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
240화 - 아크네의 둥지 내부 (2)
‘다섯 마리라. 쓸데없이 힘 빼기 싫은데.’
아크네를 마주하기 전까지 최대한 체력을 보존하길 원했건만 시작부터 꼬이고 말았다.
“캬악! 캬아아악!”
놈들의 낯짝에 달린 실선이 벌어지자, 그 속에 그득 달린 날카로운 이빨이 빛에 반사되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보고 경기를 일으켰겠지만 이미 상점 손님들의 해괴한 모습에 익숙해진 민성에겐 먼 나라 이야기였다.
“저 입이 놈들의 공격수단이다. 특히 놈들이 내뿜는 산성 액을 조심해야 한다, 인간!”
“약점은요?”
“약점은 모른다. 다만 저 잔털이 갑피 역할을 한다고 들었다. 보기와 다르게 상당히 단단하다고 하니 조심….”
“캬아아악!”
티노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기회를 엿보던 기생충이 아가리를 한껏 벌린 채 민성에게 몸을 날렸다. 그러나 민성은 아무렇지 않게 몸을 옆으로 틀어 공격을 피해냈다.
“지금 얘기하고 있는 거 안 보여! 이 벌레 새끼야!”
그리곤 대검을 들어 다시 바닥을 뚫고 들어가려는 기생충의 몸을 절단 냈다.
치익-
“키아아아악!”
검날이 맞닿은 곳에서 마나와 체력 타들어가는 소리가 울리더니, 기생충의 하반신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나가 몇 차례 바닥을 뒹굴더니 축 늘어졌다.
“뭐야. 이거 완전 물렁살이잖아?”
기생충을 벨 때 대검에서 전해져오던 부드러운 느낌. 마치 물렁한 두부를 써는 느낌과 똑같았다.
“철갑충이요?”
민성은 슬쩍 고개를 돌려 토막 난 기생충을 멍청하게 내려다보는 티노에게 미소 지었다.
“원래 어지간한 무기로는 생채기도 못 낸다고 들었다만… 확실히 인간이 강화한 게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티노는 철갑충의 진득한 체액이 묻은 대검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예전보다 더 좋아지긴 했죠.”
민성은 그를 내려다보는 기생충 네 마리를 보며 빙긋 웃었다. 놈들의 수가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남은 것은 몰살시키는 것뿐.
“크아아아악!”
민성의 비웃음을 의식하기라도 한 걸까. 요란한 괴성과 함께 기생충들은 아가리를 넓게 벌리고 민성을 삼키려 달려들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지능은 있나 보네. 유령 출몰.”
네 개의 길쭉한 전봇대가 쏘아져 오자, 민성은 중얼거림을 끝으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자 민성의 모습은 빛과 함께 점차 자리에서 사라져갔다.
슥-
“키익?”
방금까지만 해도 버젓이 보이던 민성의 모습이 사라지자 당황한 기생충들은 머리를 좌우로 돌리며 어벙벙한 모습을 보였다.
‘머저리 새끼들.’
투명화된 민성은 단숨에 눈앞 기생충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곤 놈의 주둥이 위에 거칠게 대검을 쑤셔 박았다.
푸확-
“캬아아아아악!”
“키악! 키악!”
동료의 날카로운 울부짖음과 함께 사라졌던 민성의 모습이 드러나자, 기생충들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민성을 향해 산성 액을 내뿜었다.
“이빨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의외네?”
거무죽죽한 타액이 날아오자 민성은 잽싸게 대검을 뽑곤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캬아아아아아악!”
민성 대신 타액을 뒤집어쓴 기생충은 얼굴이 녹아내리는 고통에 바닥을 뒹굴며 발광했다.
“키익?”
예상과는 다른 결과에 기생충들은 몸을 멈칫거렸다.
“걱정 마. 너희도 친구 곁에 보내줄 테니까.”
그사이 다른 기생충의 머리에 안착한 민성은 옅은 미소를 머금곤 대검을 놈의 머리 깊숙이 박아 넣었다.
치익-
“칵?”
검날이 안 그래도 작은 벌레의 뇌 속을 헤집고 태우자, 사고를 지탱할 부위를 잃은 기생충은 정지한 기계처럼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제 두 놈 남았나.”
