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
235화 - 브란&브론(4)
“어이고. 이렇게 되면 최소 3등은 확정이네? 어쩐다냐?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동닢 5개 토해내야겠네?”
민성은 브론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조소를 던졌다.
“오호호호……. 그쪽도 안심하긴 이른 것 같은데 말이죠. 아직 한 마리가 남아있으니까…….”
브론은 숫자 10이 박힌 붉은 카드 쥔 손을 잘게 떨며 겨우 미소를 유지했다.
“딱히 상관없는데?”
민성은 브론의 말을 가볍게 씹어주며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민성이 배팅한 노란 말과 하얀 말의 간격 차이는 세 칸. 즉 하얀 주사위가 3만 나오지 않으면 동닢 10개 확보에 성공할 수 있다. 혹여나 3분의 2 확률을 뚫고 3이 나오더라도 2등은 확보할 수 있는 위치였다.
“……이렇게 된 이상 본전이라도 챙겨야겠군요.”
브론은 숫자 5가 박힌 노란 카드를 집곤 턴을 끝냈다. 그러나 아까와 달리 브론의 얼굴에서 미소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주 생각 없는 놈은 아니었네.”
민성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 동닢 1, 최대 동닢 5개를 챙길 수 있는 카드.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럼 이제 내 차롄가.’
브론이 턴을 끝내고 차례가 돌아오자 민성은 천천히 눈가를 쓰다듬었다. 남은 선택지는 이제 두 가지. 주사위를 굴리거나 2등이 거의 확실시된 파란 말 카드를 가져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이 공존했기에 파란 말 카드는 포기했다.
“좋아. 굴리겠어!”
민성이 소리치자, 천칭의 숫자가 7로 바뀌며 뒤집어진 피라미드 안에서 하얀 주사위가 바닥에 떨어졌다.
‘제발 1이나 2!’
민성은 두 손을 꽉 붙잡고 회전하는 주사위를 간절히 바라봤다. 아누비스들 역시 긴장했는지 동공을 커다랗게 뜬 채 주사위가 멈추길 기다렸다.
툭-
이윽고 주사위의 움직임이 멈추자 민성과 아누비스들도 시선도 따라 굳어버렸다. 하얀 주사위의 단면에는 선명한 검은 점 세 개가 박혀있었다.
“실화냐? 이런 망할 운빨 게임을 봤나…….”
아무리 최고의 수를 생각해내도 모든 수를 엎어버리는 운 앞에선 냉철한 지략도 의미가 없다.
“히히잉!”
하얀 말은 민성의 허탈한 웃음을 무시하듯 힘찬 외침과 함께 발판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곤 파란 말의 엉덩이를 밟고 올라가 노란 말의 등 위에 안착했다.
[2세트가 종료됩니다. 결과를 정산합니다.]
1등 말, 하얀 말.
2등 말, 노란 말.
3등 말, 파란 말.
4등 말, 붉은 말.
[배팅 결과에 따라 동닢을 지급합니다.]
1등 브란: 16개
2등 민성: 8개
3등 브론: 2개
‘빌어먹을. 역전 각이었는데.’
민성은 정산을 끝내고 바뀐 천칭의 숫자를 살피곤 이마를 찌푸렸다. 여전히 브란이 1위를 공고하게 지키고 있다. 그나마 위안 아닌 위안이라면 이번 세트로 브론이 동닢 5개를 반납하여 압도적 꼴찌로 밀려났다는 점 정도였다.
“오호호호. 설마하니 제가 꼴찌하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죠.”
브론은 굳은 입가를 애써 펴 보였다. 하지만 꼴찌를 했다는 모멸감 탓인지 그의 둥근 코는 잘게 떨렸다.
“입만 터는 놈치고 잘되는 꼴을 본 적이 없었는데 어째 틀리지가 않네.”
“킁…….”
처음과 달리 브론은 민성의 이죽거림에도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2등을 했다고 좋아할 게 아냐. 1등을 못 하면 의미가 없다. 거기다 이렇게 된 이상 브론이 게임 자체를 버리고 나를 집중견제 할 수도 있어.’
브론이 1등 욕심을 버리고 킹 메이커로 등극할 경우 더한 낭패를 볼 가능성이 높다.
