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
233화 - 브란&브론(2)
와르르-
피라미드 끝머리에서 스타팅 라인에 배치된 말들과 같은 색들의 주사위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주사위를 굴리면 동닢을 한 개 얻을 수 있다. 단, 지금은 보여주기 식으로 모든 주사위를 꺼냈지만 게임이 진행되면 한 번에 하나의 주사위만이 적용된다.”
“즉 한 턴에 주사위 하나만 굴릴 수 있다, 이건가?”
“오호호…. 생각보다 예리하신 분이었군요. 좋아요, 아주 좋아요. 이번 게임은 평소보다 더 짜릿하겠어요.”
괴상한 웃음소리와 달리 브론의 가느다란 눈은 민성을 날카롭게 쏘아봤다. 그러나 민성은 깊은 생각에 잠겨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한 턴에 주사위 한 개, 그리고 나오는 주사위는 다섯 색상 중에 하나.’
민성은 생각을 정리하며 레이스에 대기 중인 말들을 바라봤다. 갖가지 색상을 지닌 말들이 색상에 맞는 주사위의 숫자에 맞춰 네모 칸 앞으로 전진해 있었다. 그 중 최선두에 나란히 서 있는 말들은 적마와 청마였다.
‘붉은 말과 파란 말은 주사위 3이 나와 세 칸. 나머지는 한 칸 아니면 두 칸. 단면의 숫자는 3이 최곤가. 방식은 간단하네. 하지만 이래선 단순히 주사위를 많이 굴리는 쪽이 승리하는 거 아냐?’
“오호호호호. 설명도 다 끝났으니 이제 시작해볼까요?”
브론은 주사위의 단면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민성의 어깨를 건드렸다.
“주사위에 속임수는 없겠지?”
“설마요? 일부러 유치한 수작을 부려 게임의 재미를 반감시킬 필요는 없지요.”
브론은 재밌는 농을 들었다는 듯 낄낄대며 손사래 쳤다. 그러나 민성은 슬쩍 고개를 들어 그의 머리 위에서 경기장을 오시하는 뼈다귀 공룡을 바라봤다.
“티노님. 혹시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가서 주사위들 좀 확인하고 와주실 수 있나요?”
만약 티노가 게임에 개입할 수 있다면 피라미드에서 원하는 주사위를 내보내게 하는 것이 가능할 터. 가장 손쉬운 게임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정도는 익은 고기 먹기보다 쉽다, 인간. 다녀오겠다.”
티노는 긍정의 뜻으로 꼬리를 좌우로 흔들어 보이곤 곧장 피라미드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잠시 후,
“여기도 이상한 벽 같은 게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인간.”
‘쯧. 버섯 속도 아닌데 안 된다니.’
“고생하셨어요.”
민성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아누비스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그리곤 의자 등받이에 몸을 바짝 붙였다.
‘뭔가 더 숨기고 있는 것 같지만 일단 시작해보자.’
“좋아. 시작해.”
민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브란은 기다렸다는 듯 황금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지면에 나와 있던 주사위들이 진공청소기에 빨리듯 거꾸로 뒤집혀있던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전진했던 말들 역시 다시 스타팅 라인으로 되돌아갔다.
“그럼 순서는….”
“순서 정도는 내가 정하겠어. 애초에 너희들은 이 게임의 유경험자인 것 같은데 이 정도 페널티는 감수해도 되잖아?”
민성은 브론의 말을 자르며 빙긋 웃어 보였다.
“…오호호호호. 좋을 대로 하시지요.”
‘아직 이 게임에 대해 이렇다 할 정보가 없다. 이럴 때 먼저 하는 건 손해지.’
단순히 주사위만 굴리는 게임이 아닐 것이다. 분명 놈들이 숨기고 있는 함정 혹은 정보가 있을 게 분명했다. 민성은 홀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순서를 지정했다.
순서는 브론, 민성, 브란 순이었다.
“그럼 제가 먼저 굴리지요.”
웃음기를 지운 브론이 가볍게 지팡이를 휘두르자, 피라미드가 뒤집어져 주사위 한 개를 토해냈다.
달칵-
붉은 주사위. 하늘을 보고 있는 단면의 숫자는 3이었다.
“히히힝!”
그에 따라 붉은 말이 세 칸 전진했다. 동시에 브론의 천칭 위로 동닢 하나가 얹혔다. 그러자 천칭 정면에는 체중계처럼 숫자 4가 표시됐다.
‘한 번 굴리면 동닢 하나. 기본 3에서 시작했으니까 동닢에는 1의 가치가 있는 거겠네.’
