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
237화 - 브란&브론(6)
툭-
붉은 주사위, 단면에 박힌 눈금의 개수는 하나였다.
‘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민성은 한 칸 전진하여 파란 말 위에 올라타는 붉은 말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단 고비 하나는 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브론의 차례였다. 다만 놈이 워낙 독특한 운영을 하는 탓에 주사위를 굴릴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오호호호호. 이거, 이거. 참 애매하군요. 마지막까지 변수 천지예요. 그렇지요, 브란?”
“내 잘못이 아니다.”
“전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상당히 찔린 모양이군요?”
브론은 무뚝뚝하게 항변하는 브란을 힐끗 보며 반달 모양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민성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좋아요. 이 또한 게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묘미이지요. 그렇지요?”
“압도적인 꼴찌 주제에 아직도 입 털 여유는 있나 보네.”
“글쎄요. 꼴찌로 끝날지 어떻게 될지는 끝까지 가봐야 알 일 아니겠어요? 오호호호호.”
민성의 빈정거림에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브론은 갑자기 정색한 채 민성을 노려봤다.
“자, 이제 게임도 충분히 즐긴 만큼 끝낼 시간이 왔군요. 본래라면 주사위를 굴리는 게 맞지만 더 이상 기회를 주면 저희 영혼이 댕겅 날아갈 것 같군요. 오호호호호. 좋아요. 결정했어요.”
브론은 숫자 10이 새겨진 노란색 카드를 집었다.
‘이런 망할 개자식을 봤나.’
이제 붉은 주사위 하나 나온 상황에 일부러 카드를 집어 턴을 넘겨버릴 줄이야. 브론의 의도를 읽은 민성은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만약 민성이 주사위를 굴려 하얀색이 나오면 최상, 나오지 않더라도 브란, 브론이 주사위를 굴려 하얀 주사위 2 또는 3이 나오면 게임은 그대로 끝나버린다.
‘주사위는 안 되고 결국 남은 건…….’
숫자가 박힌 카드를 집거나 1등 마에 배팅하는 것뿐. 그러나 나온 주사위가 하나뿐인 상황에 도박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멸의 길에 들어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10 동닢짜리에 배팅했다가 2등 적중에도 실패하면 동닢 5개를 토해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역전의 길은 멀어지고 결국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돌파구, 돌파구가 없을까.’
“인간…….”
티노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가를 벅벅 긁어내리는 민성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봤다. 수많은 게임을 통해 포커페이스 유지에는 숙달됐다지만 불안할 때나 깊은 생각을 할 때 보이던 눈 긁적임. 내색은 않았어도 궁지에 몰렸다는 간접적인 신호였다.
“게임하는 사람이 자꾸 자리를 비우니 진행이 되질 않는군요. 오호호호호.”
민성이 고심을 거듭하자 브론은 그런 민성을 비꼬며 주둥이를 씰룩였다. 그러나 민성은 고민을 거듭한 탓에 브론의 빈정거림을 듣지 못했다.
“…….”
민성은 발판에 놓인 말들과 의자 손잡이에서 꺼낸 카드들을 번갈아 노려봤다. 하지만 아무리 바라봐도 어떤 패를 선택해야 할지 좀처럼 감이 오지 않았다.
“인간! 그걸 써보는 건 어떤가?”
“네.”
갑자기 티노가 허공에서 내려와 소리쳤지만, 생로를 찾기 위해 몰두하던 민성은 작게 중얼거리며 티노의 말을 가볍게 받아 넘겼다.
“정신 차리고 들어라, 인간!”
티노는 꼬리를 들어 민성의 뺨을 후려쳤다.
“아, 왜요?”
안 그래도 민감한 상황에 불의의 일격을 당한 민성은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를 쳐들었다.
“그 투기장에서 얻었던 검은 돌 말이다! 그걸 사용해보는 건 어떻겠나?”
“검은 돌이요? 무슨 검은 돌……. 아…….”
5~6성 스킬이 랜덤으로 발동되는 능력을 지닌 오만한 선인의 돌. 녀석은 그것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민성은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곤 고개를 저었다.
“스킬 써봐야 소용없어요. 경기장 내의 사물들에는 간섭 금지거든요. 그러니까 저놈들도 가만히 있죠.”
