제로 우천과 자하 무리는 혈교와 백야의 이름 아래에 협동하고 있을 뿐, 본디 썩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민성이 그 사실을 알진 못했으나, 민성의 예리한 추측은 우천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충분했다.
‘만약 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 일은 오로지 내 단독 공적이 될 거고, 백야 님도 날 저년들보다 더 높게 평가하시겠지. 게다가 이렇다 할 문도 보이지 않고, 투명해진들 자하의 스킬도 있으니 추적도 어렵진 않을 거다.’
더욱이 어둠에 동화된 혈령대가 모든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고, 더욱이 자하들까지 있으니 민성이 도망치기란 상당히 요원한 일이었다.
챙-
“참고로 네가 거절하면 난 투항해서 저쪽 두 여자한테도 마찬가지 제안을 할 거야. 더 이상 네게 돌아갈 기회는 없다는 소리지.”
대검 너머로 고뇌에 빠진 우천의 얼굴을 본 민성은 쐐기를 박고자 마지막 미끼를 던졌다.
“….”
‘내가 거절한들 만약 저년들이 이놈의 제안을 덥석 물어버려 공적을 올리면 백야 님께서는…. 안 되지, 안 돼. 여자가 남자 위에 군림하는 꼴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용납 못 해.’
우천은 두뇌 과부하가 걸릴 때까지 맹렬하게 셈을 계산했다.
“3초 내로 답이 없으면 거절인 걸로 알겠어. 3…. 2….”
숫자를 세던 민성이 대검을 늘어뜨리고 항복의사를 보이려는 찰나, 우천은 맹렬하게 돌진하여 민성이 대검을 쳐들게 만들었다.
챙-
“좋다. 네 말대로 하겠어.”
“현명한 선택이야.”
민성은 으르렁거리듯 속삭이는 우천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열한 웃음이 민성의 입꼬리를 타고 스쳐갔다.
“하지만 만약 날 속인다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느끼게 해주마.”
“거 의심 많으신 양반이네. 그럼 말든가. 그쪽 말고도 고객님 두 분 더 대기 중이니까.”
민성은 우철의 나지막한 으름장에 픽 웃으며 대검을 뒤로 밀쳐냈다.
“…사계의 열쇠는 인간을 한 단계 더 진보시키기 위해 필요한 물건이다.”
“쓸데없는 잡설은 됐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시죠?”
민성의 질타에 눈을 움찔거린 우철은 아까보다 거칠게 민성을 몰아붙이며 말을 이어갔다.
챙-
“네놈도 차원 전쟁을 겪었으니 알겠지만, 우리 차원 말고도 수많은 차원이 존재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당연한 소리로 어물쩍 넘어가려 하면 파투 납니다, 파투.”
“원래 타 차원의 생명체를 만나려면 오로지 타워를 이용해야 한다. 거기다 상대방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건 아예 불가능하지. 하지만 구전에 따르면 사계의 열쇠는 그걸 가능케 한다. 새로운 차원과 길을 이어주는 문, 그 문을 열기 위해 사계의 열쇠가 필요한 거다.”
민성은 설명과 함께 하단을 노리고 들어오는 대검을 받아치며 눈가를 찌푸렸다.
‘새로운 세계?’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이미 이 차원의 것이라 보기 어려운 괴수들이 득실거리는 판국에 새로운 차원이라니. 현실에 괴수들을 더 풀겠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세상이 망하길 원하기라도 하나 보네. 아, 그럼 이번 일도 그쪽 소행이었어?”
민성은 싸늘해진 시선으로 우철을 노려봤다. 혼란해진 세상 탓에 물 건너간 복수도, 아끼던 취미생활인 맛집 탐방도 전부 혈교 놈들 탓인 모양이었다.
“아니. 우린 모르는 일이다.”
우철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실제로 기껏 문을 확보하여 열쇠만 구하면 되는 상황에 괴수들이 터져 나와 그들 역시 막심한 손해를 봤다. 혈교 수뇌부는 이미 누군가가 문을 열지는 않았는지 의심하여 사계의 열쇠 건을 잠정적으로 중지하려 했었다. 독점의 의미를 잃은 이상 지속할 필요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백야 님께서 직접 본교를 방문하여 수뇌부를 설득한 덕에 안건은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이 사실까지 민성에게 말할 필요가 없었기에 침묵했다.
“정말?”
“믿을지 말지는 전적으로 네가 판단할 일이다.”
우철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는 민성에게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우철! 뭐 하는 거죠? 장난도 도를 넘으면 장난이 아니게 되는 것 모르나요?”
좀처럼 끝나지 않는 둘의 대결에 자하의 곤두선 음성이 날아왔다.
“간만에 몸 좀 푸느라 그런 거지. 어련히 알아서 끝낼까!”
우철은 호통 치듯 소리치곤 민성에게 작게 속삭였다.
“마지막으로 문의 위치는 중국 장안성 부근에 위치해 있다. 이제 내놔라.”
“응? 뭘?”
그러나 민성은 귀를 후비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모르쇠로 일관하는 민성의 행태에 우철의 얼굴은 점점 시뻘게졌다.
