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
230화 - 아크네의 둥지(1)
“예,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민성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녀석이 자신만만하게 자신만 믿으라 했을 때 만류해야 했다. 덕분에 10분 남짓이면 도착할 거리가 1시간이 넘는 길이 될 줄이야. 결국 경기도 광주까지 찍고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중간에 괴수들의 습격을 당하고 있던 시민들이 아니었다면 더 남쪽까지 내려갔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민성은 모르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그의 뒤를 쫓던 이들은 몇십 배는 느린 속도로 광주를 찍어야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산보했다고 생각해야지, 뭐.’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민성은 씁쓸한 속내를 달래며 바리케이드로 접근했다.
“누구냐!”
“정지! 정지!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어, 알았으니까 너희 지휘관 오라고 그래.”
으레 익숙한 반응이 돌아오자 민성은 하품하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민성의 당당함에 병사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더니 곧 한 명이 다급히 지휘부로 달려갔다.
“충성!”
이윽고 붉은 밥풀을 입에 묻힌 중대장이 헐레벌떡 달려와 민성에게 경례했다.
“인사는 됐습니다. 것보다 식사 중이셨던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민성이 입가를 가리켜 보이자 대위는 입가를 손으로 훑곤 얼굴이 벌게져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 4성 장군 대하듯이 대할 것. 요구하는 게 있으면 전폭적으로 지원해라는 게 주요 골자였다.
“그래요? 그럼 곧바로 내부 상황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중대장은 갓 자대에 배치된 이병처럼 경직된 채 민성을 안내했다.
“민간인인가?”
“그런 것치곤 깔끔한 것 같은데? 위에서 파견 나온 양반인가 보지.”
얼굴에 덕지덕지 위장크림을 바른 병사들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지휘부로 걸어가는 민성을 바라봤다.
“이쪽입니다!”
중대장이 안내한 곳은 장갑차 주변으로 폴대를 세우고 장막 친 임시 지휘부였다. 장막 밑에는 접이식 테이블과 지도, 그리고 지휘봉이 놓여 있었다. 그 외에도 기타 지위가 낮은 간부들이 정렬한 채 그들을 바라봤다.
‘저건…….’
민성은 테이블에 놓인 지도를 힐끗 바라봤다. 지도 안에는 강서구를 확대한 지형과 더불어 경계선 여기저기에 X마크가 처져 있었다. 또한 달팽이 껍질처럼 촘촘히 그려진 둥근 원들도 의문을 들게 했다.
“크흠……. 그럼 비호 대대 휘하에 속해 있는 저희 3중대의 현 상황 브리핑을…….”
“잠시만요.”
민성은 브리핑하려는 중대장을 멈추게 하곤 지도를 가리켰다.
“저 X마크는 뭡니까?”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중대장은 민성이 말을 끊었음에도 목소리를 높여 민성을 칭송하곤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저 X마크는 연락이 두절됐거나 혹은 전선에서 밀린 부대들이 있던 자리를 표기한 겁니다.”
“그래요? 꽤 많이 쳐진 것 같은데. 상황이 썩 좋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민성은 안쓰러움에 혀를 차며 지도를 주시했다. 이종범이나 박정후가 개새끼들이라 해서 그 밑에서 고생하는 병력들까지 개 취급할 필요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또한 상부에서 지원 나온 부대들이 몇 차례 진입했지만 전부 무전이 먹통 됐습니다.”
중대장은 민성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떨구며 비통한 심정을 내비쳤다. 민성은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군인들로 해결될 상황이었으면 이종범이 그를 찾지도 않았을 것이다.
“원인은 알아냈습니까? 부대들이 전멸한 이유요.”
민성은 깍지 낀 채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중대장을 응시했다. 적의 능력을 미리 파악하는 건 기본 중 기본이었다.
“그것이……. 저희도 아직 적의 모습을 정확히 보지 못한 관계로 뭐라 확답을 드리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죄송합니다.”