‘이번 세트가 관건이다. 잘하면 다음 세트로 끝나버릴 수도 있어. 이번 세트에서 최대한 동닢을 확보해야만 해.’
민성은 발판을 따라 오아시스를 지나 사막마을로 접어든 말들을 보며 여러 가능성들을 생각했다.
“잘하면 4세트 안으로 승부가 나겠군.”
민성은 브란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동의하듯 눈가를 거칠게 긁적였다. 이제 골인 지점까지 남은 발판은 11칸.
극악의 확률이긴 하지만 5칸에 뭉쳐있는 말들의 주사위가 나오는 순서에 따라 4세트에서 게임이 끝나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현재 5칸에 뭉친 말들은 밑에서부터 파랑-노랑-하양 순으로 겹친 상황. 만약 파랑-노랑-하양 순으로 3이 나올 경우, 하얀 말이 14칸까지 전진할 확률도 존재했다.
‘빌어먹을 확률만 어떻게 조절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물론 불가능에 가까운 상상이었지만 말이다.
툭-
“왜요?”
게임을 관전하고 있던 티노가 꼬리로 머리를 건들자, 민성은 슬며시 고개를 까딱이며 작게 속삭였다.
“인간, 그걸 물어봐라, 인간.”
“어떤 걸요?”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었다. 브란, 브론 형제들은 저쪽에서도 알아주는 강자일 뿐더러 독자적인 성향을 가진 놈들이었다. 근데 그런 놈들이 아크네를 따르는 이유가 궁금하다, 인간.”
티노의 말에 민성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브론을 쳐다봤다.
“근데 너희들 듣기론 저쪽 세상에서도 꽤 강자로 통했다던데 왜 너희 같은 놈들이 아크네를 따르는 거지?”
“오호호호. 왜 따르다니요?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군요. 그렇지요, 브란?”
“없지는 않다. 아름다움은 진리다. 우리는 진리를 따를 뿐이다.”
“…….”
민성은 엇갈린 반응을 보이는 아누비스들을 멍하니 쳐다봤다.
‘이 새끼들 설마 미인계에 넘어간 건 아니겠지?’
[3세트를 시작합니다.]
세트를 시작하는 알람에 민성은 고개를 젓곤 게임에 집중했다. 진실은 그들만이 알고 있겠지만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나부턴가.”
민성의 턴에서 2세트가 종료됐기에 3세트의 시작은 브란부터였다. 브란은 지팡이를 들곤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브란의 천칭 위 숫자가 17로 바뀌며 피라미드가 뒤집혔다.
툭-
파란 주사위, 눈금의 개수는 3개였다.
“히히잉!”
주사위가 회전을 멈추기 무섭게 파란 말은 등에 두 마리의 말을 실은 채 8칸에 안착했다. 세 마리의 말이 사막마을을 벗어나 모래 신전에 접어들자, 묘한 긴장감이 경기장 안을 휘감았다. 민성과 아누비스들은 남은 발판 수를 확인하곤 앞으로의 수 싸움을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이번 세트에서 무조건 역전해야 한다.’
이미 말들이 절반까지 온 상황. 모두들 내심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이번 세트가 승부의 분기점이 되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역전하려면 역시 방법은 하나뿐이지.’
브란의 턴이 끝남으로써 놈과의 차이는 동닢 9개. 역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1등 말 배팅에 성공하는 것뿐. 2등 적중은 의미 없다. 민성은 가만히 지팡이를 쓰다듬는 브론을 응시했다. 놈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선택의 폭도 달라진다.
“흠……. 어쩔까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참 어렵군요. 어려워요.”
브론은 투레질하는 알록달록한 말들을 바라보며 코를 긁적였다. 아직 피라미드에서 나온 주사위는 하나. 섣불리 배팅했다간 전 세트에서 맛봤던 굴욕감을 다시 느낄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주사위를 굴리자니 민성에게 기회가 돌아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호호호호, 이럴 때 방법은 하나뿐이겠죠.”
브론은 갑자기 미친 듯 웃으며 배팅카드를 꺼냈던 의자 손잡이를 뒤적거렸다. 그러더니 카드 네 장을 꺼내 내용물이 브란과 민성에게 보이지 않게 손으로 윗부분을 가렸다.
‘역시 이것도 그냥 카드 같은 게 아니었어.’