“키익…. 키익….”
순식간에 동료들의 목이 날아가자, 전의를 잃은 벌레 두 마리는 저들끼리 의미 모를 대화를 나누곤 황급히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야! 어디 가!”
놈들이 도주하려 하자, 민성은 곧장 기생충의 머리에서 뛰어내려 반쯤 남은 기생충들의 몸에 대검을 휘둘렀다.
치익-
그러나 아쉽게도 민성이 얻은 것은 갓 뜬 회처럼 펄떡이는 놈들의 꼬랑지뿐이었다.
“하…. 도망가는 건 더럽게도 빠르네.”
민성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찬찬히 막혀가는 구멍을 내려다봤다.
키이이이이-
구멍 난 바닥 안에서 벌레들의 비통한 울부짖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적이 불쌍하다고 느낀 건 오랜만이다.”
상황이 종료되자, 티노는 고개를 저으며 완전히 막힌 바닥을 응시했다.
“이것도 아크네의 부하 같은 건가요?”
“둥지 안에 있으니 그렇지 않겠는가? 그리고 안으로 들어온 건 나도 이번이 처음이다, 인간.”
티노는 사실을 말하기 겸연쩍어 말꼬리를 흘리며 시선을 돌렸다.
“예?”
민성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아크네에 관해선 박사처럼 해박한 지식을 뽐내더니 정작 둥지를 모른다?
“그, 그야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저쪽이야 돌아다니는 소문도 많고 주워들을 수 있는 게 넘치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소문을 확인하자고 내가 저쪽 세계에서 둥지에 들어갔다간….”
“아, 그러네요.”
너무 당연해서 잊고 있었다. 이쪽 세상에서야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는다지만 저쪽 세상에선 녀석 또한 흔한 주민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혼자 둥지에 들어갔다면 설렁탕 육수 내기에 딱 좋은 재료가 됐겠네요.”
“설렁탕이 뭔가, 인간?”
민성이 입가를 씰룩이며 작게 중얼거리자, 티노는 꼬리를 위로 쳐들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TV부터 시작해 놀림당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 만큼 여차하면 즉석에서 보복을 가할 계획이었다.
“위험에 빠졌을 때를 빗대어 표현한 말이에요.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는 고급 단어죠.”
“정말인가?”
“정말로요.”
민성은 진솔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티노를 응시했다.
“크흠…. 거짓말은 아닌 것 같으니 믿어주겠다.”
몇 번이고 요리조리 민성의 반응을 살피던 티노는 꼬리를 들어 민성의 어깨를 거만하게 두들겼다.
“그럼요. 속일 분이 따로 있죠.”
민성은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얼른 무뚝뚝이 인간과 멍청한 여자를 찾자, 인간. 내가 도와주면 안 될 것도 다 가능해진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티노가 자신만만하게 앞장서자 민성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통신을 받고 둥지까지 오는 데 꽤나 시간을 소비했다. 살아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막말로 최악의 상황도 생각해야 했다.
‘부디 신이 합리적인 판단을 했으리라 기대하는 수밖에….’
치졸하게 구석에 숨어있어도 좋다. 다른 이들의 죽음을 방관하는 방관자가 되어도 괜찮다. 살아만 있어라. 그럼 무슨 수를 쓰건 반드시 찾아낼 테니까.
“인간! 안 오나?”
“거, 앞도 잘 안 보이시는 분이 그렇게 먼저 가다가 길 잃어요.”
티노의 독촉에, 민성은 상념을 접곤 멀찌감치 앞으로 이동해있는 티노를 따라갔다. 검날에 달린 빛에 몸을 의지한 채 꿀렁이는 길을 걷길 30여 분. 중간중간 몇 차례 철갑충들과 회색 점토 괴수들을 맞닥뜨렸지만 모두 어렵지 않게 죽일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인간. 지금 기억났는데 선생한테 들은 사실이 있다.”
조용히 민성의 뒤를 따라 날던 티노는 갑자기 민성의 코트를 잡곤 흔들었다.
“뭔데요?”
“그녀는 어떠한 에너지든 먹어치워 능력으로 바꾸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요?”
민성은 나지막이 되물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이미 들어오면서 느끼지 않았나? 몸이 둔해지고 날카롭던 감각이 무뎌졌다는 걸 말이다.”