“……설마 한 명도 살아 나오지 못한 겁니까?”
소문은 진실을 접한 생존자의 입에서 시작되기 마련. 헌데 아무런 정보도 없다는 건 생존자가 전무하다는 소리와 다름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럼 설마 신들도…….’
“잠깐만요. 그럼 혹시 최근에 다수의 젊은 남녀로 구성된 파티가 찾아오지는 않았습니까?”
갑자기 묘한 불안감이 몸을 엄습해오자 민성은 흥분하여 중대장의 어깨를 붙잡았다.
“저, 저희 중대를 방문한 민간인들은 없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분명 기억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요?”
“얼른 다른 부대에도 무전해 그런 일이 있었나 물어보겠습니다!”
민성이 입술을 뿌득 깨물자, 그 모습에 긴장한 중대장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보다 상황 설명을 마저 듣죠. 저 원들은 뭡니까?”
민성은 가볍게 심호흡하며 타들어가는 속내를 달랬다. 아직 두 눈으로 확인도 하지 않은 사항이다. 구태여 최악을 가정할 필요는 없다.
“저 원은 여태껏 확장된 정체불명의 영역을 표시해놓은 겁니다. 거기다 꼭 살아 있는 것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확장하는 탓에 저런 그림이 됐습니다. 저희는 죽음의 선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선이요?”
민성의 물음에 중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선 안으로 진입한 병력들이 전원 연락 두절되어 그리 부르고 있습니다. 그 덕에 저 선이 확장될 때마다 저희도 경계선을 후방으로 물립니다. 처음에는 동네 하나 크기에 불과했는데 증식에 증식을 거듭하더니 어느새 저 크기가 돼버렸습니다.”
중대장은 탄식하듯 설명을 늘어놓으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증식한다고?’
민성은 눈가를 긁적이며 지도를 응시했다. 더 설명을 들어봐야 얻을 만한 정보는 없을 것 같았다. 역시 가장 빠른 방법은 안으로 들어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뿐.
“좋습니다. 설명 잘 들었습니다. 명호 씨의 유능함은 상부에 잘 전달하도록 하죠.”
중대장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힐끗 살핀 민성은 옅은 미소를 보였다.
“가……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그 죽음의 선이란 걸 보러 갑시다.”
“예!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민성이 자리를 박차자, 중대장은 서둘러 그 뒤를 따라갔다.
10여 분 정도 도시 내로 들어갔을까.
“저, 저겁니다.”
중대장은 겁먹은 듯 말을 더듬거리며 옅게 퍼져 있는 노란 선을 가리켰다. 반파된 건물들 사이로 펼쳐져 끝이 보이지 않는 선은 꼭 기다란 뱀 같았다.
‘겉보기엔 별 차이 없는데.’
선 안의 모습은 선 밖의 고요한 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중대장의 조심스러운 염려에 민성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제가 온 이유가 이것 때문이니까요. 것보다 커피나 준비해주시죠.”
“예?”
뜬금없는 민성의 말에 중대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아까 보니까 믹스 커피가 있던데 그걸로요. 식기 전에 돌아오죠. 아, 물은 종이컵 반 정도로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끝으로 민성은 주저 없이 선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민성의 몸은 투명한 공간에 삼켜지듯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다.
“……커피라…….”
중대장은 민성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
선 안으로 진입하자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죽은 도시가 민성을 반겼다. 도시 안은 고요하면서도 스산했다. 인적 없는 도보와 차도에는 주인을 잃은 가게와 차들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발전소고 나발이고 일단 신과 아루를 먼저 찾는 게 급선무다.’
민성이 행동 우선순위를 정하고 움직이려는 찰나,
띠링-
[아크네의 둥지에 진입하셨습니다.]
[아크네의 미혹의 숨결에 중독되셨습니다.]
[이동속도가 5% 감소합니다.]
[공격속도가 5% 감소합니다.]
