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
249화 - 사계의 열쇠 (2)
“그래. 그럼 마지막 수업을 진행하기 전에… 혹시 사계의 열쇠, 네가 갖고 있니?”
자하의 물음에 민성은 눈가를 긁적이며 여인을 마주 바라봤다.
‘사계의 열쇠? 그건 또 뭐야?’
돌아가는 꼴을 봐선 열쇠를 얻기 위해 그를 찾아왔다는 사실은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열쇠에 관해선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뭔 소린지 잘 모르겠는데? 길치라 번지수 잘못 찾아온 거 아냐?”
“광해군의 묘지를 클리어하고 얻은 열쇠. 그래도 모르겠단 소리는 하지 않겠지.”
자하의 단언에 민성은 손을 멈칫했다. 확실히 묘지를 클리어한 대가로 불친절한 설명으로 가득한 열쇠를 얻긴 했었다. 다만 그 용도를 몰라 아이템 창에 처박아뒀지만 말이다.
“전혀 모르겠는데?”
민성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몰래 아이템 창을 열어 아이템 창 최하단에 박혀 있는 열쇠의 정보를 확인했다.
[이름 모를 열쇠]
등급: ?
설명: ?
효과: ?
횟수제한: 1/1
‘왜 이 쓸모없는 걸 찾지? 왜?’
어떠한 능력도, 등급도 없다. 효용가치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하찮은 열쇠다. 왜 이것을 탐내는지 이해가지 않았다. 허나 산전수전 다 겪은 민성이 그냥 넘겨줄 리 없었다.
‘모르긴 해도 놈들이 탐내는 걸 보면 엄청난 가치가 있거나 심오한 비밀을 갖고 있는 아이템일 가능성이 높아.’
특히 외관이 열쇠인 만큼, 보물 혹은 그 이상 가치가 있는 물건이 숨겨진 장소로 입장하는 아이템일지 모른다.
‘다만 놈들이 열쇠와 관련된 장소 혹은 아이템을 이미 확보했을 가능성이 높아. 만약 내가 이 기회를 이용해 역으로 열쇠의 명확한 용도를 알아내고 무사히 도주할 수 있다면?’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이득이다.
“솔직히 말할게. 지금 상태론 저놈들 못 이겨.”
냉정하게 현 상황을 직시한 민성은 등 뒤에 서 있는 신들만이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속삭였다. 열쇠의 정보도 중요했지만 퇴로 확보가 무엇보다 최우선이다.
“문. 찾아보겠다.”
“나도 도울게.”
민성의 뜻을 이해한 신과 아루는 작게 화답했다. 아크네와 사투를 벌였던 민성의 체력이 온전할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과 아루가 자리를 이탈하자,
“또 문 속으로 도망가려고? 두 번은 안 된단다. 혹시 모르니까 목숨은 붙인 채로 데려오렴.”
자하는 즉각 대기 중이던 혈령대에게 손짓했다. 혹시 민성이 열쇠를 저들에게 맡겼을지도 모르니 곱게 보낼 생각은 없었다.
“존명.”
자하의 명에 복면인들은 고개를 90도로 꺾어 보이곤 몸을 움직여 퇴로를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그 낌새를 눈치챈 민성이 신들의 등을 향해 손가락을 뻗곤 작게 중얼거렸다.
“유령 출몰.”
그러자 신들의 몸이 옷째로 흐릿해지더니 금세 모습을 감춰버리고 말았다.
“수작을 부릴 거면 나한테만 부려. 애먼 사람들 뒤통수 후릴 생각 하지 말고.”
“…못 보던 사이에 상당히 재밌는 스킬을 갖게 됐구나. 하아…. 할 수 없나?”
민성의 나지막한 읊조림에 자하는 귀찮다는 듯 한숨 쉬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혈령대가 멈칫하곤 자하를 주시했다,
“쫓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추격은 됐단다. 어차피 그물에 함께 딸려온 잔물고기들이었으니까. 그보단 너희들도 눈앞의 대어에 집중하렴.”
“존명.”
혈령대주는 붉은 복면 사이로 보이는 자하에게 부복하곤, 가로등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부탁 좀 할게요.”
“걱정 마라, 인간.”
그사이, 티노에게도 신들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부탁을 하곤 적의를 가진 이들을 여유롭게 훑었다.