민성은 브론을 따라 의자 손잡이 안을 뒤적거려 카드 네 장을 손에 쥐었다. 배팅카드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색상을 가진 카드 안에는 민성의 얼굴이 박혀있었다. 처음 배팅카드를 발견했을 때 함께 놓여있던 카드였다. 다만 용도가 불분명했기에 놔두고 있었을 뿐.
“오호호호. 어디 볼까요. 어떤 말이 저를 승리의 길로 인도해줄지 말이죠.”
브론은 검은 손을 이마 위로 붙이곤 발판에서 대기 중인 말들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곧 네 장의 카드 중 한 장을 빼들어 의자의 우측 손잡이에 올렸다. 그러자 카드는 눈 녹듯 사라지고,
[1등 마 배팅 상황판]
브론-?
[결과는 게임이 완전히 종료된 뒤, 합산 집계됩니다.]
수상한 판 하나가 민성의 눈앞에서 둥실거렸다.
‘1등 마 배팅? 설마 경마의 마권처럼 가장 먼저 들어올 것 같은 말에 배팅하는 건가?’
민성의 예측은 정확했다. 아누비스들이 숨기고 있던 또 하나의 룰이기도 했다.
“이런 사항은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오호호호. 물어보셨나요? 안 물어보셨죠? 물어보셨으면 대답해드렸을 텐데 말이죠.”
“이런 빌어먹을 개새끼가 아주 대놓고 수작을 부리네.”
민성은 능멸의 미소를 흘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잔설명은 됐고, 배팅 성공했을 때 얻는 이득과 실패했을 시 리스크나 말해.”
“자신만만하군요? 뭐, 좋아요.”
브론은 만족스레 코를 쓰다듬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1등으로 들어올 말을 예측하여 맞혔을 경우,
1등- 동닢 20개.
2등- 동닢 10개.
3등- 동닢 5개.
배팅 실패 시- 동닢 10개 반납.
또한 만약 민성과 브론이 같은 말에 배팅하여 성공하였을 경우에는 먼저 배팅한 쪽이 1등 보상을, 뒤늦게 배팅한 쪽이 2등 보상을 챙길 수 있다는 게 내용의 골자였다.
‘이건 진짜 리스크가 큰데?’
설명을 들은 민성은 눈가를 긁적이며 고뇌했다. 세트가 종료될 때마다 초기화되는 배팅카드와 달리, 1등 마 맞추기는 게임 자체가 종료될 때까지 유지된다. 말들이 엎치락뒤치락하는 탓에 한 치 앞을 모르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1등 마를 맞힌다?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하지만 만약 놈이 1등 마를 맞혀버리면?’
단박에 동닢 20개를 확보. 1등 혹은 그 언저리까지 올라오는 것이 가능해질 터였다.
“오호호호. 설명 다 들으셨으면 얼른 진행하시지요. 기다리다가 목이 빠지면 그쪽 책임인 거 알지요?”
브론은 차례가 넘어간 것을 어필하며 민성을 독촉했다. 그러나 민성은 가볍게 중지를 치켜 보이곤 생각에 잠겼다. 카드 배팅을 하자니 남은 주사위가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브론을 따라 1등 마 예측에 동참하는 것은 자멸의 길에 빠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주사위를 굴리자니 브론-브란으로 이어지는 순서가 민성의 가슴을 옥죄었다.
‘젠장. 뭘 해도 독박 천지네.’
변수, 변수, 변수 천지다. 그럼에도 잘 선택해야만 한다. 한 번의 신중한 선택이 향후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를 생으로 이끌 것이었다. 통제할 수 없는 확률들이 손오공의 긴고아처럼 민성의 머리를 맹렬하게 죄어왔다.
‘어라? 잠깐만. 이런 수가 있었네?’
“역시 뇌는 생김새를 따라간다더니 제 꾀에 당했네?”
잠시간 고민하던 민성은 브론을 보며 옅게 히죽였다. 오직 그를 견제하고자 했던 놈의 행동이 민성에게 기회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오호호호호. 그게 무슨 말씀이시지요?”
브론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모호한 웃음을 흘렸다.
“아직도 몰라? 수준 알 만하네. 난 이걸 가져가겠어.”
민성은 어깨를 으쓱여 보이곤 손잡이에 손을 뻗어 숫자 10이 박힌 하얀색 카드를 집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