민성은 그의 영혼을 묶어놓고 있는 천칭을 힐끗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호. 원래 시작은 항상 무난한 법이지요. 그럼 이제 그쪽 차례입니다. 아, 혹시 굴리는 법을 모르시나요? 오호호호. 그냥 자연스럽게 굴리면 됩니다.”
“알아. 굴린다.”
민성은 뾰족한 주둥이를 놀리는 브론을 째려보곤 놈이 했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달칵-
하얀 주사위는 2가 나왔다. 그러자 레이싱 필드에 있던 하얀 말 역시 눈금에 맞춰 두 칸 전진해 붉은 말의 꽁무니를 쫓았다. 민성의 천칭 위 숫자도 4가 됐다.
“굴리지.”
민성의 턴이 끝나자 브란 역시 마찬가지로 피라미드를 뒤집었다.
달칵-
피라미드 끝머리에서 나온 노란 주사위는 지면에 떨어져 1을 내놓았다. 이에 따라 노란 말 역시 한 칸 전진하여 하얀 말 뒤로 바짝 붙었다.
“흠….”
민성은 눈가를 긁적이며 슬며시 아누비스들의 표정을 살폈다.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얼굴과 무뚝뚝한 얼굴. 아직까지 어떠한 기미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냥 먼저 할 걸 그랬나?’
문뜩 민성의 가슴에 옅은 파문이 일었다. 티노의 정보와 달리 사실 저 검둥개들이 압도적으로 멍청하여 함정을 파지 않았다면. 그저 그의 과한 염려가 낳은 의심이 독으로 변한 꼴과 다름이 없었다. 정말 이 게임이 단순히 주사위만 굴리는 멍청한 게임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민성의 생각은 기우에 그쳤다.
“오호호호호호호호호호!”
갑자기 브론이 주둥이를 씰룩이며 미친개처럼 웃어대자, 민성은 수상쩍은 눈으로 놈을 쏘아봤다.
“그럼 이제 본 게임으로 들어가 볼까요?”
브론은 지팡이로 의자의 손잡이 부분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강 사이를 잇는 대교 같은 기다란 판이 튀어나왔다. 판 위로는 각기 주사위와 같은 색상을 가진 수상쩍은 카드들이 놓여 있었다.
“역시 이게 제일 무난한 선택이 되겠군요.”
브론은 그중 빨간 카드를 한 장 집었다.
“그건 뭐지?”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민성은 냉정한 눈으로 카드를 쏘아봤다.
“오호호호. 뭐긴요. 배팅 카드지요. 당신의 의자에도 있는데, 설마 단순히 주사위나 굴려대는 한심한 게임이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죠?”
“….”
민성은 브론의 비웃음을 무시하고 손잡이 부분을 열어젖혀 기다란 판을 꺼냈다.
덜컹-
판 위에는 브론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장의 카드들이 놓여있었다. 민성은 눈가를 거칠게 긁으며 카드들을 살폈다. 카드들은 필드 위의 말들과 같이 각기 빨강, 파랑 등 저마다의 색상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색상별로 두 장의 카드가 자리했다. 다만 다른 카드들과 달리 붉은 카드는 한 장뿐이다.
‘이것들은 대체….’
민성은 붉은 카드를 집었다. 카드 상단에는 숫자 5가 박혀있고, 안에는 힘차게 투레질하는 말의 그림이 들어있다. 하지만 그보다 눈이 가는 건 그림 하단에 위치한 내용이었다.
카드 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등 적중 시 동닢 5개 보상.]
[2등 적중 시 동닢 1개 보상.]
[3등부터 동닢 5개 반납.]
[배팅은 세트가 종료될 때마다 다시 배팅할 수 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네.’
민성은 그저 그런 주사위 게임이라 생각한 그의 가슴을 채찍질했다.
“오호호호호. 절 따라하시는 건가요? 나쁜 선택은 아니지요. 붉은 말이 1등 하면 동닢 5개, 만약 파란 말이 1등을 해도 최소한 동닢 1개는 얻을 수 있으니까요.
브론은 숫자 5가 박힌 붉은 카드를 집은 민성을 보며 폭소했다.
“아, 참고로 제 건 동닢 10개짜리랍니다. 먼저 집는 쪽이 유리한 법이지요. 오호호호호.”
브론은 굳어있는 민성의 얼굴 앞에 숫자 10이 박힌 붉은 카드를 흔들어 보이며 재차 폭소했다.
“이 망할 개새끼가….”
민성은 냉랭한 미소를 흘리며 바삐 머리를 굴렸다. 짜증 나지만 놈의 말대로였다. 이제 피라미드 안에 남아있는 주사위는 파란색뿐. 실질적으로 적색 말이 1등을 차지할 확률이 3분의 2였다.