“자, 아직 내 입이 온화할 때 주는 건 어떻겠니? 발뺌해봐야 소용없단다. 이미 네가 갖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 그런 물건은 학생이 갖고 있으면 안 된단다. 이 선생님에게 주지 않으련?”
재차 손바닥을 까딱이는 자하의 모습에 민성은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달빛에 은은히 드러나는 어둠 속을 노려봤다.
‘저쪽에 열 명, 저쪽에는 스무 명 가량 되나? 귀찮게 됐네.’
숨기지 않은 수많은 적의 탓에 살갗이 따끔거려왔다. 그럼에도 민성은 안면에 띤 미소를 유지했다. 힘들고 고될 때는 으레 얼굴에서 먼저 티가 나기 마련이다. 분명 놈들은 찰나의 변화도 놓치지 않으려 할 터. 최대한 여유 있는 모습을 유지해야만 했다.
“거참 말귀를 못 알아먹는 답답한 아줌마네. 없다니까? 저기 쓰레기통이라도 뒤져보든가. 혹시 알아? 있을지?”
민성은 가로등 밑에 어지럽혀져 있는 쓰레기통을 가리키며 이죽거렸다.
“참 말귀가 어두운 아이구나. 자고로 물건이란 진정한 주인의 손에 들어갔을 때 그 빛을 발하는 법이란다. 그 열쇠는 네가 갖고 있을 물건이 아니야.”
그러나 민성의 도발에도 자하는 이성을 유지한 채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면 잘 간수했어야지. 왜 이 구석까지 찾아와서 애먼 사람을 잡아? 아, 혹시 값 좀 나가는 아이템인가 봐? 그렇게 좋은 거면 혼자 먹지 말고 좀 나눠 먹읍시다.”
민성이 넌지시 열쇠에 관한 질문을 던졌으나 자하는 미소로 무마하며 계속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꾸나. 너도 불필요한 전투를 벌이긴 원치 않을 테니, 만약 네가 아이템 창을 공개해서 열쇠가 없다면 그냥 넘어가도록 할게.”
자하의 상냥한 제안에 민성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말 같지도 않은 것을 제안이랍시고 내놓으니 웃음이 멈출 생각을 않았다.
“아줌마. 개소리도 그럴 듯하게 해야 먹히는 거야. 아줌마가 여기서 속옷까지 벗고 적의가 없다는 걸 증명하면 나도 생각은 해볼게.”
“여전히 입이 거칠구나. 좋아. 곱게 줄 거라는 생각은….”
“젠장. 답답해 죽겠네! 팬티까지 까뒤집어 살펴도 시원찮을 판에 달라고 하면 저놈이 그렇습니까? 하고 줄 것 같아? 그냥 북어 패듯이 패는 게 정답이라니까!”
자하가 재차 민성을 압박하려는 찰나, 답답함을 느낀 남자는 자하를 옆으로 밀어내며 앞으로 나섰다.
“우천.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게 보이지 않나 봐요?”
남자가 대화를 단절시킨 탓일까, 자하의 음성은 한없이 내려앉아 있었다.
“무뇌아가 딱 알맞은 행동을 했는데 잘못이라고 할 것까진 없지.”
채찍을 든 여인은 남자를 두둔하는 듯 돌려 까며 자하의 말에 힘을 실어줬다.
“흥. 멍청한 년들. 네년들도 겪어봤으면 알 거 아냐. 약삭빠르기가 여우 같은 놈이라 괜히 뭔 짓 하기 전에 패는 게 정답이라고! 거기다 백야 님께서도 죽일 수 있으면 무조건 죽이라 말씀하셨다. 돌대가리들도 아니고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하아….”
“돌대가리 새끼….”
우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인 둘은 짙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들 역시 민성을 살려 보낼 생각은 없었다. 다만 자칫 민성을 죽였다가 열쇠가 아이템 창 속에 묻힐까 두려워 먼저 대화로 주도권을 잡으려 한 것뿐. 사전에 그리 설명해줬음에도 일의 우선순위는 나 몰라라 하고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우천의 행태에 여자들은 학을 뗐다.
“뭐, 좋아요. 마음대로 해요. 다만 혹 실수로라도 죽이면 백야 님의 문책은 피하기 어려울 거예요. 아니, 어쩌면 그분께서….”
이미 대화는 반쯤 파투 난 상황. 이제 남은 것은 강수뿐이었다. 반쯤 체념한 자하가 수락의 뜻을 던지는 와중,
“좋았어!”
