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
248화 - 사계의 열쇠 (1)
“이제 어쩔 계획?”
신의 물음에 민성은 슬며시 눈가를 긁적였다. 퀘스트도, 이종범과의 거래도 끝났다. 이제 정부 쪽에서 사람을 보내 생존자들을 구제하고 발전소를 정상화시킬 것이다. 그들이 할 일은 없다.
“더 볼일도 없으니 돌아가야지. 당분간은 좀 쉬면서….”
스르르륵-
민성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느닷없이 발전소를 덮고 있던 흉측한 살점들이 먼지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어어어?”
“이게 무슨….”
옷가지를 찾아 헤매거나 슬픔 혹은 생존의 환의를 만끽하던 생존자들은 당황하여 소리치기 시작했다.
“왜 이러는지 알아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민성은 천천히 대검을 빼들며 옆에서 떠다니던 티노에게 물었다.
“집 주인이 죽었으니 집이 무너지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아, 그러네요.”
민성은 나지막이 수긍하며 점차 모습이 사라져가는 둥지를 응시했다. 그리곤 발전소를 덮고 있던 모든 살덩이들이 사라지기 직전 신들에게 손짓했다.
“귀찮아지기 전에 돌아가자.”
모든 이목이 살덩이에 쏠렸으니 빠져 나가기도 좋은 상황이었다.
“유령출몰,”
민성의 속삭임에 투명화된 민성들은 서둘러 발전소를 빠져나갔다.
*
뚜벅-
“크록!”
“이제 남아 있는 녀석들은 없겠지?”
아루는 임무를 다한 크로스를 되돌려 보내며 넌지시 민성들에게 물었다. 발전소를 나오는 도중, 집주인이 죽었음에도 남아 있던 세입자들을 본 그녀가 처리하자는 의견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있어도 서비스 충분.”
“고생들 했어. 얼른 돌아가서 쉬자.”
신의 단호한 대답에 민성은 피식 웃으며 출구 방향을 가리켰다. 싸늘하지만 청량한 바람이 출구에서 불어왔다. 민성들은 서둘러 출구를 향해 나아갔다.
“와아아! 와아아아!”
“무슨 일….”
신이 나 가장 먼저 발전소를 빠져나온 아루는 눈앞의 광경에 탄성을 연발했다. 뒤따라 나오던 신도, 민성도 말을 잊고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번쩍-
발전소 주변에 조성돼있던 가로등에서 은은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흔한 일상의 한 장면이라 여길 법했지만, 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남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괴수가 등장한 이래 현대 문명의 산물도 발자취를 감추다시피 한 것이 그 이유였다.
“예쁘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아루의 중얼거림에 민성들은 동의하듯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미 어둑해진 지천을 밝히기엔 한없이 작고 초라한 빛이었지만 민성들에겐 감동 그 이상의 감정을 안겼다. 잃어버렸던 빛은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의 아름다움보다 눈부셔 보였다.
‘이런 기분도 나쁘진 않네.’
민성은 가로등 불을 지그시 응시하며 미소 지었다. 비록 필요에 의해 이종범과 거래했지만, 그 역시 문명의 이기를 누리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지금 상황이 싫을 리 없었다.
저벅-
민성들이 불빛의 밝음을 만끽하는 와중, 빛 너머 어둠 속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민성들은 반사적으로 전투할 채비를 갖췄다.
“얼룩덜룩한 인간들이다, 인간.”
“군인들이야.”
티노의 전언을 들은 민성이 대검을 내리자, 아루와 신도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곧 어둠 속에서 일개 중대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알고 마중 나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선두에 위치한 군인을 알아본 민성은 등에 검을 이곤 빙긋 웃음 지으며 중대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중대장은 침묵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알싸한 침묵이 빛을 뚫고 그들의 언저리를 배회했다.
‘뭐지?’
민성은 마른침을 삼키며 침묵으로 일관하는 군인들을 노려봤다. 환대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호의 정도는 보일 줄 알았다. 허나 예상과 어긋난 반응에 민성은 조심스레 검자루로 손을 뻗었다.
‘설마 이종범 그 자식 짓인가? 아냐. 아직 놈들이 나랑 척을 지려 할 이유가 없어. 그럼 대체 뭐지?’
