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
229화 - 전장의 불씨는 사그라질 뿐(2)
“네가 한 일 잊은 건 아니지? 그렇게 국민들의 안위 운운하는 정의로운 양반께서 선물로 개목걸이도 주고 미행도 붙이고 지랄을 하셨어요?”
“다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은 절대적이고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럼 네가 그 소수가 되면 되겠네. 내가 왜 그런 희생을 해야 되는 건데? 엿이나 까 잡수세요.”
민성은 더 할 말 없다는 듯 검지를 세워 보이곤 등을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사실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어. 네 동료들이 널 찾겠다고 사지로 들어갔는데. 알고 있나?”
이종범의 나지막한 말에 민성은 다리를 멈칫거렸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자식아.’
이로써 신과 아루, 그 일행을 움직이게 만든 건 놈의 장난질임이 확실해졌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미 알고 있었던 사항이었지만 민성은 모른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신, 아루, 그 외에 네가 끌어들였던 양궁부원들이었나. 전부 강서구로 이동했다. 네가 위험에 처했다고 슬쩍 던져주니 뒤도 안 돌아보고 차에 오르더군.”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여기서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동료들로 장난질하는 걸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게 나랑 뭔 상관인데?”
민성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빙글빙글 웃음 지었다.
“너도 사전에 들었다시피 대규모 병력을 그쪽으로 파견했지만 모두 연락이 끊겼다. 그게 뭘 뜻하는지는 잘 알고 있을 텐데? 동료가 사지로 들어갔다는데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 건가?”
예상외로 무심한 반응에 당혹한 이종범은 놀란 눈으로 민성을 바라봤다.
“동료? 아직 그 나이 되도록 한글을 잘 못 배운 모양인데, 동료는 나와 동등하면서도 서로 도움이 되는 존재를 말하는 거야. 설마 걔네들이 내 동료라 생각한 건 아니지? 그럴 땐 동료가 아니고 수하라 하는 거야, 등신아. 네가 박정후 따까리인 것처럼.”
“…….”
할 말을 잃은 이종범은 이죽거리는 민성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놈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설마하니 동료의식이라곤 조금도 없는 놈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각하께서 두 번이나 언급하셨던 일. 무조건 해결하고 싶었다. 그의 유능함을 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살만 뒤룩뒤룩 찐 돼지 새끼들보다 위에 서야 각하께서 진정 원하시는 나라를 이륙할 수 있다.’
실적을 올려야 각하께서 그의 직위를 올려줄 명분을 얻으실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눈앞의 존재를 어떻게든 움직이게 만들어야만 했다.
“저번에도 말했듯 발전소를 확보해야 당장 서울에 있는 국민들의 추위만이라도 달래줄 수 있다. 안 되겠나?”
결국 백기를 든 이 부장은 한숨을 내쉬며 아쉬운 소리를 뱉었다.
“공짜로 그만큼이나 처리해줬으면 됐지. 갈수록 바라는 게 많아지는 것 같다?”
“이번에는 다르다. 최소 5성짜리 물건을 준비해보마.”
부장은 결국 내밀고 싶지 않았던 두 번째 방안을 내밀었다.
“또 이런 쓰레기 주려고?”
민성은 입고 있던 코트 자락을 잡고 슬며시 흔들어 보였다.
“이번에는 정말 만족할 만한 걸 지급하지. 약속하마.”
“약속?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그럼 먼저 내놔. 알잖아? 선불 아니면 안 받는 거.”
민성이 손을 까딱거리자, 이 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힘들다. 네가 그곳 일을 마무리하는 동안 어떻게든 구해보도록 하지. 내가 제시할 수 있는 마지막 조건이다.”
“흠…….”
민성은 고심하는 척하며 슬며시 미소를 흘렸다. 그가 이번 일로 얻은 이득은 총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가 강서구로 가야 하는 명확한 타당성. 만약 동료의 안위에 눈이 멀어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면, 필시 박정후와 수하들의 의심을 샀을 것이다. 둘째로 민성이 과도한 동료애를 보였다면, 정부는 향후 그들의 안위를 거래 조건으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다. 헌데 그것을 차단했으니 그야말로 입 하나로 두 마리의 새를 잡은 격이었다.
