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3
243화 - 아크네의 둥지 내부 (5)
‘젠장. 풀려! 풀려라!’
“글쎄? 아직 요리 안 끝났는데.”
속내와 달리 민성은 여유롭게 눈웃음치며 고개를 까딱였다.
띠링-
[상태이상 ‘석화’에 걸리셨습니다. 불굴의 의지가 발동됩니다. 50% 확률로 저주에 저항합니다.]
[저항에 성공하셨습니다.]
[석화가 해제됩니다.]
‘후…. 큰일 날 뻔했네.’
연달아 나타나는 메시지에 민성은 남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만약 해제되지 않았다면 샌드백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시도는 좋았는데 아쉽게 됐어. 그치?”
민성이 먼지 털 듯 툭툭 발을 털자, 발을 덮고 있던 돌무더기가 우수수 떨어졌다.
“무슨….”
그 모습에 말문을 잃은 아크네는 히죽거리는 민성을 멍하니 바라봤다. 여태껏 그녀가 스킬을 해제해주기 전까지 그녀의 능력을 자력으로 뚫고 나온 이는 없었다. 그랬기에 민성의 행태는 더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설마 아무런 계책도 없이 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네 능력쯤은 다 파악하고 있어.”
민성은 혜정이 줬던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빙긋 웃었다.
“석화 내성이 있는 아이템이구나!”
그 모습에 지레짐작한 아크네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아니. 상태이상 면역인데?”
민성은 거짓 속에 적당히 진실을 끼얹으며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본디 통신용으로 제공받은 물건이지만, 실제로 50% 확률로 상태이상을 벗겨내는 스킬을 지니고 있었으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상태이상 면역? 면역이라고?”
아크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실 헛웃음을 흘렸다.
“왜? 다들 하나쯤은 갖고 다니는 아이템이잖아?”
“그럴 리 없어…. 웃기지 마! 그런 아이템은 6성짜리야! 고작 인간 따위가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고!”
민성이 재차 귀걸이를 퉁겨 보이자, 아크네는 버럭 소리치며 몸을 들썩였다. 상태이상 면역. 상점을 이용하는 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꿈의 단어였다.
전투는 생존본능의 끝을 보여주는 무대다. 특히나 그 전투에 목숨이 걸린 상황이라면 말이다. 상대의 목숨을 취하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더러운 수작질을 벌이는 건 다반사라는 소리였다. 그 수작 속에는 독부터 강제수면, 석화 등 다양한 상태이상 스킬들이 존재한다. 실제로 그러한 스킬들이 차원전쟁에서 전략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지금은 과거가 된 일이지만, 인간들에게 패배하기 전까진 그녀 역시 상점을 이용하던 손님들 중 하나였기에 잘 알고 있었다. 헌데 그 모든 것들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상태이상 면역 스킬을, 그것도 일개 미물인 인간이 갖고 있다? 인정하기 어려웠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진위여부를 떠나 그 사실을 인정해버린다면 그녀는 스스로 손발이 잘려나간 걸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진짠데?”
“거짓말하지 마라! 파멸의 시선!”
민성의 말을 부정하려는 듯 아크네는 괴성을 지르며 스킬을 시전했다.
콰드드득-
“크륵?”
그녀의 눈에서 모든 것을 돌로 변화시키는 안광이 쏘아져 나오자, 애꿎은 바닥부터 민성을 포위하고 있던 일부 점토들의 전신은 돌이 되어 처량한 망부석으로 변했다.
“이제 눈 떠도 될 것 같다, 인간.”
티노의 말에 민성은 잽싸게 감았던 눈을 슬쩍 떴다. 확실하게 속이기 위해선 다시 불굴의 의지에 기대는 편이 좋았지만, 일부러 50% 확률에 몸을 던지고 싶진 않았다.
“무슨….”
“거, 안 통한다니까 그러네.”
민성이 몸에 묻은 돌가루를 털어내며 너무나 멀쩡한 모습을 보이자, 아크네의 얼굴을 덮고 있는 비늘들이 잘게 떨렸다. 아직 사용하지 않은 스킬들은 많았지만 놈에게 통할지 의문마저 들었다.