우천은 신이 나 대검을 신명나게 흔들며 앞으로 내달렸다.
“이놈! 네놈이랑은 꼭 다시 붙어보고 싶었다!”
“난 그런 생각 한 번도 안 해봤는데?”
멧돼지같이 저돌적으로 달려오는 우천의 모습에 긴장한 민성은 검자루를 움켜잡으며 충돌에 대비했다.
“맞다 보면 어렸을 때 뱉었던 옹알이도 전부 기억날 거다!”
“이런 무식한 새끼가….”
우천이 괴성과 함께 다짜고짜 돌격해 오자, 민성은 혀를 차며 대검을 높이 쳐들었다. 그리곤 순식간에 지척까지 다가온 남자의 머리를 노리고 내려찍었다.
챙-
날카로운 쇠붙이 소리와 함께 검날과 살의가 담긴 시선이 얽혀 들어갔다.
“대화라는 걸 모르는 무식한 양반이네.”
민성은 검 너머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노려보며 빙긋 웃었다. 상흔 가득한 안면에는 웃음기가 한가득이었다.
“세 치 혀보다 검으로 나누는 대화가 더 진정성 있는 법이야.”
“머리가 떨어져 나가면 그런 소리도 못 할 텐데?”
민성은 힘 대결에서 밀리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밀어 넣었다.
“우천! 다시 말하지만 죽이면 안돼요! 열쇠가 최우선이에요! 백야 님의 말씀 잊지 말아요.”
“끙…. 알았어! 알았다고!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자하의 외침에 남자는 얼굴을 구기면서도 대검을 회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슬쩍 힘을 빼 대검을 뒤로 물려 힘 싸움을 끝냈다. 그리곤 그 반동으로 상체가 허물어진 민성을 맹렬하게 몰아붙였다.
“못 들었어? 열쇠가 우선이라는데?”
민성은 둔탁해 보이면서도 사납게 몰아치는 검세를 힘겹게 받아내며 짐짓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예전보다 더 무거워진 듯한 검의 무게에 조금씩 눌려가고 있었다.
‘몸 상태만 멀쩡했어도 충분히 받아낼 만했을 텐데.’
민성은 아쉬움에 혀를 차며 일 검, 일 검을 힘겹게 받아냈다.
“사지 잘려도 입만 붙어 있으면 되는 거 아냐!”
“미친 새끼.”
민성은 입술을 씰룩거리면서 목젖까지 치달은 대검을 힘겹게 받아쳤다.
챙-
‘아오. 이런 생각 없는 자식이 상대하기 제일 까다로운데.’
대화도 상대방이 어느 정도 격식을 갖추고 있어야만 통하는 법이다. 하물며 멧돼지 같은 놈에게 이성적인 대화가 먹힐 리 없었다. 더욱이 우천의 동료인 여인들도 우두커니 서서 관전할 뿐, 딱히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고로 대화란 검으로 나누는 거지. 계집마냥 입으로 모든 걸 판단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아. 네놈도 그렇지?”
“이놈이나 저놈이나 개소리하는 건 똑같네. 중요한 물건 확보를 이런 얼간이들한테 맡기다니. 혈교도 어지간히 인력이 부족한가 봐?”
민성은 우천이 휘두른 육중한 검날을 피해내며 바삐 입을 놀렸다.
“아무래도 좋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 될 뿐. 으랴!”
그러나 이미 전투에 돌입한 우천에겐 어떠한 도발도 먹히지 않았다.
‘아오. 뇌가 금속으로 돼 있나. 이런 무식한 새…. 잠깐. 아니지! 오히려 잘만 하면 이 무식한 놈한테서 정보 빼내기가 더 쉬울지도 모르겠어.’
거친 공세를 막아내는 데 급급하던 민성은 눈을 빛내며 우천을 쳐다봤다.
“그거 알아? 사실 난 열쇠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어.”
“뭣이?”
갑작스러운 민성의 고백에 당황한 우천은 몸을 움찔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민성은 우천 앞으로 쇄도하여 힘차게 대검을 휘둘렀다.
“큭….”
허리를 양단할 육중한 검날이 근접해오자 우천은 대검을 세워 공격을 막아내고자 했다. 허나 한 발 늦은 판단은 깊지 않으나 기다란 상처를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