‘거기다 보상까지 합하면 세 마린가?’
민성은 크게 기대 않았던 보상까지 챙긴다는 생각에 자꾸 위로 올라가려는 입술을 단단히 단속했다.
“좋아.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대신 이거 하나만 작성해.”
민성은 업보의 계약서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계약서 내용은 간단했다. 민성이 강서구 토벌을 끝내고 나면 이 부장은 일주일 내로 민성에게 보상을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계약서를 받아든 이종범은 눈매를 찌푸리곤 내용을 살폈다. 혹여나 수작을 부렸나 하여 꼼꼼히 살폈으나 장난질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뭐, 우리가 구두약속 할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잖아?”
민성은 어서 사인하라는 듯 손을 들어 펜을 놀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이종범은 결국 서명을 했다.
“좋아. 그럼 계약도 했으니 이제 일 얘기를 해볼까? 그래서 나는 가서 뭘 하면 되지?”
민성은 계약서에 흘러나오는 빛을 만족스레 바라보곤 이 부장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분명 각하께서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아아, 까먹었어.”
민성이 어깨를 으쓱여 보이자, 이 부장은 민성을 지그시 노려보곤 설명을 시작했다.
“가장 큰 목적은 전력 최대 생산지 중 하나이자, 강서구에 위치한 한국 전력 발전소의 탈환이다. 그곳만 확보하면 어둠도 조금은 가시겠지만, 상당수의 병력을 투입했음에도 탈환하지 못했다.”
빛을 잃은 도시. 꺼져버린 희망의 등처럼 화려한 네온사인 거리와 빌딩들이 뿜어대던 빛들도 죽은 지 오래다. 하지만 전기를 되찾아올 수 있다면 절망에 빠진 국민들의 가슴에 희망의 빛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발전소만 탈환하면 된다는 거네?”
“그래, 반드시. 국민들에겐 작은 빛줄기도 간절한 상황이다.”
그 외에도 정말 발전소가 필요한 이유가 있었지만 민성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다.
“뭐,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민성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검을 어루만졌다. 검면의 까끌한 느낌이 손가락을 타고 몸으로 흘러들어왔다.
‘까짓 거, 미뤄뒀던 퀘스트도 깨고 덤으로 착한 짓도 좀 하지, 뭐.’
놈은 맘에 들지 않지만, 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 빌어먹을 자신감도 이럴 때는 믿음직해 보이는군그래.”
이 부장은 기지개 켜며 하품까지 하는 민성을 보며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자신감 빼면 시체니까.”
“좋다. 참고로 2개 대대가 연락이 두절됐다. 일주일 내로 연락이 없을 시 사망한 것으로 간주하겠다. 세부사항은 강서구 경계선에 배치된 병력들에게 물어봐라. 보고로 들은들 생생한 정보만 못한 법이니까. 또한 필요하다면 전처럼 병력을 이용해도 좋다. 아, 그리고 더불어 도시의 청소도 부탁하지.”
“잡 괴수들까지 처리해라? 아주 등골까지 뽑아 먹으려고?”
민성은 용건을 끝내고 돌아선 이 부장의 등에 소리쳤다.
“이쪽도 상당한 출혈을 감수하는데 그 정도는 서비스로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아, 그리고 길치라는 말이 있던데 혹시 모르니 이쪽에서 지리에 능한 병사 몇을 붙여주도록 하지.”
“충성!”
이종범이 손짓하자 병력들 중 일부가 민성 앞으로 걸어 나와 경례했다.
‘얼레, 이것 봐라?’
그러나 민성은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병사들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그들은 하나같이 일반 병사들과 달리 기묘하고 불쾌한 기운을 뿜어대고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과 디지털 군복 사이로 튀어나온 힘줄도 묘하게 거슬렸다.
“됐어. 혼자 가는 게 편해. 좋은 내비게이션이 있는데 뭣 하러 짐 덩이들을 달고 가?”
민성은 허공을 둥실 떠다니는 티노를 보며 히죽이곤 말을 이었다.
“됐고, 너희는 저기 가서 제설작업이나 도와.”
“예……. 예?”