“잔재주는 그게 끝이야? 더 없으면 죽어야지.”
민성은 스산하게 읊조리며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곤 경직된 아크네의 커다란 몸뚱이에 냅다 대검을 찔러가며 그녀의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큭….”
아크네는 창대를 들어 날아오는 검 끝을 막아내려 했다.
[얼른 죽어라! 우리와 하나가 되는 거다!]
그러나 그녀의 몸에 주렁주렁 달린 난장이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까보다 무거워진 팔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그 결과, 검날은 가슴과 가슴 사이 파여 있는 부위를 정확히 찔러왔다.
치익-
“꺄아아아아아악!”
가슴에서 시작된 고통이 전신을 꿰뚫고 퍼져나가자, 아크네는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꽈배기처럼 몸을 비틀어댔다.
막대한 체력과 마력을 보유한 그녀였기에, 최대 체력과 마력에 비례해 타격을 주는 민성의 공격은 극독이나 다름이 없었다.
“뭘 지켜만 보고 있어! 죽여!”
“크르아아아!”
아크네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부화장 안을 배회하던 점토들이 괴성을 지르며 민성에게 달려들었다. 일부는 어디서 났는지 소총까지 들고 있었다.
“메인 요리 맛이 떨어지는 걸 샐러드 바로 해결해보겠다?”
삽시간에 점토들에게 둘러싸여 수많은 적의를 받아야 했지만 민성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크르아!”
“그래. 저년 시중드느라 고생했다. 빨리 보내줄게.”
민성은 두터운 대도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점토를 향해 일자로 대검을 휘둘렀다.
촤악-
“크륵?”
동강난 대도를 멍하니 바라보던 점토의 몸은 머리부터 가랑이까지 새겨진 옅은 실선을 따라 천천히 갈라졌다. 갈라진 점토의 몸이 바닥에 닿기 무섭게 민성은 점토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크아아아아!”
“크르아아!”
무수한 숫자의 병장기가 민성을 죽이고자 날아들었지만, 강화된 코트에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오히려 민성의 대검이 반원을 그리며 폭넓게 돌아가자, 에워싸고 있던 점토들의 복부에 옅은 선이 생겨났다.
“크르륵….”
선 사이론 곧 내장더미가 새어나왔고, 점토들은 폭풍에 농작물 쓰러지듯 일시에 우수수 무너져 내렸다.
“이런 답답한 새끼들. 쓸모 있는 놈 하나 없어!”
민성이 거침없이 점토들을 베어 넘기자, 아크네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부실한 재료를 사용했다곤 하나 설마하니 저리 무력하게 당할 줄이야. 생전에 지닌 능력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지만 지능이 달린 탓에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애초에 이런 사태를 방지하고자 둥지 주위로 병력을 놔뒀다. 개중에는 저쪽 세계에서 나름 이름을 날리던 브란, 브론 형제 등이 배치돼 있건만, 아무래도 제대로 일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것 봐라?”
어느 정도 고통이 가시자, 점토들을 학살하는 민성을 노려보며 기회를 엿보던 아크네는 갑자기 눈을 빛냈다. 난폭하게 대검을 휘두르던 아까와 달리 놈의 몸은 어딘가 둔해진 것 같았다. 그 시발점은 분명 얼음을 머금은 화살을 쳐낸 직후였다.
“젠장.”
실제로 점토들을 학살하던 민성은 검면으로 점토들을 두들길 뿐, 베지 않았다. 익숙한 스킬을 맞닥뜨리고 나니 망설임이 들었기 때문이다.
쇄액-
한기를 머금은 얼음 화살이 면전으로 날아오자, 민성은 고개를 꺾어 피해내며 눈앞의 점토를 노려봤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신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진짜 어떻게 된 거지. 왜 신의 스킬을 저 점토 새끼가 사용하는 건데?’
상점에서 얻을 수 있다곤 하나 한낱 점토 따위가 사용할 만한 스킬은 아니었다.
“잠깐…. 설마?”
쇄액-
문뜩 한 가지 가정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자, 민성은 재차 날아오는 얼음 화살을 피해내며 입술을 물었다.
