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
239화 - 아크네의 둥지 내부 (1)
“….”
정보를 확인한 민성은 혀를 내둘렀다. 일단 복잡한 사용법에 놀랐고, 죽으면 바닥에 떨어진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니까 아이템 창에 보관해도 떨어진다는 소리잖아? 뭐 이딴 아이템이 5성인 거지?’
더욱이 아이템의 능력 또한 5성에 부합하는지 의문이었다. 모르긴 해도 위기에 몰렸을 때 도박하는 심정으로 사용하면 딱 좋은 아이템인 것 같았다.
“인간, 공짜로 얻은 주제에 불만이 많다.”
민성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낌새를 눈치챈 티노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기왕 얻은 거 좋은 것이길 바라는 게 사람 심리죠.”
민성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항변했다.
“인간 말이 맞다. 인간들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걸 깜박했다.”
“욕심이 아니라 당연한 거죠. 그 개고생을 했는데 고작….”
“알았다. 것보다 저 점토 같은 놈들과 또 투닥거리기 싫으면 얼른 이동하자.”
티노는 꼬리를 들어 재차 항변하려는 민성의 입을 틀어막곤 후방을 가리켰다.
“키아아아아악!”
하나둘 건물에서 기어 나오더니 어느새 파도가 된 회색 괴물 무리가 민성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때려잡았는데 아직도 남아있었어?”
민성은 방대한 숫자에 혀를 내둘렀다. 아누비스들의 함정에 빠지기 전에 꽤나 죽였다고 생각했건만 빙산의 일각인 모양이었다.
“어쩔 거냐, 인간?”
“어쩌긴요. 얼른 튀죠.”
이미 아누비스들과 벌인 심리전 덕에 정신적으로 꽤나 피로한 상태. 아직 놈들의 머리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구태여 체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다.
“현명한 선택이다. 이쪽이다.”
티노가 전방 4차선 도로를 가리키며 날아가자, 민성도 서둘러 그 뒤를 따라 질주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반파된 자동차들과 건물을 지나치길 수십 차례. 중간중간 회색 점토 같은 괴물들이나 아크네의 수하로 보이는 가고일과 기사 무리가 보였다. 바닥을 뚫고 올라와 기습을 가하는 대형 지네 같은 괴수도 마주했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지나쳤다.
“여기다, 인간.”
김포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방화역 인근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티노는 나는 것을 멈추고 꼬리로 전면을 가리켰다.
두근-
녀석의 꼬리 끝에는 딱 보기에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수상쩍은 물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거대한 돔 구장처럼 커다란 타원형 모양을 가진 그것. 연한 분홍색을 띤 표면은 엷은 실금이 가 있고, 살아있는 생물의 심장처럼 위아래로 벌떡댔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점으로 혈관처럼 생긴 뿌리 같은 것이, 인근 아파트부터 작게 조성된 공원 등 곳곳에 뻗어 있었다.
‘거 징그럽게도 생겼네.’
민성은 지도를 꺼내 정면의 그것과 비교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지도에 따르면 본디 이곳에 발전소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발전소는 온데간데없고, 저 괴상한 물체가 전부였다.
“아무래도 아크네가 본격적으로 둥지를 짓고 있는 모양이다, 인간.”
“저게 둥지라고요?”
의미심장한 티노의 말에 민성은 눈가를 찌푸린 채 녀석을 바라봤다.
“아직 짓고 있는 둥지라 말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거다.”
“어쨌건요. 왜 둥지를 짓는 거죠?”
분명 이점이 있어 짓는 것이라 추측할 순 있었지만 상세한 이유는 예측이 불가했다.
“거주공간이 필요해서 짓는 거 아니겠나? 아무리 이 몸이 전지전능하다지만 그런 것까지 알지는 못한다, 인간.”
“….”
기대와 다른 답에 민성은 한숨을 내쉬곤 걸음을 재촉했다. 역시 직접 부딪치는 것밖에 답이 없을 듯했다.
“하지만 한 가지 예상가는 건 있다.”
“뭔데요?”
잽싸게 따라붙은 티노가 자랑스럽게 턱을 쳐들고 한껏 으쓱거리자, 민성은 무심하게 물었다.
