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
228화 - 전장의 불씨는 사그라질 뿐(1)
‘이는 분명 신께서 시험에 든 인간들을 구제하고자 내린 안배다.’
지루는 감동에 젖어 붉은 눈시울로 텅 빈 허공을 올려다봤다.
“어떻습니까?”
‘이 노인네가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결국 교황 밑으로 들어오라는 소리잖아?’
민성은 피식 웃으며 비숍의 노쇠한 얼굴을 바라봤다.
“조건만 맞는다면 못 갈 것도 없죠. 근데 그거 아십니까? 기존에 검마 님께서는 상당히 좋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전 아직 이 자리에 있죠. 현명하신 분이라면 무슨 말인지 잘 아실 겁니다.”
민성이 어깨를 으쓱여 보이자, 지루는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5성 스킬 3개와 준국보급 아이템 하나를 고를 기회를 제공하겠습니다.”
지루는 손가락 4개를 펴 보이며 민성의 반응을 살폈다. 이 정도면 파격적인 조건이라 해도 충분할 터.
“그게 전분가요?”
하지만 지루의 기대와 달리 민성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당황한 지루는 재빨리 뒷말을 붙이며 노쇠해 굳은 머리를 세차게 돌렸다.
“그리고…… 성녀님과 형제님의 결혼을 타진해보도록 힘쓰겠습니다. 자고로 사람은 지켜야 할 게 많아질수록 강해지는 법 아니겠습니까. 이 늙은이야 이미 하느님과 결혼한 몸이라 힘들지만 형제님은 아직 홀몸이신 것 같으니…….”
노인은 민성이 입을 채 열기도 전에 품속을 더듬더니, 동그란 장치 하나를 꺼내 바닥에 내려놨다.
슥-
그러자 곧 장치 위로 사람의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관심이 동한 민성은 지그시 형상을 응시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비숍님.”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하얀 공간을 감싸는 듯 했다.
‘목소리는 좋네.’
기대와 달리 성녀의 얼굴에는 면사포 같은 천이 둘려 있어 보이지 않았다. 민성은 묘한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살짝 드러난 금발머리와 드레스 위로 드러난 굴곡진 몸매까지 감출 순 없었다.
“성녀님. 다름이 아니고 제가 이번에 성녀님께 어울리는 배필을…….”
“또 그 소리신가요? 항상 말했지만 저는 결혼 같은 거 할 생각 없어요, 그럼.”
지루가 조심스럽게 뜻을 보이자, 성녀는 단칼에 그의 말을 잘라버리곤 통신을 끊어버렸다.
“크흠……. 형제님에게는 참으로 미안하게 됐습니다. 오늘따라 성녀님이 심통이 나신 것 같습니다, 허허. 다음에 다시 정식으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너털웃음과 달리 지루는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장치를 회수했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큰 기대 않았으니까요.”
민성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약간 기대했을 뿐이다. 그리곤 가장 묻고 싶었던 점을 던졌다.
“근데 제가 바티칸으로 간다고 쳤을 때, 이동할 방법은 있는 겁니까? 지금 그놈의 시험인지 뭔지 탓에 모든 길이 막힌 걸로 알고 있는데요.”
검마도 육로를 이용해 돌아가는 판에 유럽까지 이동한다? 가라면 갈 수야 있겠지만 장기간의 행군이 될게 뻔했다.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아직 형제님께 알려드리기엔 조금 이른 감이 있습니다. 형제님이 저희의 진정한 형제님이 되었을 때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호오……. 그래요?”
‘텔레포트 아이템이라거나 혹은 그에 관련된 능력자가 있나 보네.’
민성은 눈을 빛냈다. 여유 있는 모습 속에는 그 방도 또한 준비돼 있는 듯했다.
“그래서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형제님?”
“아뇨. 그런 중대 사항을 당장 결정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갖고 있는 통신 아이템은 없습니까?”
민성은 거절의 뜻을 보이며 동시에 여지를 남겼다.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는 현실. 호의를 보이는 상대를 구태여 내칠 필요는 없었다.