“쿠웍! 컥…!”
“설마 사람들을 사용했을 줄은 몰랐는데.”
민성은 몰려드는 점토들을 검면으로 쳐내며 무표정한 얼굴로 아크네를 올려다봤다.
“지천에 굴러다니는 게 인간뿐인데 당연히 인간을 쓰지. 더 좋은 재료가 있었다면 진작 그걸 썼겠지?”
“이 미친년이….”
설마 했던 예상이 들어맞자 민성은 눈가를 찌푸렸다. 이제 와서 사람 몇 죽였다고 정신이 붕괴된다거나 구토가 몰려오진 않았다. 다만 신일지도 모르는 점토가 눈앞에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을 뿐. 그러나 아크네는 민성의 망설임을 놓치지 않았다.
“어머나, 세상에! 설마 몰랐던 거야? 네가 그렇게 죽이던 녀석들이 한때는 너와 같은 사람이었는데 말이야. 안타깝네, 안타까워.”
“과거에는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괴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민성의 표정변화를 읽은 아크네는 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 만약 네가 원한다면 전부 인간으로 되돌려줄 수도 있어.”
“….”
“네가 곱게 저 안으로 들어간다면 말이지. 너는 다른 것들과 달리 꽤 괜찮은 재료가 될 것 같아.”
아크네는 바삐 알을 분출하고 있는 기계를 가리켰다. 하지만 민성이 침묵을 고수하자, 아크네는 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뭘 망설여? 네 한 목숨 희생해서 이 많은 인간들을 구제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희생해 수많은 목숨을 구제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조건인가? 물론 민성이 기계로 들어간다 한들 되돌려줄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지만 말이다.
“자, 얼른….”
뱀이 다시금 유혹하려는 찰나,
“웃기고 있네.”
민성은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가운뎃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음? 설마 거절하겠다는 소리야? 인간들을 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횐데? 애초에 그러려고 온 거 아니었어?”
무슨 신호인지는 몰라도 거절의 뜻이라는 걸 읽은 아크네의 눈이 차갑게 굳어갔다.
“내 목숨의 무게와 저들 목숨의 무게가 같다고 생각해? 그건 너무 수지가 안 맞잖아?”
푸확-
민성은 대검을 들어 옆에 있는 회색 점토의 목을 주저 없이 날렸다.
“호오.”
그 모습에 아크네는 눈을 빛냈다. 아무리 외관이 변했다 한들 같은 동족을 죽이는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푸확-
“그래도 말이야. 무게는 다르더라도 일단 같은 사람이잖아?”
민성은 신으로 의심되는 점토를 피해 다른 점토의 목을 날리며 말을 이었다.
“사람 갖고 장난친 벌은 받아야지. 기분 거지같이 만들어준 보답으로 좋은 거 보여줄게.”
민성은 바람이 속삭이듯 작게 중얼거렸다.
“속도를 높여라.”
속삭임이 끝나기 무섭게 민성의 모습은 물에 녹은 솜사탕처럼 바탕에 녹아들었다.
“크르르….”
표적을 잃은 점토들은 물에 녹은 솜사탕 찾는 라쿤 같이 민성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민성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크륵?”
목에서 따끔한 느낌이 들자, 점토는 손을 들어 목을 어루만졌다. 언제 생겼는지 목에는 기다란 실선이 생겨있었다.
푸확-
실선의 유무를 확인하기 무섭게 몸 안에 갇혀 있던 액체가 개방된 댐같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크럭?”
“크악!”
목 위로 그어진 실선은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점토들 사이로 퍼져갔고, 몸을 잃은 수십 개의 머리통이 바닥을 뒹굴었다.
“이건 무슨….”
난데없는 이변에 아크네는 창대를 꽉 움켜잡곤 기습을 경계했다. 민성이 그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점토의 목을 날렸을 땐, 그저 약점을 보이기 싫어 강수를 뒀다 생각했다. 허나 아무래도 그녀의 착각인 모양이었다.
“크어어억!”
그녀가 숨 한번 들이키기 무섭게 또 열댓에 가까운 숫자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