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7
247화 - 매듭지어진 사투 (2)
색색-
“크흠.”
가슴이 위아래로 들썩이는 걸 봐선 무사한 듯했다. 허나 눈 둘 곳이 없어 민성은 헛기침하며 잽싸게 옷가지를 펼쳐 그녀의 몸을 가렸다.
“인간 본연 모습. 부끄러울 필요 없다.”
“그러지 말고 너도 얼른 입어. 아, 그리고 잠깐 아루 좀 부탁하고 싶은데.”
아루까지 무사하단 걸 확인했으니 서둘러 일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신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성은 축 늘어진 뱀 여인의 시체 앞으로 다가갔다. 부하 격인 브란과 브론도 아이템을 뱉었건만 하물며 대장 격인 아크네도 아이템을 뱉을 확률이 높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뭐 나온 것 좀 없나?’
민성은 시체를 뒤적이며 주변 바닥도 유심히 살폈다.
‘진짜? 아무것도 없다고?’
허나 배를 갈라 안을 살펴보고 바닥을 샅샅이 훑어봐도 이렇다 할 아이템은 보이지 않았다. 민성이 실망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인간! 여기! 이 부분을 갈라봐라!”
시체를 관통하여 속을 배회하던 티노가 아크네의 가슴 사이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곤 소리쳤다.
“뭐 있어요?”
“번쩍이는 돌이 있다! 빨리 열어봐라!”
티노가 자리를 내주며 보채자, 민성은 고개를 끄덕이곤 대검으로 조심스럽게 아크네의 가슴팍을 절개해 나갔다.
“호오. 이건….”
살 사이에서 여덟 가지 색을 지닌 보석을 끄집어낸 민성은 곧장 정보를 살폈다.
[융합된 원소의 집결체]
등급: ★★★★★★
설명: 그간 아크네가 흡수하고 남은 에너지가 체내에 응집되어 만들어진 에너지 덩어리다.
효과: 사용 시 보유한 펫 중 한 마리의 능력을 한 단계 끌어올려준다.
횟수제한: 1/1
“뭐야. 그러니까 펫 전용 아이템이라는 소리잖아. 소환, 차원용 그란칼.”
뭔가 대단할 것 같은 외관과 달리 별 볼 일 없는 능력에 민성은 혀를 차며 작게 중얼거렸다.
“킥! 킥!”
그러자 으레 붉은 용이 튀어나와 커다랗게 하품했다.
“전보다 좀 커진 것 같다, 인간.”
티노의 말대로 주먹만 했던 처음과 달리 그란칼의 몸은 대형견만큼 자라 있었다.
“주인이 잘 먹였으니까요?”
민성은 피식 웃으며 원소 집결체를 들어 그란칼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킥! 킥! 킥!”
“알았어. 줄 테니까 그만 좀 보채.”
그란칼이 날개를 펴 무릎을 잡고 흔들자, 민성은 용의 입에 집결체를 들이밀었다.
“킥!”
그란칼은 개껌을 앞에 둔 개처럼 냉큼 집결체를 받아 삼켰다.
“킥?”
띠링-
[축하드립니다. 보유하신 펫 그란칼이 성장요건을 모두 충족하여 2차 성장에 접어듭니다.]
“무슨….”
갑자기 그란칼의 몸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흘러나오자, 민성은 그 눈부심에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다행히 빛이 금세 가라앉자, 민성은 슬며시 팔을 내리곤 한층 더 성장했을 그란칼을 응시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민성 앞에는 갖가지 색으로 물들어 있는 둥근 알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흔히 진화라 함은 기존보다 더 발전하고 나아지는 것을 의미하건만, 오히려 퇴화한 것 같은 그란칼의 모습에 민성은 어처구니없어 소리 질렀다.
“인간. 혹시 착각해서 진화가 아니라 퇴화시킨 것 아닌가?”
“그럴 리가 있겠어요!”
티노가 미심쩍게 바라보자, 민성은 억울함을 토로하며 알로 변한 그란칼의 정보를 확인하고자 했다.
‘대체 이게 뭔 일이야!’