“열쇠 말이다!”
“열쇠? 내가 왜? 나이 처잡숴서 노망이 들었나? 네가 뻥카를 날렸을 수도 있는데 내가 뭘 믿고 줘? 안 돼. 확인절차 끝날 때까지 기다려.”
확인절차가 끝난다 한들 열쇠는 받기 어려울 테지만 말이다.
“이놈….”
민성이 귀지를 퉁기며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우철의 얼굴은 터지기 직전의 폭탄처럼 변해갔다.
“그럼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집에서 발 닦고 푹 쉬쇼. 그럼.”
민성이 눈썹 옆에 손을 치켜들어 장난스럽게 경례하곤 도망치려는 찰나,
“저도…. 저도 데려가십쇼! 여기서 죽을 순 없습니다! 부하들의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발….”
숨죽이고 상황을 관전하던 중대장이 다급히 민성의 코트 끝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
민성은 냉랭한 시선으로 명호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굴렸다.
‘만만찮은 놈들인데 괜히 혹 하나 달고 튀었다가 잡히면 골치 아픈데. 그냥 버리고 가는 편이….’
버리는 쪽으로 생각이 기우는 와중 명호가 들고 왔던 양철 주전자가 눈에 들어왔다.
‘후… 커피가 살린 줄 알아라.’
“어어?”
민성은 명호의 몸을 번쩍 들어 옆구리에 끼곤 냅다 줄행랑치기 시작했다.
“이….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애송이가 날 속여!”
“거 말은 똑바로 합시다! 속인 게 아니라 그쪽이 등신인 거지! 인생 헛살았네, 헛살았어!”
민성은 신들이 이동했던 방향을 따라 내달리며 바삐 입을 놀렸다.
“죽이겠다! 죽여버리겠어! 소환, 백호!”
민성이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버리자, 눈이 뒤집힐 대로 뒤집힌 우철은 거대한 설산 같은 백호를 소환하여 등에 껑충 올라탔다.
“젠장. 너희들도 멍하니 보지만 말고 쫓아!”
우철은 어둠에 숨어 있던 혈령대와 자하들을 향해 소리치곤 백호의 등을 툭툭 건드렸다.
“백호! 놈을 추격해라!”
“크아아앙!”
백호는 울부짖음으로 우철의 으르렁거림에 호응하며 민성의 뒤를 맹렬하게 쫓기 시작했다.
“후…. 저 돌대가리 새끼를 놔두는 게 아니었는데.”
“이화. 다 같이 백야 님께 문책 받고 싶지는 않으니, 일단 우철이 싸질러놓은 똥부터 치워요.”
삽시간에 멀어지는 백호의 궁둥이를 바라보던 이화와 자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우철의 뒤를 쫓았다.
탁-
한편, 바삐 달음박질하며 신들이 앞서 들어갔던 어둠 속을 따라 들어간 민성은 옅은 달빛에 의존하여 암흑 속을 뚫고 나아갔다. 간간이 심긴 나무들과 벤치가 빛에 반사되어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비참 공원인가? 이대로 쭉 나가면 강이 나올 텐데 어디로 간 거야?’
아크네의 둥지에 진입하기 전, 중대장의 막사에서 봤던 지도를 떠올린 민성은 혀를 찼다. 충분히 시간을 끌었다 생각했건만 믿었던 신의 통신은 올 생각을 않았다. 아직 문을 찾지 못한 모양이다.
“계속 전진하면 강이 나옵니다! 마땅한 퇴로가 없을 텐데 설마 배수진을 치시려는 겁니까?”
“글쎄요.”
민성은 옆구리에서 들려오는 중대장의 질문에 조용히 답하며 간헐적으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타닥, 타닥-
바람 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점차 커다랗게 울려왔다.
“이놈! 거기 서라! 서라고!”
“크아아앙!”
“그놈 더럽게도 빠르네.”
민성은 금세 뒤따라온 추격자들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백호의 날램은 민성의 상상 이상이었다. 비상식적일 정도로 높은 민첩을 보유한 그를 따라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 결과 나오는 대로 확인하고 바로 준다니까 그새를 못 참고 따라왔어? 어지간히 참을성 부족한 양반이네.”
민성은 한껏 빈정거리며 재차 내달리기 시작했다. 자칫 저들의 포위망에 갇히기라도 했다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았다. 신의 통신이 오기 전까진 무조건 사려야만 했다. 하지만,
“백호, 풍벽을 사용해라!”
“크아아앙!”
흰 호랑이의 입에서 거친 울림이 터져 나오자, 민성 주위로 맹렬하게 회전하는 회오리들이 생겨나 진로를 가로막았다. 갑작스러운 돌풍에 민성은 다급히 걸음을 멈췄다.
휘이이잉-
‘뭔, 이건?’
전후좌우 할 것 없이 가로막은 회오리에서 거센 바람이 몰아쳐오자, 민성은 실눈을 뜨고 풍벽을 응시했다. 바오밥나무 같은 크기의 돌풍은 벤치부터 수풀, 할 것 없이 주변 모든 것들을 게걸스럽게 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