[일정 시간마다 체력이 감소합니다.]
‘이건 또 뭔데.’
안으로 진입하자마자 연달아 나타난 메시지에 민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묘하게 몸을 짓누르는 느낌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불굴의 의지가 발동합니다.]
[미혹의 숨결의 저항에 성공하셨습니다. 모든 상태이상이 해제됩니다.]
그러나 저주에 걸리기 무섭게 발동된 불굴의 의지가 50% 확률을 뚫고 저주를 해제했다.
“후……. 아크네? 어떤 자식인진 몰라도 시작부터 장난질이 심하네.”
몸을 짓누르던 느낌이 사라지자, 민성은 팔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며 대검을 빼들었다.
“아크네? 아크네라 했나, 인간?”
민성의 중얼거림을 들은 티노는 심각한 얼굴이 되어 주변을 매섭게 노려봤다.
“왜요? 놈에 대해서 좀 아는 거 있어요?”
“놈이 아니고 년이다, 인간. 그리고 나도 직접 본 적은 없다.”
“어쨌든요.”
민성이 어서 설명하라 독촉하자, 티노는 주변을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아두르의 열 손가락 중 가장 교활하고 잔혹한 년이라고들 한다.”
“그래요? 그쪽 세계에서 유명인사였나 보네요.”
열 손가락이라는 말에 민성은 눈을 빛내며 티노의 말에 호응했다.
“유명인사 정도가 아니다, 인간. 아두르가 가장 신뢰하던 수하라 했다. 그리고 그녀의 가장 무서운 점은 눈에 있다.”
“눈이요?”
민성의 물음에 티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누구든 그 차가운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죽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래서 주민들은 그녀를 파멸의 아크네라고들 불렀다.”
“이름은 거창하네요. 그래서 약점은요?”
“모른다. 그녀와 싸우고 살아남은 자가 없어, 그 이상의 정보도 없다.”
티노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일단 눈만 조심하면 되겠네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보죠.”
민성은 납득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키야아아악!”
갑자기 골목 사이에서 괴성과 함께 낯선 존재가 민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사람을 빼닮은 모습에 온 몸에 시멘트를 펴 바른 것 같은 회색 빛깔의 그것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민성을 찢으려 했다.
“이건 또 뭐야.”
민성은 가볍게 몸을 틀어 손톱을 피해내며 그것의 복부 부분에 대검을 그었다.
치익-
“그어어어억…….”
그러자 마나와 체력 타는 소리와 함께, 초콜릿으로 코팅된 아이스크림 갈라지듯 갈라진 회색 표면 사이로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설마 이게 아크네는 아니죠?”
“그럴 리 없다, 인간.”
티노는 강하게 부정하곤 몸을 꿈틀거리는 회색 물체에 가까이 다가가 코를 킁킁 거렸다.
“이거…… 묘하게 익숙한 냄새가 난다, 인간. 꼭 인간과 같은 냄새를 풍기는 것 같다.”
“……설마 저게 저랑 같은 사람이라는 말은 아니죠?”
티노의 말에 민성은 어이없다는 미소를 흘리며 손가락으로 놈이 쏟아낸 선혈을 찍어 코에 갖다 댔다. 지겨울 정도로 맡았던 옅은 쇠 냄새가 코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설마 진짜 사람인가? 아니 그보다 사람이면 왜 이렇게 변한 거지?’
인간 같지만 인간이 아닌 그것이 사실 인간이라면?
“에이, 인간과 비슷한 유사종족이겠지.”
민성은 핏방울을 코트에 쓱 문지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상상이 너무 과했다.
“조심해라, 인간! 또 온다!”
“키아아아아아!”
티노의 경고가 끝나기 무섭게 인간을 닮은 회색의 그것들이 빌딩과 가게 안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환영인사치곤 거창한데.”
민성은 피식 웃으며 대검을 높이 쳐들었다. 그리곤 화살같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