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
245화 - 아크네의 둥지 내부 (7)
‘설마 눈에 닿으면 무조건 얼어버리는 건가? 아니면 특정한 조건이 있는 건가?
만약 전자가 확실하다면 민성으로선 난감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놓인 것과 다름이 없었다. 아무리 불굴의 의지가 있다곤 하나 매번 저주를 튕겨낼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민성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민하게 움직여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눈발을 피하며 상황을 주시했다.
화악-
아크네 주변을 감싸던 하얀 눈발이 바람에 부대낀 민들레 씨앗처럼 부화장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이건 또 뭔데! 으아아아아….”
눈송이는 대지에 뿌리 내리는 새싹처럼 생존자들의 몸에 내려앉아 눈꽃을 피워냈다. 눈꽃의 거름이 된 생존자의 몸은 차갑게 얼어버렸지만 말이다.
“꺄아아아아아악!”
“무슨…. 미친! 닿으면 얼어버린다! 피해!”
“도망쳐! 아까 그 동굴로 도망쳐! 거기라면 눈발이 닿지 않을 거야!”
민성이 아크네를 몰아붙일 때만 해도 한 줄기 희망을 품었던 생존자들은 아우성 지르며 황급히 부화장 안을 빠져나가고자 했다.
휘이이잉-
갑자기 아크네를 감싸고 있던 눈발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더니 도주하던 생존자들을 덮쳤다.
“으어어어….”
“안 돼! 싫어! 싫….”
눈발에 닿은 생존자들의 몸은 반투명한 얼음에 갇혀 곧 움직임을 멈췄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이러니 내가 이길 수가 없었지….”
민성은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아크네를 노려봤다. 초록빛을 머금고 있던 뱀의 하반신뿐만 아니라 나신이었던 상체도 눈발처럼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설산 속에 둥지를 튼 백사 같았다.
“인간. 큰일 난 것 같다. 방심은 금물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아까 어떻게든 죽였어야 했다.”
“…그러게요.”
민성은 딱딱하게 굳은 미소를 지으며 티노의 말에 동의했다. 방심한 건 아니었지만 저년을 너무 과소평가한 모양이다.
“세상사 참 재밌어. 날 죽이려 했던 놈의 능력으로 구원도 받고. 그렇지 않아?”
“….”
찌릿-
민성은 입을 꾹 다물고 여인을 노려봤다. 한기 탓인지 몰라도 피부가 오싹오싹 저려왔다. 아크네의 얼굴에선 아까까지 승자의 처우를 기다리던 패자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내가 묻잖아. 물었으면 대답을 해야지. 심판의 길!”
콰드득-
고혹적으로 입술을 훑던 아크네가 소리치자, 바닥에서 거대하고 날카로운 얼음 기둥이 연이어 솟구쳐 민성에게 엄습해왔다.
“피해라, 인간!”
“이쯤이야 가볍게 피하죠.”
티노의 경고에 민성은 다리에 힘을 주어 허공으로 도약했다. 민성이 피하기 무섭게 얼음 기둥이 그가 서 있던 자리를 뚫고 올라왔다.
“그보다 저년을 어떻게 죽일지가 문제인데….”
“인간! 아직이다!”
콰드득-
허공에서 한 바퀴 회전 후 지면으로 내려오던 민성은 재차 그를 노리고 솟구치는 얼음 기둥을 보곤 경악했다.
‘허…. 미쳤네. 유도 기능까지 있다고?’
분명 벽까지 솟구친 것을 마지막으로 사라진 줄 알았건만, 어느새 그의 코앞까지 되돌아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콰드득-
“이런, 시발!
민성은 고함치며 대검을 휘둘러 발밑에서 올라오는 얼음 기둥을 겨우 갈라냈다. 그리곤 떨어져 나온 파편을 디딤돌 삼아 밟곤, 추진력을 이용하여 아크네에게 돌진했다.
“이제 좀 뒈져! 광전사의 외침!”
크아앙-
민성의 입에서 거친 고함이 터져 나오자, 아크네는 스킬의 영향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끝이다! 죽어!”