“이런 멍청한 인간을 봤나! 나는 경기장에 사기를 치라 한 적 없다.”
민성이 아누비스들을 가리키며 고개를 젓자, 티노는 허공에서 방방 날뛰며 꼬리를 휘둘러 민성의 머리를 가격했다.
“그게 무슨…….”
‘가만……. 분명 경기장 내의 사물들에 간섭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어. 그럼 나한테 스킬을 사용하는 건 상관없다는 소리잖아?’
민성은 깨달음을 얻은 고승처럼 눈을 부릅떴다. 물론 그가 보유한 스킬들은 전부 살인에 적합한 스킬이지 스스로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스킬은 없었다. 또한 돌을 사용한들 어떤 스킬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래. 밑져야 본전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결의를 다진 민성은 아이템 창에서 오만한 선인의 돌을 꺼내들었다.
“아이템 사용, 오만한 선인의 돌.”
그리곤 돌을 꽉 쥔 채 작게 속삭였다.
화아악-
갑자기 돌에서 검은 광채가 흘러나오더니, 굵은 사슬에 신체의 자유를 포박당한 초로한 노인의 형상이 피어올랐다.
“오호호호호호. 무의미한 짓입니다만 궁지에 몰린 자의 추악하면서도 아름다운 발악을 보는 것도 게임의 묘미 중 하나지요. 그렇지요, 브란?”
“경기장에 스킬을 사용하면 패배라 얘기했건만 역시 어리석은 종족이다. 마지막에 김빠지게 할 줄은 몰랐다.
아누비스들은 저들끼리 뾰족한 주둥이를 놀리며 민성의 행동을 비웃었다.
“이건 또…….”
한편 민성은 노쇠한 눈으로 그의 몸을 훑는 노인을 멍하니 바라봤다. 노인의 눈 안에는 왠지 모를 멸시와 조롱이라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새 주인이 이런 얼빠진 놈이라니. 내 업보가 이리도 무겁단 말인가.]
“뭐요?”
민성은 다짜고짜 욕지거리를 던지는 노인을 차갑게 바라봤다.
[그래도 첫 사용이니 이번에는 네게 필요한 걸 주도록 하지. 하지만 다음부턴 전적으로 내 마음대로 줄 것이니 기대하지 말거라.]
노인은 민성의 물음을 가볍게 묵살하곤 몸을 칭칭 동여매고 있는 사슬 중 하나를 집어 민성에게 던졌다. 사슬은 민성이 채 피하기도 전에 그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스킬 럭스의 밑장빼기가 발동됩니다.]
동시에 민성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럭스의 밑장빼기?’
가슴에 별 이상이 없는 걸 파악한 민성은 곧장 새로이 나타난 스킬을 확인했다.
[럭스의 밑장빼기]
등급: ★★★★★★
설명: 진정 도박을 사랑하고 즐겨했던 마법사 럭스가 궁지에 몰렸을 때 즐겨 사용했던 스킬이다.
효과: 30분 동안 행운 스텟을 300 증가시킨다.
쿨타임: 24시간
특수사항: 오만한 선인의 돌로 발동된 스킬로서 스킬은 24시간 후 소멸된다.
‘행운 300?’
스킬을 확인한 민성은 모호한 얼굴로 눈가를 긁적였다. 확실히 이번 게임은 지능적 요소가 필수지만 운도 반드시 따라줘야만 하는 게임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행운이 올라갔다 하여 이 불리한 판세를 뒤집을 수 있을지는 자신하기 어려운 상황. 이미 여러 번 행운에 기대 루비 뽑기를 했다가 기대 이하의 물건에 좌절한 게 몇 번이던가?
띠링-
[행운 스텟이 300을 넘었습니다. 특수 스킬 ‘운의 흐름을 읽는 눈’이 발동됩니다.]
[운의 흐름을 읽는 눈]
등급: 특수 스킬
설명: 행운 스텟이 300을 초과했을 시 개방되는 스킬.
효과: 모든 만물들은 각기 고유의 운을 갖고 있다. 극에 달하는 행운을 손에 넣은 자여. 만물의 운을 다스리고 나아가 운명을 다스려라.
‘그러니까 보유 스텟이 300을 넘기면 숨겨져 있던 스킬이 등장하는 식인가 본데. 그럼 다른 스텟도 마찬가진가?’