“퍼뜩 안 가!”
당황한 병사들이 쭈뼛대며 머뭇거리자, 민성은 대검을 빼들고 꽥 소리쳤다.
“예!”
그제야 병사들은 화들짝 놀라 자리를 벗어났다. 와중에 막사 옆에 놓인 눈삽과 넉가래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런 등신 새끼들…….”
이 부장은 멀어지는 그의 수하들의 등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민성의 옆에 찰싹 붙어 그가 숨겨놓은 보물창고를 찾아내길 바랐건만, 사전부터 막혀버렸다.
“근데 시체는 회수해서 어디다 쓰는 거지?”
갑작스런 민성의 질문에 이 부장은 안경을 고쳐 쓰며 천천히 답했다.
“혹시 모를 병마를 대비해 한곳에 모아 태우고 있다.”
“그래? 어쨌든 빠르게 끝내고 연락할 테니까 보상이나 준비해놔.”
민성이 미소와 함께 삽시간에 자취를 감추자, 사람들을 통솔하거나 바삐 눈을 치우던 병사들 중 일부가 무리를 이탈하여 이종범 앞으로 도열했다. 병력들이 도열을 끝내자 이 부장은 병력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겨우 3일간 밖에 있었다고 동사한 놈은 없어 다행이군.”
부장의 짓궂은 농담에 병력들은 킥킥대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제군들도 방금 봤다시피 놈은 상당히 영악하면서도 동료애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졸렬한 놈이다.”
부장은 민성의 비방을 시작으로 묵직한 연설을 이어갔다.
“너희의 임무는 단 하나. 놈을 추적하는 것이다. 놈이 숨기고 있는 창고의 위치를 알아내는 자에게는 국가가 해줄 수 있는 모든 보상이 내려질 것이다.”
와아아-
병력들이 무기를 들어 올리고 환호성을 지르자, 부장은 손을 들어 소리를 잠재웠다.
“단! 추적하되 잡히지 마라. 잡히거든 죽어라. 놈에게 어떠한 여지도 주면 안 된다. 그것이 국가를 위한 헌신의 길이다.”
“폭력에는 더 큰 폭력으로!”
“언제나 방심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염두하고 움직일 수 있도록, 이상.”
병력들이 눈썹 위로 각을 세운 손을 들어 보이자, 부장 역시 마주 경례했다. 이윽고 손을 내린 병력들은 안전지대 한쪽에서 대기 중이던 두돈반과 장갑차에 탑승했다.
부릉-
곧 시동 걸린 두돈반과 장갑차가 이종범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요원들을 싣고 안전지대 경계선을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꿈틀-
이종범의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귀퉁이 부분이 떨어져 나와 어디론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
쾅-
“이런 변변찮은 종족에게 당했던 과거의 내가 증오스럽구나! 죽으렴!”
외마디 함성과 함께 날카로운 돌창이 뺨 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서 오는 무기력감이 몸을 지배한다. 그럼에도 신은 힘이 빠져 떨리는 손으로 겨우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한기를 품은 화살을 날려봤지만 저것은 화살대를 나뭇가지 부러뜨리듯 가볍게 뭉개버린다.
“내…… 무덤?”
신은 작게 중얼거리며 옆에 쓰러져 있는 아루를 바라봤다. 이미 저주가 시작됐는지 그녀의 하반신은 돌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펫은 중상을 입고 역소환당한 지 오래였다.
“잔재주는 충분히 즐겼으니 이제 빨리 죽어줄래?”
“민성…….”
이윽고 저것의 눈이 기묘하게 변해가자 신은 체념한 듯 두 눈을 감았다.
*
강서구 까치산역 부근. 반파된 지하철역은 겨우 이름만을 지키고 있을 뿐, 온전한 형태를 잃은 지 오래인 듯했다. 저 멀리 김포공항이 보였다. 물론 공중을 점령한 괴수들 덕에 뜨는 비행기는 없었지만 말이다.
“뭐야. 엄청 가까웠네.”
민성은 전방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는 군인들을 보곤 혀를 찼다.
“난 지리에 능숙하지 않다. 이건 전적으로 인간의 잘못이다!”
티노는 괜스레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곤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