개고생해서 얻은 아이템을 줬더니 퇴화를 한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원용 그란칼]
등급: ★★★★★★
설명: 차원과 차원을 넘나들며 파괴와 살육을 일삼던 태초의 종족. 그들로 인해 골머리를 썩이던 신들은 결국 종족을 멸망시키기에 이른다. 하지만 오늘, 탐욕과 오만의 표상인 차원 용족의 핏줄이 다시 태동하기 시작한다.
친밀도: 30
보유능력: 적절한 수면, 게걸스럽게 먹기, 가냘픈 날갯짓.
HP: 120
MP: 360
스텟:
체력: 6
근력: 2
민첩: 1
지능: 21
지력: 18
행운: 10
성장단계: 1/3
현재 단계: 2차 성장 진행 중.
진화 종료까지 남은 시간: 30년
민성이 알에 손을 갖다 대자 그란칼의 정보가 눈앞에 주르륵 나열됐다.
‘그래. 퇴화할 리가 없지. 그나저나… 30년? 장난해? 30년이라고?’
2차 성장 진행 중이라는 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민성은 하단의 진화 종료까지 남은 시간을 보곤 거품을 물었다. 30년이라는 긴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띠링-
[21,900,000코인으로 그란칼을 바로 성장시키실 수 있습니다.]
[코인이 부족합니다. 10,950루비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단축하시겠습니까?]
[루비가 8,950개 부족합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어.”
민성은 작게 탄식하며 연달아 나타난 메시지 창을 닫았다. 시간은 언제든 단축할 수 있다. 다만 호주머니 속 루비가 넘쳐날 경우에만 말이다.
‘또 루비 모으러 뺑뺑이 돌아야겠네. 저런 타입이 또 있지 말란 법이 없으니까.’
민성은 알로 변한 그란칼을 아이템 창에 넣곤, 아크네의 시체를 흘낏 쳐다봤다. 상대하기 상당히 까다로운 적이었던 만큼 이번 전투로 느낀바가 많았다.
‘단기전은 몰라도 이번처럼 연달아 전투가 발생하면 힘들어져. 거기다 앞으로 상태이상 같은 것도 신경 써야 하고. 후….’
넓은 시야로 봤을 때, 아크네처럼 다양한 상태이상으로 무장한 적이 등장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지금까지야 불굴의 의지로 어떻게든 버텨내긴 했지만 앞날을 생각하면 그 이상의 방패가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루비의 추가보급은 불가결한 상황. 퀘스트도, 이종범과의 계약도 달성했으니 당분간은 루비 수집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꺄아아아악!”
갑작스러운 비명에 민성은 생각을 멈추곤 고개를 돌렸다.
“변태야? 왜 옷을 벗고 있는 거야!”
“인간 태초의 모습. 부끄러울 이유 없다.”
정신을 차린 아루가 옷가지로 몸을 가린 채, 알몸 상태의 신에게 삿대질하고 있었다. 허나 신은 으레 무표정한 얼굴로 부축하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입어!”
“쯧쯧…. 저럴 줄 알았지.”
그 광경에 민성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으며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일어났어? 몸은 좀 어때?”
“…어?”
민성이 어색한 미소와 함께 나타나자, 아루는 몸을 가리는 것도 잊고 멍하니 민성을 쳐다봤다. 마치 네가 왜 여기에 있냐고 묻는 표정이었다.
“구하러 왔지.”
민성은 겸연쩍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아루의 알몸은 둘째 치고, 구출하는 와중 자칫 그녀의 목숨을 앗아갈 뻔한 탓에 시선을 마주치기 껄끄러웠다.
“네가 알몸인 이유.”
민성의 표정이 묘하게 어둡다는 것을 눈치챈 신은 잽싸게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알았으니까! 입어! 고개도 돌리고!”
아루의 고함에 신과 민성은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멋대로 와서 미안해.”
단출한 청바지와 파카를 입은 아루는 허리 굽혀 민성에게 사과했다.
“속았다곤 해도 우리 잘못. 나도 사과한다.”
