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
244화 - 아크네의 둥지 내부 (6)
속삭임이 끝나기 무섭게 민성의 모습은 물에 녹은 솜사탕처럼 바탕에 녹아들었다.
“크르르….”
표적을 잃은 점토들은 물에 녹은 솜사탕 찾는 라쿤같이 민성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민성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크륵?”
목에서 따끔한 느낌이 들자, 점토는 손을 들어 목을 어루만졌다. 목에 기다란 실선이 생겨있었다.
푸확-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무섭게 몸 안에 갇혀 있던 액체가 개방된 댐에서 물이 터져 나오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크럭?”
“크악!”
목 위로 그어진 실선은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점토들 사이로 퍼져갔고, 몸을 잃은 수십 개의 머리통이 바닥을 뒹굴었다.
“이건 무슨….”
난데없는 이변에 아크네는 창대를 꽉 움켜잡곤 기습을 경계했다. 그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점토의 목을 날렸을 땐, 그저 약점을 보이기 싫어 강수를 뒀다 생각했다. 허나 그건 그녀의 착각인 모양이었다.
“크어어억!”
그녀가 숨 한 번 들이키기 무섭게 또 열댓에 가까운 머리통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지금 네가 죽이고 있는 것들, 전부 인간들이라고! 네놈은 동족을 죽이면서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거냐!”
생에서 사로 돌아선 점토들이 과반수를 넘어가자 아크네는 학살의 장을 노려보며 고성을 질렀다. 지금은 점토들이 표적이 되어 죽어나가고 있지만, 저것들이 모두 죽으면 그 다음에는 그녀 차례일 게 뻔했다.
“크러러러럭!”
“컥!”
그러나 협박에 가까운 고성에도 불구하고 학살은 멈출 생각을 않았다. 여기저기서 울리는 점토들의 비통한 울부짖음이 그녀의 위기감을 더욱 곤두서게 만들었다.
“이놈! 어디냐! 어디 있냐고!”
아크네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지르며 창날로 주변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러나 격하게 요동치는 낚싯대에 고기가 걸릴 턱이 없었다.
“크럭!”
“거기냐! 그림 속의 그림!”
아크네가 갈라진 목을 잡고 천천히 허물어지는 점토를 향해 소리치자, 그녀의 몸 앞으로 섬광이 번쩍 터져나갔다.
그림 속의 그림.
일정 반경 안에 있는 생명체를 액자 속에 가두는 6성 스킬이었다. 이윽고 섬광이 멎자 점토가 있던 자리에는 작은 액자 하나가 나뒹굴었다. 아크네는 서둘러 액자를 집어 그림을 살폈다. 그림 안에는 목이 완전히 떨어져나간 점토의 모습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 민성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쥐새끼가!”
아크네가 분을 이기지 못해 액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치자 액자는 산산이 조각나 흩뿌려졌고 바닥을 구르는 파편 사이에서 진득한 액체가 떨어져 내렸다.
“나와! 나오라고! 파멸의 시선!”
쩌적-
그녀의 눈길이 내려앉은 바닥과 천장 등 모든 사물들이 딱딱한 돌로 변해갔다. 허나 돌이 된 배경 속에서도 민성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망할 벌레 새끼가!”
아크네가 괴성을 지르며 재차 창대를 들어 올리려는 찰나, 점토들 사이에서 전염병처럼 펴져나가던 실선이 그녀의 복부에도 새겨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복부를 시작으로 그녀의 전신에 아이가 벽에 낙서한 것처럼 실선이 새겨졌다.
“후…. 스킬 해제.”
등짝의 실선을 끝으로 나지막이 숨을 고르는 민성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 민성의 손목에 걸린 시계는 스킬을 사용했을 때와 달리 초침이 다섯 칸 이동해 있었다.
“거기냐!”
민성이 알아서 모습을 보이자, 몸 상태를 인지하지 못한 아크네는 곧바로 온 힘을 실어 창을 던지려 했다.
“등신.”