“그녀는 분명 건설한 둥지 숫자에 따라 강해지는 게 분명하다! 저쪽에서도 영역 확장하는 걸 좋아했으니 말이다.”
“호오. 그건 좀 흥미가 가네요.”
민성이 관심을 보이자, 티노는 신이 나 주절주절 말을 이어갔다.
“만약 그녀가 아두르에게 패배하지 않았다면, 아마 서쪽 구역은 그녀가 차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티노는 진중함 가득한 눈으로 민성의 눈을 응시했다. 실제로 과거 쓰레기장에선 커다란 알력 다툼이 몇 차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아두르와 아크네가 벌인 전쟁이었다. 아름아름 둥지를 확장하며 영역을 넓혀가던 아크네가 아두르의 영역에 손을 뻗은 것이 전쟁의 시초였다.
만약 아크네가 아두르와의 우두머리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탐욕스러운 그녀는 끝없이 둥지를 건설해나갔을 것이고, 적어도 해당 구역의 주민들은 모두 그녀의 양분으로 바뀌었으리라. 하지만 아크네를 꺾은 아두르가 그녀의 확장을 통제한 덕에 그녀의 탐욕 역시 수면 밑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랑 말이 다른 것 같은데요. 아크네랑 싸워서 살아남은 쪽이 없다면서요.”
“크흠…. 그렇긴 하다만 아두르는 예외다, 인간.”
민성이 의문스럽다는 눈빛을 보내자 티노는 헛기침하며 무겁게 표정을 내리깔았다.
“한 구역의 정점을 찍은 놈이다. 솔직히 난 과거의 인간들이 아두르를 상대로 어떻게 승리했는지 의문이 든다.”
아두르만큼은 아니지만 아크네 역시 만만치 않은 존재다. 민성이 상대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 드는 상황. 위험한 적을 목전에 두고 있는 만큼, 티노는 상대방의 위험성을 민성에게 상세히 알리고 싶었다.
“어쨌건 아크네도 만만찮다는 거죠? 뭐, 마음은 알겠는데 너무 걱정 마요. 이런 일 하루 이틀 겪는 것도 아니잖아요? 살충제 한번 진하게 뿌려주면 되겠죠.”
민성은 걱정하는 티노에게 빙긋 웃음 지어 보이곤, 대검을 빼들고 위아래로 벌떡이는 둥지를 응시했다. 그리곤 느긋한 걸음으로 둥지에 천천히 접근했다.
“세상만사가 인간의 뜻대로 돌아갈 리가 없지 않나….”
티노는 민성이 듣지 못할 정도로 나지막이 중얼거리곤 민성의 뒤를 쫓았다.
두근-
둥지 인근에 접근하자, 심장 벌떡이는 소리가 귓속을 쿵쿵 울렸다. 뿐만 아니라 둥지의 외관도 더 뚜렷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진짜 미적 감각이 심각하게 떨어지는 년인가 보네요.”
민성은 둥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옅은 실금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실금은 사람의 혈관처럼 녹색의 액체를 어디론가 바삐 수송했고, 표면은 꼭 사람의 껍질을 벗겨놓은 것처럼 붉은 선들이 나무 덩굴처럼 얽혀있었다. 이곳이 과거 전력발전소였다고 말한들 누구도 믿지 않을 정도로 변질되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그렇다, 인간. 우리에겐 다행스러운 소식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나저나 수비 병력 몇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조용하네요.”
민성은 눈길을 좌우로 돌리며 조용한 둥지 주변을 살폈다. 어찌 보면 적이 심장 밑까지 쳐들어온 격이건만, 그 흔하던 회색 점토들조차 보이지 않자 묘한 의문이 들었다.
“내 생각엔 아마 둥지에 접근하기 전에 영역으로 들어온 인간들을 죽이려고 병력들을 전진 배치한 것 같다. 인간이 브란과 브론을 만난 것도 그런 맥락일 확률이 높다.”
“그렇겠죠?”
녀석의 말이 상당히 그럴싸했기에 민성은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거대한 둥지 밑으로 다가갔다. 밑에는 구멍 난 폐처럼 뚫려있는 작은 구멍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저쪽이 입구인가 봐요?
“그건 나도 모른다. 입구인지 아닌지는 둥지 주인만이 알고 있을 거다. 일단 내가 먼저 들어가서 내부를 살펴보고 오겠다, 인간.”