마지못해 옷을 입은 신도 아루를 따라 허리를 굽혔다. 그 모습에 민성은 고개를 저으며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다들 무사하니까 괜찮아. 어차피 언젠간 처리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민성은 끝말을 흘리며 미소 지었다. 만약 그가 당장 아크네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녀는 끝없이 둥지를 확장하여 영역을 넓혔을 것이다. 그럼 언제고 정부 측에서 의뢰가 날아왔을 거고, 민성은 더 강해진 아크네를 상대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보다 양궁부원들도 같이 왔다고 하지 않았어?”
“왔다.”
민성이 어색함을 지우고자 화제를 돌리자, 신은 말없이 손가락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태민아…. 눈 좀 떠봐, 태민아…. 응? 제발….”
“살아 있을 거야…. 그럼, 우리 보라가 이런 곳에서 죽을 리 없잖아? 응?”
신의 손가락 끝에는 점토가 벗겨진 가족의 시체를 붙잡고 울부짖거나, 혹시 모를 희망을 갖고 시체 밭 사이를 배회하는 생존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사후경직이 시작된 시체들 중에는 그리 낯설지 않은 얼굴들도 보였다.
“살아 있는 애들은 없었어?”
“이미 한 바퀴 돌았다. 전멸.”
민성이 시체들을 살피며 담담한 목소리로 묻자, 신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래?”
민성은 자조 섞인 미소를 흘리며 조용히 수긍했다. 아무리 점토가 되어 그를 위협했다 한들 한때나마 한솥밥 먹던 이들이었기에 씁쓸함은 더했다.
“어쩔 수 없는 일. 무력 전부인 세상. 그들도 각오. 네 이득이 우선. 항상 염두.”
“그래. 그렇지.”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전부 살릴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잖아. 이제 와서 미안함 같은 건 느낄 필요 없어.’
신의 무미건조한 위로에 민성은 천천히 머리를 까딱이며 자꾸 감겨드는 눈을 끔뻑였다. 괜한 죄책감 탓인지 잊고 있었던 피로감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러왔다. 의식하지 않았다면 진작 혼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무리. 쉬는 것 추천.”
민성이 몸을 비틀거리자, 신은 그의 어깨를 부축하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하지만 민성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쉬기엔 좀 이르지.”
민성은 신의 팔을 조심스레 밀어내곤 슬픔과 기쁨이 섞인 현장으로 다가갔다.
“여기 혹시 발전소 관계자 계십니까?”
민성이 소리치자, 현장에 있던 모든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저…. 제가 여기 관리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강아지 털갈이 하듯 점토를 벗겨내던 사람들 중 몇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래요?”
민성이 와보라는 듯 손을 까딱이자, 관리인 몇이 헐레벌떡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무,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민성의 등에 달린 커다란 대검을 의식한 탓일까. 관리인들은 한가득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민성을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이곳. 다시 재가동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관리인들 중 한 명이 서둘러 살덩이에 덮인 기계장치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이것저것 매만지더니 민성들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정상화시키는 건 어렵습니다만 예비 전력이 남아 있어 잠시간은 활성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다시 불 들어온 도시를 볼 수 있는 건가?’
“그래요? 다행입니다. 아, 전 아무래도 비전문가라서, 나머지는 여러분들께 맡기겠습니다.”
긍정적인 응답에 민성이 허리를 살짝 숙여 보이곤 등을 돌리자, 관리인 중 하나가 화급히 민성의 어깨를 붙잡곤 울상 지었다.
“자… 잠시만요! 혹시라도 괴수 놈들이 더 나타나면….”
“머리를 쳤으니 괜찮을 겁니다.”
민성은 가슴이 활짝 열린 아크네의 시체를 가리키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정말입니까? 정말이겠죠?”
“사실입니다. 또한 군 병력이 인접해 있으니 곧바로 파견토록 하겠습니다.”
민성이 당당하게 설파하자 관리인들은 그제야 안도한 듯 민성의 어깨를 놓았다. 그리곤 기계를 조작중인 동료를 도우러 허겁지겁 달려갔다.
위이이잉-
이윽고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부화장 안을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