그러나 민성은 차갑게 웃을 뿐, 어떠한 방어 행위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치익-
그녀가 머리 위로 창대를 쳐들기 무섭게, 실선이 그어진 부위에서 차례차례 스산한 울림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어?”
아크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리깔고 몸을 살폈다. 낙서처럼 어지러이 몸을 수놓은 실선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언제?’
그녀가 이성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든 생각이었다.
“컥!”
생각을 채 끝내기도 전에 격한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복부에서 시작된 고통은 들불처럼 옮겨 붙어 가슴, 머리, 꼬리 등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능력이 안 되면 적당히 몸 사릴 것이지.”
“아…. 아….”
민성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지만, 아크네는 제대로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고통이 한계치를 넘어가면 비명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녀의 상황이 그러했다. 뜨거운 불로 온몸을 사르는 격통이 그녀의 몸을 지배했다. 호흡은 제대로 고르기 어려웠고 동공의 초점은 차츰차츰 풀려갔다.
“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격통이 멈추길 빌며 몸을 움찔거리는 것뿐이었다.
“혹시 소문이 와전된 건 아니죠? 경고한 것치곤 너무 약한데요.”
민성은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하며 넌지시 티노에게 질문했다.
“인간. 내가 인간에게 전해주는 정보는 80% 이상의 진실을 토대로 말해주는 거다. 인간이 강해졌다고 생각해보진 않았나?”
“글쎄요. 최근에 강화한 거랑 돌 얻은 것 빼곤 딱히 없잖아요?”
투기장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기에 평소와 달리 루비 채집도 하지 못했다. 물론 그 와중에 얻은 게 없진 않았지만, 강화석을 뽑는다고 소모한 루비 곳간을 다시 채우고 싶었다.
“다른 인간들은 평생을 소모해도 못 얻는 것들이다. 만족이란 걸 알아라, 인간.”
“예, 예.”
“끼아아아아아!”
민성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 아크네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렸다.
“마무리가 어설프다, 인간.”
“허…. 다른 건 몰라도 끈질긴 건 인정해야겠네요.”
민성은 요란하게 몸을 꿈틀거리는 아크네를 보며 혀를 찼다. 세트 아이템 효과인 ‘죄악의 피로 얼룩진 세상’에 내포된 스킬, 고독한 죽음. 상대방을 타격할 때마다 최대 체력의 5%의 피해를 입히는 효능을 갖고 있다. 즉, 20방을 때리면 체력 여부에 상관없이 죽어야 마땅했다. 더욱이 마나 디스트로이어의 효능까지 감안하면 이미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끄아아아아아!”
그러나 아크네는 고통에 겨워하면서도 생존해 있다. 다만 아까와 달리 그녀의 꼬리는 도마뱀처럼 잘려 있었다.
“쯧. 또 뭔 짓을 할지 모르니 빨리 처리하죠.”
민성이 대검을 어깨에 들쳐 메고 접근해오자, 아크네는 고통 속에서 헤엄치는 와중에도 민성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사망 직전에 이르면 신체 일부를 버리고 30%의 체력을 즉시 회복하는 스킬, 고귀한 희생. 그것이 없었다면 목숨을 잃었으리라.
‘감히! 감히! 그런 눈으로 날 내려다봐?’
눈 뜨고 전신을 난도질당한 것도 억울한 판국에 그나마 남아 있던 30%의 체력도 민성이 남긴 실선 덕에 5%도 남지 않았다. 더욱이 멸시하던 인간에게 수모를 당하니 치욕스럽고 원통하기 그지없었다. 만약 살아남는다면 저놈의 눈은 날짐승들이 파먹게 하고, 살은 갈기갈기 찢어 짐승들의 먹이로 던져주리라.
‘둥지만 완성됐어도 놈 따위 한 주먹거리도 아니었을 텐데.’
둥지 건설을 시작하면 건설이 끝날 때까진 모든 스텟이 절반이나 감소한다. 하다못해 얼마 전 이곳에서 흡수한 방대한 양의 에너지 소화만 끝냈더라도 쓰러진 쪽은 그녀가 아닌 인간이었을 것이다.