민성이 구멍 중 하나를 가리키자, 티노는 부정의 뜻으로 꼬리를 좌우로 흔들곤 쏜살같이 둥지 안으로 날아갔다.
“뭐 좀 발견한 거 있나요?”
잠시 후, 민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둥지에서 나온 티노에게 질문했다.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티노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캄캄한 밤도 대낮처럼 볼 수 있는 안광을 갖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둥지 내의 어둠은 꿰뚫어볼 수 없었다.
‘어두우면 투명화를 써도 의미 없겠지.’
“그럼 어쩔 수 없죠. 직접 들어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민성은 고개를 끄덕이곤 아이템 창에서 손바닥 크기의 날개 한 쌍을 꺼냈다.
“아이템 사용. 페어리의 날개.”
민성이 작게 중얼거리자, 눈부실 정도로 밝은 불빛이 날개에서 뿜어져 나왔다. 날개에 묻은 요정가루를 산화시켜 빛을 발산하는 3성 아이템이었다. 10번의 횟수제한과 24시간이라는 시간제한이 있긴 하지만 이런 등급의 아이템은 얼마든지 상점에서 구할 수 있었기에 아깝지 않았다.
“자, 그럼 들어가 봅시다.”
민성은 빛이 잘 들 수 있도록 날개를 대검 표면에 부착하곤 구멍 안으로 진입했다.
똑-
안으로 들어서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과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민성을 반겼다.
‘생각 이상으로 어둡네.’
민성은 횃불처럼 빛을 발산하는 대검을 휘적이며 내부를 살폈다. 널찍한 굴 형태를 예상했건만 민성 앞에 펼쳐진 것은 차선 두 개 너비의 외길이었다.
두근-
“집주인이 인테리어에는 영 소질이 없나 보네요.”
외길 양옆에 세워져있는 벽은 살아있는 것처럼 작게 꿈틀거려 묘한 이질감을 선사했다. 또한 공중을 배회하는 역한 토사물 냄새가 은연중 불쾌감을 높였다.
“후…. 환기도 안 하는 것 같고요.”
민성은 악취에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러면서도 냄새에 익숙해지고자 일부러 숨을 크게 들이셨다.
‘나중에 냄새에 면역이 있는 아이템이 있나 찾아봐야겠어.’
어느 정도 악취에 적응을 하고 나서야 민성은 날개의 빛에 의존한 채 앞으로 나아갔다.
똑-
‘어디가 끝인 거야?’
혹시 모를 적의 출현을 대비해 검 자루를 꽉 움켜잡고 불쾌한 외길을 따라 걸은 지도 벌써 이십여 분. 그러나 적은커녕 생물의 활동흔적조차 느낄 수 없었다.
“설마 다른 곳에 둥지 지으러 간 건 아니겠죠?”
민성은 긴장을 풀지 않고 대검에 부착한 날개로 좌우를 비추며 조용히 물었다.
“음…. 그런 상황도 완전히 배제하긴 어려울 것 같다. 한 자리에 계속 박혀있다는 보장도 없으니 말이다.”
“그럼 저희는 완전 허탕 친 셈이겠….”
피식 웃으며 답하던 민성은 갑자기 대화를 끊곤 서있던 자리에서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발밑에서 아주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콰직-
“키에에에에엑!”
민성이 물러서기 무섭게 커다란 괴성과 함께 무언가가 바닥을 뚫고 올라왔다.
“아오. 조용히 들어가긴 글렀네.”
민성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검을 들어 요란스럽게 몸을 꿈틀거리는 전봇대를 비췄다. 하얗고 기다란 몸뚱이에는 잔털이 덥수룩했고, 낯짝이 있어야 할 부위에는 검은 실선이 달려있었다. 꼭 사람의 체내에 기생하는 기생충을 확대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조심해라, 인간! 철갑충이다!”
“철갑충이요?”
놈들의 정체를 간파한 티노가 소리치자, 민성은 대검을 겨눈 채 되물었다. 이름과 달리 그 어디에도 갑주라 부를 만한 걸 두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콰직-
“키아아아아!”
“얼씨구? 친구들도 있었어?”
민성은 잇따라 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기생충들을 올려다보며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