확실히 처음 진입했을 때, 미혹의 숨결에 걸려 묘하게 몸을 짓누르는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다행히도 ‘불굴의 의지’ 덕에 저주를 해제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민성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자, 티노는 진중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 또한 아크네가 인간 차원의 에너지를 흡수함으로써 발동한 능력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둥지의 건설이 끝난다면 그녀의 영역은 지금보다 네 배, 아니 다섯 배는 성장할 거다.”
“그렇다는 건….”
“지금보다 더욱 강해질뿐더러 수많은 인간들이 그녀의 영역 안에서 에너지를 빨리고 목숨을 갈취당할 거다. 괜히 아두르의 열 손가락 중 하나가 아니다.”
“흠…. 그건 크게 상관없는데요.”
그러나 민성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중요한 건 오로지 신 일행의 안위뿐. 그 외에는 어떻게 되든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게 민성의 심정이었다. 그 모습에 티노는 답답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인간. 그녀는 노련하면서도 잔혹한 사냥꾼이다. 둥지의 무서운 점은 하나로 끝나지 않는 다는 점이다. 계속 놔둔다면 그녀는 끝없이 영역을 확장하여 나중에는 인간들의 활동범위 전역이 그녀의 영향을 받을지도 모른다. 근데도 그렇게 태평하게 굴 생각인가?”
“호오. 그러니까 한마디로 계속 놔두면 바퀴벌레처럼 끝없이 증식한다는 소리네요?”
티노의 진중한 설득에 민성도 서서히 웃음기를 지워갔다.
“그렇다. 그러니 계속 놔뒀다간 나중에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이만큼 확장했으니 이번 전투는 나도 장담하기 어렵다, 인간.”
티노는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민성을 걱정스레 쳐다봤다. 여태껏 수많은 위기를 넘겨왔다지만 이번 전투는 여태껏 겪었던 위기보다 큰 시련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높았다.
“오! 갈림길이다, 인간!”
“그러네요.”
티노의 외침에 동의하듯 민성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전방을 바라봤다. 마침내 지루했던 외길에 마침표를 찍는 8개의 새로운 통로가 그들을 맞이했다.
‘젠장. 차라리 외길이 낫지. 무슨 입구를 8개씩 만들어놨어?’
심지어 불친절하게도 입구에는 어떠한 설명도, 힌트도 없다. 아크네에게로 가는 길은 이중에 하나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머지는 전부 함정 혹은 정답과 무관한 길일 게 뻔했다. 철저히 감에 의존해 길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
“어디로 가야 될까요.”
입구들을 슥 둘러본 민성은 넌지시 티노에게 바통을 넘겼다.
“음…. 내 생각엔 저쪽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인간.”
티노는 왼쪽부터 세 번째 자리에 위치한 입구를 가리켰다.
“왜요?”
민성은 조용히 되물으며 이유를 요구했다. 아무 이유 없이 정한 거라면 곧바로 기각할 생각이었다.
“유독 저쪽이 다른 통로보다 더한 악취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래요?”
이미 악취에 후각이 마비된 그와 달리 아직 티노의 콧구멍은 싱싱한 모양이었다. 민성은 세 번째 통로에 가까이 다가가 코를 벌름거렸다.
“윽….”
이미 악취로 적응된 콧구멍 속으로 한여름에 방치되어 부패한 시체 썩은 내가 풍겨오자, 민성은 헛구역질하며 뒤로 물러났다. 예전 광해군의 묘 속 좀비들이 풍기던 냄새는 양반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떤가, 인간.”
“확실히 저쪽이 장난 없긴 하네요.”
민성은 나머지 일곱 통로의 냄새를 확인하고서야 수긍했다.
“도대체 뭔 짓거리를 하면 이런 냄새를 풍길 수 있는 건지. 후… 저쪽으로 가봅시다.”
민성은 오만상을 찌푸린 채 억지로 숨을 들이쉬며 세 번째 입구로 들어갔다.
띠링-
[세 번째 입구를 선택하셨습니다. 부화장으로 진입합니다.]
‘어라? 들어와야 알려주는 거였어?’
입구 내로 접어들자 새로운 알림과 함께 여태껏 시야를 제한하던 어둠이 점차 벗겨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