민성은 그 틈을 이용하여 대검에 힘을 싣곤 그녀의 가슴팍을 향해 대검을 쑤셔 박으려 했다. 하지만 대검이 그녀의 가슴팍에 닿으려는 찰나,
“프로스트 아머.”
챙-
아크네는 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녀의 몸 주변으로 얼음 알갱이들이 뭉친 것 같은 얼음 방패가 나타나 대검을 막아냈다.
“파멸의 시선!”
“이런, 시….”
아크네가 스킬을 발동하려 하자, 민성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체인 프로스트!”
허나 눈을 감은 탓에 모든 것을 돌로 만드는 시선 너머로 날아오는 거대한 얼음 구체는 보지 못했다.
“인간! 피해라!”
“예?”
다급한 외침에 민성은 저도 모르게 눈을 슬쩍 뜨고 말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노란 눈동자였다.
사아아아아악-
노란 눈동자 속에 축소된 검은 그것을 마주한 순간, 전신이 빳빳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 딱딱하게 돌로 변하여 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상태이상 ‘석화’에 걸리셨습니다. 불굴의 의지가 발동합니다. 50% 확률로 저주에 저항합니다.]
[저항에 실패하셨습니다.]
“이런….”
저주는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팔을 덮어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쇄애액-
“젠장…. 커헉!”
뒤늦게 날아온 커다란 얼음 구체에 복부를 정타로 가격당한 민성은 반동에 멀리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인간!”
티노는 안타깝게 민성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황급히 벽으로 날아갔다.
“쿨럭….”
민성의 꼴은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구체에 맞은 복부는 움푹 파여 안으로 들어가 있었고, 충격이 컸는지 입에선 뜨끈한 피가 줄줄 새어나왔다. 저항까지 실패한 건지 몸은 돌과 얼음에 휘감기고 있었다.
“정신 차려라, 인간! 정신 차려!”
티노는 꼬리를 들어 민성의 뺨을 연달아 가격했다.
“…퉤! 안 죽었어요. 괜찮으니까 그만 때려요.”
팔은 이미 굳어버린 탓에, 민성은 죽은피를 뱉으며 고개를 흔들어 파리 쫓아내듯 티노의 꼬리를 밀어냈다.
“정말 괜찮은 거냐?”
‘괜찮을 리 있겠냐. 후…. 이렇게 몰릴 줄은 몰랐는데.’
방금 타격으로 갈비뼈가 몇 대 나갔는지 숨조차 제대로 내쉬기 힘들었다. 더욱이 저주에 걸려 몸까지 말을 듣지 않는 상황. 괜찮을 리 없었다.
“괜찮아요. 걱정 말아요.”
민성은 고통에 눈가를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아예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팼어야 했는데.’
방심하지 않았다곤 했지만 이 사달이 난 건 결국 그도 모르게 방심한 탓이 컸다. 목을 완전히 잘라냈어야 했다. 놈의 숨이 멎은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 손을 멈추지 말았어야 했다.
스륵-
“아까완 완전히 정반대 상황이 됐네? 아니, 오히려 더 심한가?”
민성은 느긋하게 뱀의 하반신을 놀려 바닥을 기어오는 여인을 노려봤다.
“정반대? 누가 보면 벌써 죽은 줄 알겠어? 쿨럭….”
민성은 재차 피를 토해내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네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올까?”
아크네는 얼음 옥좌에 앉아 죽어가는 민성의 모습을 감상했다. 석화와 빙결은 서로 앞 다투어 민성의 몸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아직 민성이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피마저도 얼음에 닿아 싸늘히 식어갔다.
“네 얼굴만 하겠어?”
민성은 점점 희미해져가는 생의 끈을 겨우 유지하며 이죽거렸다. 그러나 여유로운 모습과 달리 저주는 빠른 속도로 잠식하여 목 부근까지 올라왔다.
콰드득-
‘여기서 죽을 순 없어. 방도가 없을까. 방도가….’
저주가 목을 넘어 얼굴을 덮었지만 민성은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생각을 멈추는 순간 죽는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래! 그거라면….’
“네 몸은 특별히 잘 써주도록 할게. 영광으로 생각해.”
“그게… 마지막 유언이냐?”
“유언? 호호호호. 재밌네.”