서로 이해득실이 맞는 이상 정부 쪽에서 먼저 뒤통수 칠 확률은 적다. 그럼 제3세력 군을 움직였다는 소리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다 할 조직이 떠오르지 않았다.
“전원!”
중대장이 손을 펴 공중으로 쳐들기 무섭게 후열에 위치한 군인들이 총부리에 손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런, 시발.’
다급히 대검을 빼든 민성이 군인들을 향해 돌격하려는 그때,
“국가와 국민의 안보를 위하여 헌신하신 구국 영웅께 대하여 세워 총!”
“충! 성!”
중대장의 구호에 맞춰 군인들은 소총을 가슴팍으로 올리며 우렁차게 경례했다. 민성은 몰랐다. 군인들이 총기를 파지하고 있을 경우, 손이 아닌 총을 이용하여 경례한다는 것을 말이다.
“…충성.”
민성은 대검을 발치 앞에 박아놓곤, 근엄하게 손을 들어 오른쪽 눈썹 옆으로 갖다 댔다.
척-
“어깨 총!”
민성이 손을 내리자, 중대장의 구령에 따라 병력들은 절도 있게 어깨에 소총을 멨다.
“쉬어!”
“이거 너무 갑작스러워서 좀 놀랐습니다. 이렇게 마중까지 나오실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병력을 통제하던 중대장이 앞으로 걸어오자 민성은 짐짓 놀랐다는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아닙니다. 당연한 절차이자 오히려 이런 것밖에 대접하지 못해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가져와!”
중대장의 명령에 병사 하나가 양철 주전자와 종이컵 하나를 들고 달려왔다. 주전자는 따듯하게 데워져 있는지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쪼르륵-
중대장은 커피 믹스가 담긴 종이컵에 물을 붓고 정성스럽게 휘저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민성에게 내밀었다.
“저는 당신이 이 커피가 식기 전에 돌아오리라 믿었습니다.”
“….”
‘사회생활 엄청 잘하네.’
말을 잃은 민성은 종이컵을 우두커니 내려다봤다. 분명 죽음의 선을 넘기 전, 농담 삼아 그런 말을 하긴 했다. 다만 낮을 지나 이미 밤이 된 탓에, 식어도 한참 전에 식었을 커피를 이런 식으로 받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준비한 멘트부터 행동까지 뭐 하나 모난 것이 없었다.
“잘 받도록 하겠습니다.”
민성은 종이컵을 건네받곤 가장자리에 입을 댔다. 달짝지근하면서도 쌉싸래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민성이 종이컵을 구겨 던지자, 명호는 민성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일단 상부에 죽음의 선이 사라졌다고 보고는 했지만…. 아무래도 조금 더 정확한 정보를 들을 수 있다면 저희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미 선 안으로 진입하셨으니 아시겠지만 선의 주체가 되는 괴수 아크네는 저희 쪽에서 죽였습니다.”
“오오오! 그렇습니까?”
민성이 선심 쓰듯 말하자, 중대장은 뛸 듯이 기뻐하며 당장이라도 발전소 안으로 진입하고 싶어 하는 기색을 보였다.
“혹시 그 외에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까?”
“음….”
아크네의 목을 따고 동료의 안전 확보. 그 외에는 관심 없던 민성이 알 리 없었다.
“그건 잘 모르겠군요. 잔 괴수들도 좀 청소했으니 별 무리 없이 진입하실 수 있을 겁니다.”
민성은 머쓱하게 웃으며 그들이 나왔던 출구를 가리켰다.
“알겠습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저희가 확실히 처리하겠습니다! 전열 갖춰! 바로 안으로….”
중대장은 바짝 군기든 손을 들어 민성에게 경례했다. 그리곤 등 돌려 진열해 있는 병력들을 향해 소리치는 와중,
쇄액-
“음?”
“어어?”
공기를 가르는 미세한 소리를 감지한 민성은 반사적으로 중대장의 뒷덜미를 잡고 뒤로 몸을 날렸다. 민성이 자리를 이탈하기 무섭게 흙빛 단검이 날아와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꽂혔다.