새로이 등장한 정보에 민성은 순간 눈을 크게 떴지만, 곧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설명이 왜 이리 조악해?’
평소의 상세한 설명과 달리 애매한 스킬 정보에 민성은 눈가를 찌푸렸다.
“자자, 눈요기도 했으니 이제 그쪽 생애 마지막 게임을 진행하시지요. 물론 당신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해요. 당연히 죽기 싫겠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5분 내로 진행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부전패 당하는데. 오호호호.”
민성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자, 브론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민성에게 어서 진행하라 손짓했다.
“너무 이른 시간에 폭죽 터트리는 거 아냐?”
민성은 나지막이 반박하며 무언가 달라진 게 있나 싶어 경기장 내를 빠르게 훑었다. 그리곤 곧 아까와는 다른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어라? 이것 봐라?’
민성은 발판에 놓인 말들을 보며 음흉한 미소를 흘렸다. 그리곤 갑자기 그의 얼굴이 새겨진 카드 한 장을 꺼내 들어 우측 의자 손잡이에 넣었다.
[1등 마 배팅 상황판]
브론-?
민성-?
동시에 1등 마 배팅 상황판에 민성의 이름이 새겨졌다.
“뭐…… 뭐라고요?”
“…….”
의외의 상황에 아누비스들은 놀란 눈으로 민성을 바라봤다. 그러나 곧 브론은 배를 부여잡고 미친놈처럼 웃어재끼기 시작했다.
“오호호호호호. 뭐,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너무 눈에 보이는 선택 아닌가요? 보나마나 하얀 말이 1등이라는 데 배팅했겠지요. 근데 어쩐답니까? 제가 먼저 배팅했는데 말이죠?”
플레이어가 똑같은 1등 마를 예측했을 경우, 먼저 예측한 플레이어가 동닢 20개를, 그 뒤에 예측한 플레이어가 동닢 10개를 받는다. 즉, 민성은 하얀 말이 1등으로 들어와도 순서가 밀려 동닢 10개밖에 받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내 차례군.”
브란은 차례가 돌아온 즉시 숫자 10이 박힌 하얀 카드를 집었다.
“오호호호호. 이렇게 되면 하얀 말이 1등으로 들어와도 우애 좋게 동닢 10개씩 챙겨 가겠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저도 하나 가져가는 편이 낫겠지요?”
브론은 너무 웃어 눈가에 고인 물기를 닦아내다 재차 웃음보를 터트리며 좌측 의자 손잡이에 손을 뻗었다. 그리곤 숫자 5가 박힌 하얀 카드를 집곤 민성의 면전에 흔들어 보였다.
“오호호호호호. 아쉽죠? 아쉽죠? 이걸 가져갔으면 희망의 불씨를 이어갈 수 있었을 텐데. 제가 후다닥 가져가버려서 어쩐답니까? 오호호호호호.”
“…….”
민성은 한껏 빈정대는 브론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리곤 작게 중얼거렸다.
“굴리지.”
그러자 민성의 천칭 위 숫자가 20으로 바뀌며 피라미드에서 주사위 하나가 떨어져 나왔다.
“오호호호호?”
“…….”
파격적이다 싶을 정도로 의외인 민성의 선택에 아누비스들은 놀란 눈으로 민성을 바라봤다. 그러나 민성은 아랑곳 않고 주사위를 응시했다.
파란 주사위, 눈금의 개수는 3개였다.
“히히잉!”
8이 적힌 발판에 있던 파란 말은 붉은 말을 등에 업은 채 3칸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곤 11칸에서 대기 중이던 노란 말의 등에 올라타 3단 탑을 이루었다.
“오호호호……. 제 손으로 하얀 주사위를 꺼냈어야 진정 재밌는 장면이 연출되는 건데. 거참 아쉽군요. 그렇지요, 브란?”
“…….”
상황이 오묘하게 돌아가자 아누비스들은 어색하게 대화를 나누며 발판을 응시했다. 이제 남은 주사위는 노란색과 하얀색뿐. 만약 노란 주사위가 3이 나온다면 하얀 말은 단번에 1등에서 꼴찌로 추락할 것이다. 물론 확률상 하얀 말이 1등으로 끝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상황이 오묘하게 돌아가자 기묘한 불안감이 아누비스들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