아크네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민성을 응시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여유를 부리다니. 배짱이 넘치는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많이… 웃어둬…. 성자의 기적.”
민성이 반쯤 얼어붙은 입술을 힘겹게 달싹거렸다. 그러자, 민성의 몸에서 찬란한 광채가 새어나오기 시작하더니, 곧 부화장 전체를 채워나갔다.
“무슨….”
갑작스러운 빛에 아크네는 손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손 사이로 하얀 옷과 날개 같은 것이 언뜻 보였다.
“이 벌레 새끼가 또 무슨 짓거리를 하려고! 프로즌….”
쇄애액-
아크네가 다급히 스킬을 쓰려는 찰나, 빛 사이로 드러난 길고 거무튀튀한 물체가 빠르게 쇄도하여 그녀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치이익-
“뭔…. 키야아아악!”
가슴에서 피어오른 고통이 몸 전체를 관통하자, 아크네는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꿈틀거렸다.
“내가 뭐랬어. 마지막 유언이냐고 물었지?”
“이놈!”
빛 너머로 오싹한 음성이 들려오자, 아크네는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급히 창을 던졌다.
“잘 보고 던져도 안 맞는데, 그걸 맞겠어?”
푸확-
냉랭한 음성은 그녀의 머리 위에서 조용히 울렸다. 그와 동시에 아크네의 가슴에 박혀 있던 대검이 뽑혀 나갔다.
“캬아아아악! 무슨 짓을 한 거냐!”
검날에 얽혀 있던 살과 내장이 딸려나가자, 아크네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괴성을 질러댔다. 허나 그녀의 비명에도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되레 목과 심장 부근 등 곳곳에 대검이 박혀들었다.
뭐가 잘못된 거지?
분명 놈은 죽어가고 있었다. 대항할 힘도 잃고 그저 하루살이처럼 남은 찰나의 인생을 누리는 것. 놈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빛과 함께 상황은 역전됐다. 그녀는 도무지 지금 상황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
대검에 난도질당한 몸에선 체액이 스멀스멀 새어나왔다. 남아 있던 마나는 놈의 스킬에 전부 타버렸다.
“아까완 완전히 정반대 상황이 됐네? 아니, 오히려 더 심한가?”
이윽고 빛이 사라지자 바닥에 엎어져 있던 아크네는 힘없이 고개를 쳐들었다. 민성의 모습이 뚜렷이 보였다. 상처도, 저주에 걸린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이 벌레 새끼가…. 이 벌레 새끼가!”
민성이 그녀가 뱉었던 말을 고대로 돌려주자, 아크네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고성 지르며 민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지막 발악도 추하네. 잘 가.”
“자, 잠깐! 잠깐만요!”
민성이 대검을 쳐들자, 아크네는 황급히 민성 앞에 머리를 처박곤 구슬프게 소리쳤다.
“그, 그럼 거래! 그래! 거래를 하자! 날 죽이면 저주는 풀리지 않아!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고! 인간들을 다시 되돌리고 싶지 않아?”
아크네는 얼음상과 석상이 된 인간들을 가리켰다.
“저주?”
“그래! 저주! 아직 저 벌레…. 인간들은 죽지 않았어! 내가 손을 쓴다면 살 수 있어. 하지만 날 죽이면….”
민성이 반응을 보이자, 희망을 얻은 아크네는 서둘러 말을 이어갔다.
“죽는다고?”
민성은 냉랭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어쭙잖은 인정을 빌미로 제 목숨을 보전하려는 모습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맞아! 생각해봐! 저 인간들도 누군가에겐 상당히 중요한 인간들이었겠지. 살리고 싶지 않아? 날 살려준다면 풀어줄게! 약속….”
푸확-
“어?”
갑자기 시야가 좌우로 뒤집어지자 아크네는 당황하여 소리쳤다. 그것이 그녀가 이승에서 뱉은 마지막 외침이었다.
“믿을 놈을 믿어야지. 개소리하고 있어.”
민성은 작게 중얼거리며 몸에서 떨어져나간 여인의 머리를 응시했다. 부릅뜬 노란 눈동자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좌우로 데구르르 구르더니 곧 정지했다. 그와 동시에 여러 개의 메시지가 민성의 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