‘또 알아? 이용해먹기 좋은 말이 돼줄지도 모르고.’
“아쉽게도 아이템 창이 넉넉지 않아서 말입니다.”
비숍은 아쉽다는 듯 어깨를 푹 숙여 보였다.
“그럼 다음에 다시 대면할 수 있도록 신께 기도드려보시지요. 저 역시 기도드려보겠습니다.”
“허허, 그러지 마시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방도를 모색해보지요. 신께서 더 좋은 방법을 내려주실지…….”
지루가 못내 아쉬움에 민성의 어깨에 손을 뻗으려는 찰나,
쿵-
적막했던 하얀 공간에 커다란 괴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저건…….’
민성은 소음과 함께 올라오는 하얀 철문을 응시했다. 그리고 하얀 문 맞은편에는 상당히 익숙한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여러분. 관리인입니다. 이런 어수선한 시국에 여러분들을 뵙게 되어 저도 마음이 썩 편하진 않군요.”
엘프의 탈을 쓴 관리인은 허공에 대고 말하기 시작했다.
“저의 상관께서는 평화와 절망이 공존하는 현 상황에 비통해 하시며 어려운 결정을 내리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엘프는 서글픈 미소를 머금곤 말을 이어갔다.
“금일부로 다시 차원 전쟁이 벌어질 예정입니다. 원치 않지만 저는 또 다시 수많은 목숨이 오가는 전쟁터에 여러분을 밀어 넣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해해주십시오. 저 역시 생명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현장에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강제로 내보낸 거였구나.’
민성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점 자유이용권은 다음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라 했으니 말이다.
“전투는 기존과 마찬가지의 룰이 적용됩니다. 위기는 곧 기회라 했습니다. 전투의 매서움을 겪고 살아남을 여러분은 더욱 강해져, 현실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는 괴수들을 어렵지 않게 처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전 언제나 그래왔듯 여러분의 선전을 기원하겠습니다.”
‘이거 나도 미리 준비를 해야겠어.’
관리인의 말을 귀 기울여 듣던 민성은 혀를 끌끌 찼다. 전쟁은 변수가 많다.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으리라.
“형제님. 아무래도 대화는 다음으로 미뤄야겠군요. 조만간 한국으로 사절단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잘 고민해주시기 바랍니다.”
지루 역시 관리인의 말을 듣곤 화들짝 놀라 민성에게 인사하곤 서둘러 타워를 빠져나갔다.
‘일단 빨리 신과 아루를 찾자.’
“아, 그리고 오늘은 한 가지 더 추가사항이 있습니다. 현재 세상을 어지럽히는 괴수들의 수장 아두르에 대해…….”
관리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성 역시 곧 지루의 뒤를 따라 붉은 철문 밖으로 나갔다.
*
“전쟁이라니. 아직 집에 들어가기도 겁나는데 전쟁이라니, 다 죽으라는 소리밖에 더 돼?”
“우리 처지는 안중에도 없다는 소리밖에 더 되겠어요.”
“아니, 차라리 잘됐어. 이렇게 배고프고 괴롭게 목숨을 연명할 바에야 힘을 얻어서 나오면 되잖아!”
‘후……. 아주 개판이구먼.’
타워를 나온 민성은 눈가를 긁으며 주변을 응시했다. 이미 관리인의 말이 전달됐는지 사람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타워를 응시했다. 안전지대 탓에 잊고 있었지만, 이제 24시가 되면 누군가는 저 지옥 속으로 끌려 들어갈 것이다. 암울한 현실을 견디는 것도 벅찬데 새로운 재앙의 예고는 사람들을 좌절 속으로 더욱 몰아넣은 듯했다. 일부는 저들끼리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정숙하십쇼!”
통제하고 있던 군인들이 혼란을 잠재워보려 했지만 좀처럼 사그라들 생각을 않았다.
“기도하자. 부디 신께서 우리 가족의 안전을 보우하시기를…….”
아무리 안전지대에 박혀 있어도 전쟁에 끌려가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어린 자식이 있는 가족들은 서로의 몸을 꼭 끌어안으며 두려움을 달랬다.