과거 타워에서 전투를 벌였던 인간들과 달리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너무나도 나약했다. 영문은 몰라도 좋은 기회라 여긴 그녀는 편안한 마음으로 둥지 건설에 착수했다. 그것이 이리 큰 화로 돌아올 줄도 모르고 말이다.
“조용히 숨어 살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 아냐.”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아!’
바닥에 엎어진 채 민성이 다가오는 것을 노려보던 아크네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과거, 아두르와 전투를 벌였을 때 그녀는 패배했지만 그 대가로 아두르의 팔 하나를 취할 수 있었다. 주인을 잃고 떨어져 나온 한기를 머금은 두터운 팔. 그녀는 그것을 곧장 입에 넣고 삼켰다. 그리곤 여태껏 삼켰던 생물이나 에너지보다 기나긴 소화시간에 좌절했다.
‘기이한 능력을 갖고 있구나. 그게 네 힘의 원천인 듯한데. 좋다. 이미 잃어버린 팔은 네 몸과 하나가 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 시간 이후로 내 능력을 사용한다면 그때는 반드시 죽이겠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아두르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 그저 한 가지 경고와 함께 그녀를 심복으로 삼고 벽 안 주민들을 통솔케 했다.
‘지금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어.’
회상을 접은 아크네는 이를 악물었다. 팔을 흡수해 얻은 아두르의 스킬. 지금 믿을 것은 그것뿐이었다. 물론 아두르가 던진 경고가 마음에 걸렸지만, 경고고 나발이고 당장 죽게 생겼는데 어쩌겠는가?
“왜…. 왜… 네놈은 다른 벌레들과 다른 거지?”
아크네는 격통에 몸을 벌벌 떨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마음을 굳힌 이상, 지금 필요한 것은 약간의 시간이었다.
“음?”
고통에 오만상을 찌푸린 여인의 머리 위로 대검을 쳐들었던 민성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몸을 멈칫거렸다. 그리곤 한껏 비웃음을 머금곤 여인을 내려다봤다.
“머리만 사람이지 생각하는 건 파충류 틀을 못 벗어나네. 대놓고 사업 노하우를 알려달라하면 쓰나.”
“나약하고 제 목숨밖에 모르는 종족 따위가….”
“맞아. 말 잘했네. 그게 노하우니까 나중에 잘 활용해봐. 그럴 기회가 있으면.”
아크네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반박하자, 민성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쳐들고 있던 대검을 여인의 정수리 부근에 쑤셔 넣으려는 그때,
“프로즌 스론.”
아크네의 붉은 입술 사이에서 고요한 속삭임이 새어나왔다.
화아악-
속삭임이 끝나자 아크네의 몸 주변으로 거친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눈 뜨기 어려울 정도의 강한 바람이 부화장 내를 덮쳤다.
“빌어먹을!”
갑작스러운 변화 속에서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민성은 곧장 눈보라 속으로 대검을 밀어 넣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대검은 강한 반발력에 밀려 튕겨 나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쩌적-
눈보라에 닿은 검날이 무서운 속도로 얼어붙더니 삽시간에 냉기가 검자루와 민성의 손까지 덮어버렸다. 민성은 서둘러 대검을 회수하며 눈보라를 피해 몸을 뒤로 물렸다. 허나 이미 오른손을 덮어버린 얼음은 확장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빠른 속도로 팔, 어깨까지 그 영역을 넓혀갔다.
띠링-
[저주 ‘영원한 빙결’에 걸리셨습니다. 10분 내로 해제하지 않을 시, 사망합니다.]
“미친!”
새로이 나타난 메시지를 확인한 민성은 놀라 소리쳤다. 기껏 석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속였더니 빙결이라니. 연이은 저주 퍼레이드에 민성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불굴의 의지가 발동합니다. 50% 확률로 저주에 저항합니다.]
[저항에 성공하셨습니다.]
[빙결이 해제됩니다.]
“후….”
다행히 이번에도 50% 확률이 적중한 덕에 몸을 덮어가던 얼음이 떨어져 나갔다. 민성은 차차 온기가 도는 팔을 흔들어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일시방편일 뿐,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