촤아악-
단검이 꽂힌 자리에선 굵고 길쭉한 가시덩굴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덩굴은 부지불식간에 일대를 덮을 정도로 거대하게 자라났다.
“피… 피해!”
“미친! 시발, 이게 뭐야!”
미처 피하지 못한 병사들은 비명 지르며 덩굴 지옥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덩굴의 확장 속도는 그들의 달리기 속도를 상회했다. 덩굴은 매섭게 뻗어나가 도주하는 병력들을 덮쳤다. 그리곤 포획한 먹잇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들을 옥죄었다.
콰드득-
“끄어어어억!”
칼날처럼 날카로운 덩굴에 감긴 병사들은 분쇄기에 들어간 영수증처럼 조각났다. 조각난 살덩이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철퍽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살점에 묻은 얼룩덜룩한 군복자락이 그들이 살아있었음을 알렸다.
“이게 대체…. 대체 무슨 일이….”
얼빠진 얼굴로 멍하니 병사들의 죽음을 지켜보던 중대장은 헛소리를 연발하며 현장으로 달려가려 했다.
“지금 가면 죽습니다.”
“…혹시 실수로 놓치신 것 아닙니까?”
“아뇨. 확실히 죽였습니다.”
중대장의 붉어진 눈시울을 대면한 민성은 고개를 저으며, 미연의 사태를 대비하여 그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그리곤 단검이 날아왔던 암흑 속을 노려봤다. 과거 한 차례 접한 적 있는 스킬. 그랬기에 민성은 기습을 가한 인물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기습 실패했으면 더 수작 부릴 생각 하지 말고 나와.”
민성이 어둠을 향하여 소리치자, 가로등 빛을 받으며 한 무리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각각 채찍과 단검을 든 여인 둘과, 대검을 어깨에 꼬나 메고 있는 남자 하나. 그리고 그 뒤로는 검은 무복을 입은 괴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날랜 건 여전하군요. 선생님은 놀랐답니다?”
그중 자하가 반갑다는 듯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걸음에 따라 가슴을 따라 깊게 파인 골짜기가 좌우로 흔들거렸다.
“애새끼도 아니고 선생 놀이 하는 거, 쪽팔리지도 않아?”
민성은 냉소하며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였다.
‘젠장. 하필 이럴 때 올 줄은 몰랐는데.’
그러나 여유로운 겉모습과 달리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전력으로 붙어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는 상대들이건만, 앞선 전투 때문에 모든 것이 온전치 않은 상태다. 더욱이 신과 아루도 함께하는 상황. 전투만은 반드시 피해야 했지만 저들이 그렇게 놔둘지 의문이었다.
“걸레를 문 듯 입이 더러운 것도 여전하구나.”
“너만 하겠어?”
민성은 자하의 빈정거림에 차분히 반박하며 시선을 좌우로 돌려 퇴로를 확보하고자 했다. 하지만 벌판이나 다름없는 이곳에 문이 존재할 리 없었다.
“뭘 시답잖은 대화질이야? 빨리 열쇠만 털어내고 죽이면 되지.”
그들의 대화에 답답함을 느낀 남자는 곧장 대검을 들고 민성에게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기다란 채찍이 날아와 우천의 발목을 조여 왔다.
“뭐 하는 짓이야?”
“멍청하긴. 생각이란 걸 좀 하고 움직여. 그냥 죽여버리면 열쇠를 못 얻잖아. 일단 열쇠 확보가 먼저야. 이번에도 멋대로 행동하면 그땐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거야. 알겠어?”
여인은 매몰차게 우천을 몰아붙이며 채찍을 풀었다. 무엇보다 우선순위는 열쇠의 확보다. 만약 그냥 민성을 죽일 경우, 열쇠는 영원히 민성의 아이템 창에 갇혀 죽음 속에 잠길 확률이 높았다. 백야님의 질책은 듣고 싶지 않다.
“그럼 죽기 직전까지만 패면 되는 거 아냐?”
“등신 새끼.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어. 자하. 내가 이 새끼 잡고 있는 동안 열쇠에 대해 물어보세요.”
여인의 말에 자하는 고개를 끄덕이곤 민성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