‘전쟁이 나쁜 선택은 아니지.’
민성은 처음 타워로 끌려 들어갔던 과거를 떠올리곤 고개를 저었다. 물론 상당수의 사람들은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 희생을 밑바탕으로 강해지는 사람들이 나올 것이고 작금의 상황을 타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인간, 뭘 그리 고민하나! 고민이 있으면 얘기를 해라. 나누면 두 배가 된다고 들었다.”
“그건 기쁠 때 쓰는 말이고요, 이럴 땐 나누면 반이 된다고 해야 맞는 거예요. 그리고 전 고민한 게 아니라 조금 안쓰러워서 쳐다본 거고요.”
“다들 가면이라도 쓰고 다니는 건가? 아직도 인간들의 표정을 읽는 건 어렵다.”
민성이 말을 정정해주자 티노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뭐, 어떻게 보면 그게 평범하면서도 당연한 일이죠.”
“역시 이 몸을 고민하게 만드는 종족은 인간밖에 없다. 무뚝뚝이 인간을 보고 더 연구해야 할 것 같다. 얼른 무뚝뚝이와 멍청한 여자를 찾으러 가자, 인간!”
“가야죠. 다만 그전에 잠깐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분명 보고하러 간 것 같았는데…….’
민성은 그가 타워에서 나오자 어디론가 헐레벌떡 달려갔던 군인을 떠올리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슬슬 입질이 올 시간이었다. 잠시간 타워 언저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민성은 곧 그에게 접근해오는 무리를 보곤 스산한 미소를 흘렸다.
척-
“오랜만이군.”
일개 중대에 가까운 병력을 대동한 이종범은 안경을 고쳐 쓰며 가느다란 눈매로 민성을 응시했다.
“아직도 살아 있었어? 거 목숨줄 하나는 더럽게도 질기시네. 아, 아니면 온종일 안전지대에만 틀어박혀 숨어 지내서 그런가?”
“…….”
민성의 빈정거림에도 이종범은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오늘 저 범을 목적지까지 무사히 유도해야만 한다. 냉정함을 잃는 순간 놈의 페이스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는 너도 뭐 그리 살 게 많아서 상점에 그리 죽치고 있었는지 모르겠군. 아, 혹시 이 현실에서 눈 돌리고 싶어 그런 건가? 그런 거라면 내가 이해해야지.”
“그렇게 당하더니 말재간은 늘었네. 이거 내가 선생 노릇 해줬으니 강의비 받아야 하는 거 아냐?”
민성은 이종범의 미간에서 꿈틀대는 힘줄을 보곤 입술을 씰룩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또 뭔데? 할 말 있으면 메달로 하면 되지.”
“네가 잘 받기만 했어도 내가 직접 찾아올 일은 없었겠지. 그래서 아직도 강서구로 이동할 생각은 없는 건가?”
이종범의 물음에 민성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당연히 없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라, 좀. 보상이라도 괜찮은 걸 제공하면 또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잖아? 거의 무보상이나 다름이 없는데 겨우 5성 나부랭이 아이템이나 받고 협조하라고? 이 자식이 무보수로 몇 번 도와줬더니 아주 날로 먹으려 하네? 그 안에 양심은 있지?”
민성은 손가락을 들어 이종범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이종범은 대답 대신 고개를 슬쩍 돌려 두돈반에 오르고 있는 시민들을 가리켰다.
“현재까지 정리가 끝난 지역의 주민들은 전부 돌려보내고 있다.”
물론 말은 간단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괴수들의 시체를 정리하고 도로를 덮은 차들과 파편을 치우는 등, 도시 복원을 위해 수많은 병력들이 파견 나간 상황이었다.
“근데?”
“너는 저들을 보며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건가? 누군가의 가족 혹은 소중한 사람들이다. 네가 조금만 분발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 근데 너는 오로지 네 안위와 이득만을 위해 움직인다. 너야말로 너무 양심 없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종범의 설득에 민성은 코웃음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