“공평함이 모토라는 자식들이 하는 짓치곤 너무 쓰레기 같은 거 아냐?”
“그럼 시작 전에 물으셨어야죠? 배팅 시스템이 있냐고 말이죠. 그렇지요, 브란?”
“그렇다.”
브란은 무뚝뚝한 음성으로 브론의 말에 호응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쩐다. 한번 크게 배팅해봐? 아냐. 이건 아냐.’
민성은 파란 말이 그려진 카드에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실질적으로 파란 말이 1등 할 확률은 적었다. 설령 눈금 3이 나온들 공동 1등 아닌가? 여기서는 어쩔 수 없이 한 발 물러나야할 듯했다.
“후….”
결국 민성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숫자 5가 박힌 붉은 카드를 챙겼다.
“오호호호호. 결국 제 말대로 됐군요?”
그 모습에 브론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내 차례군. 그럼 나는 이걸 가져가지.”
민성이 턴을 종료하자, 브란은 숫자 10이 박힌 파란색 카드를 집었다.
“뭐?”
예상외의 선택에 민성은 놀란 눈으로 브란을 바라봤다. 그러나 곧 그 이유를 깨닫곤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은 안전빵, 한쪽은 도박에 가까운 배팅을 하겠다?’
어차피 브론과 그가 두 장의 붉은 카드를 선점한 이상 마땅한 선택지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제 차례군요. 그럼 결과를 지켜보도록 할까요? 굴리지요.”
브론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달칵-
그러자 피라미드 끝머리가 열리고 파란색 주사위가 튀어나와 바닥을 굴렀다.
‘1이나 2! 1이나 2!’
민성은 마른침을 삼키며 주사위가 멈추기를 기다렸다. 3보다 낮은 수의 눈금이 나와야 붉은 말의 1등이 확정된다. 만약 3이 나와 버리면 붉은 말과 푸른 말이 공동 1등이 된다. 그렇게 될 경우 브란과 브론 모두 10의 동닢을 얻게 되어 각각 14, 15의 돈을 확보할 것이고, 민성에겐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툭-
이윽고 뱅글 돌던 주사위가 멈추자 민성은 뚫어지라 눈금을 살폈다. 하늘을 바라보는 주사위의 단면에는 검은 점이 세 개 박혀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운빨 게임을 봤나!’
설마하니 3분의 2 확률을 박살내고 3분의 1이 당첨될 줄이야. 민성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냉정을 유지했다.
“히히잉!”
민성은 씁쓸히 웃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파란 말을 바라봤다. 이로써 획득한 동닢은 각기 브란 14, 브론 15, 민성 9가 될 것이다.
“오호호호…. 설마 3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요.”
브론은 떨떠름한 웃음을 흘리며 턱을 긁적였다.
‘반응이 왜 저래? 좋아해야 하는 것 아냐?’
“히히잉!”
“어?”
그런 브론을 수상하게 바라보던 민성은 난데없는 상황에 놀란 눈으로 필드를 응시했다. 갑자기 붉은 말 위로 파란 말이 올라타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어이, 저건 어떻게 된 거야?”
민성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브론을 노려봤다.
“오호호…. 어떻게 되긴요. 브란의 도박이 제대로 들어갔단 소리죠. 설마 공동 1등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죠? 세상에 1등은 단 한 명뿐이지요. 단독 1등을 하고 싶었는데 아쉽군요.”
‘같은 숫자가 나올 경우, 늦게 나온 주사위의 말이 역전하는 룰인가?’
민성은 눈가를 감싸 쥔 채 발판에 있는 말들을 노려봤다. 아직은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1세트가 종료됩니다. 결과를 정산합니다.]
1등 말, 파란 말.
2등 말, 붉은 말.
3등 말, 하얀 말.
4등 말, 노란 말.
[배팅 결과에 따라 동닢을 지급합니다.]
1등 브란: 14개
2등 브론: 6개
3등 민성. 5개
공동 1등이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브론이 10개의 동닢을 획득하지 못한 건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상황이 유리해진 것은 아니었다. 단독 꼴찌. 민성의 현 상황이었다. 민성은 혀를 차며 말들이 대기 중인 필드를 바라봤다. 발판 수는 총 16칸. 선두에선 말이 13칸만 더 이동하면 게임은 종료된다. 그러나 불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민성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직 13칸 즉 최소 5번의 세트가 존재한다. 그 안에 역전하면 그만이다.
‘잔대가리를 굴렸으면 벌을 받아야지.’
민성은 저들끼리 소곤거리는 아누비스들에게 스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