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
225화 - 아린
“진영 이전을 하시려는군요. 진영 이전을 하실 경우, 기존에 몸담고 계셨던 라이든에서 얻은 업적, 길드 하우스, 창설한 길드 등의 소유권을 잃게 됩니다.”
“네, 괜찮습니다.”
이미 그 정도는 전부 예상했기에 사전에 전부 처리하고 왔다.
“또한 한 번 진영을 옮기시면 두 번 다시 진영 이전이 불가하오니, 심사숙고하신 뒤 결정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또한 예전에 스벤에게 들었던 덕에 숙지하고 있었다.
“충분히 고민했으니 바로 옮겨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곧바로 이전해드리겠습니다. 이전 비용은 명예석 500개입니다.”
안내원의 안내에 민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안내원이 민성의 손을 잡으려는 찰나,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누군가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거래를 저지했다.
‘이건 또 뭐야.’
민성은 그와 안내원 사이를 가로막고 서있는 여인을 어이없게 바라봤다. 긴 녹색 생머리에 에메랄드 빛 드레스는 꽤 고상하게 느껴졌지만, 입가에 머무르고 있는 고혹적인 미소는 여럿 남자 잡아먹은 요물의 분위기를 풍겼다.
“지금 제가 용무 보는 중이라 그런데 좀 비켜주실래요?”
민성은 예의 바르게 비켜줄 것을 요구했다.
“저는 운이 좋네요. 작업 준비하러 왔다가 대물을 만날 줄이야.”
여인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수상쩍음을 느낀 민성은 흘낏 닐바스들을 살폈다.
“저 미친년이 왜 여기에 있어?”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입만 뻐끔거리는 닐바스들을 봐선 예사 인물이 아닌 듯했다.
“영상보다 실물이 훨씬 더 나으신 것 같네요.”
영상이란 말에 민성의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보니스처럼 내기에서 털린 년이거나 아니면…….’
부하들이 된통 당했으니 보복하고자 나선 머리일 확률이 높았다.
“뭐, 그런 소리 많이 듣기는 합니다. 미인분한테 듣는 건 더 기분 좋은 일이죠. 근데 단순히 용모나 칭찬하려고 오신 것 같진 않고, 용건이 뭡니까?”
민성은 필요 이상으로 능글대며 상대방이 접근한 이유를 찾아내고자 했다.
“어머나, 보기보다 상당히 직설적인 분이시군요?”
“저 같은 부류는 시간이 금인지라 지금도 돈이 줄줄 새는 것과 다름이 없거든요.”
민성은 코트의 주머니를 밖으로 삐죽 내보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요. 그럼 원하시는 대로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죠. 오만한 선인의 돌은 포기할게요.”
“야, 이 미친년아! 애초에 네 것도 아니면서 누구 마음대로 포기하네 마네 하는 거야!”
갑작스레 끼어든 닐바스는 여인에게 삿대질하더니 민성의 양 어깨를 콱 잡곤 작게 속삭였다.
“빨리 진영 이전부터 끝내. 지금 당장!”
조급해 보이는 닐바스의 모습에 궁금증이 동한 민성은 눈을 치켜떴다.
“누군데 그래?”
“마이스터의 수장이라고! 드라이어드 로드, 아린!”
닐바스의 말에 민성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여인을 주시했다. 유사인종인 줄 알았건 만 자세히 보니 녹색 머리카락이라 여겼던 것은 가느다란 풀 줄기였고, 에메랄드 빛 드레스 사이로 나무의 잔뿌리 같은 것이 언뜻 보였다.
“저 미친년이 왜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나 해서 말해두겠는데 절대로 싸울 생각은 하지 마. 뼈도 못 추릴 거라고.”
겁에 질렸는지 닐바스의 비늘 가득한 손에서 작은 떨림이 전해져왔다.
“적어도 끼어들 장소인지 아닌지 구분할 정도의 지능은 있는 쓰레긴 줄 알았는데. 누가 이것 좀 치울래?”
아린이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오가는 손님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던 그녀의 수하들이 말없이 다가와 닐바스를 끌고 가 사라졌다.
“갸아아아악!”
이윽고 접수처 한쪽에서 닐바스의 비명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천벌이 연달아 떨어져 내렸다.
“천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걸 보니 수하들의 충절이 상당히 깊은 모양입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성은 놀란 감정을 숨기며 담담히 말했다. 고작 닐바스를 구석에 치우라는 명령에 목숨을 내던지리라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이스터에 들어오려면 기본이죠.”
아린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안면이나 트자고 접근하신 건 아닐 테고, 돌을 회수하러 온 겁니까?”
“원래는 그럴 계획이었어요. 애초에 돌을 얻을 수 있게 간접적으로 지원해줬더니 이제 와서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당연히 제 것 아닌가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소유권은 당사자에게 있죠.”
터무니없는 물음에 민성은 피식 미소를 흘렸다.
“그러는 그쪽도 돌을 얻으려고 비킬을 삼킨 것 아닌가요?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쓰레기가 갖고 있었다면 모를까, 당신이 갖고 있으니 회수는 어려울 것 같고 말이죠. 달라고 해도 그냥 내줄 것 같지도 않고, 이쪽의 불찰도 컸고요.”
여인이 한숨 쉬며 고개를 젓자, 민성은 이채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닐바스에게서 돌을 넘겨받았다는 사실은 비킬 길드원들이 아니곤 아무도 모를 터. 헌데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그 사실을 늘어놓으니 조금 놀라운 감정이 들었다.
“서비스로 하나 알려드리자면, 누구에게 넘어갔는지 파악할 수 있는 아이템이 있어서요.”
“재밌는 스킬을 갖고 계시는군요. 그래서, 돌에도 관심을 잃으신 분이 무슨 용무신지?”
민성은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순탄하게 가긴 글렀으니 여차하면 전투도 불사할 계획이었다.
“보아하니 진영 이전을 하시려는 것 같은데, 그보다 더 좋은, 부와 명예가 따르는 길을 제시하려고요.”
오만한 말투와 달리 여인은 매혹적인 눈웃음을 던지며 손을 내밀었다.
“제 손을 잡아요. 이 손은 당신을 정상으로 이끌어줄 신의 손이니까요.”
“지금 헤드 헌팅 하시는 겁니까? 물에 쓸려나간 부하들의 원망이 자자하겠는데요?”
민성은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에게 수옥에 몰살당한 전투의 기억을 상기시켜줬다.
“애초에 그 정도 능력밖에 없던 놈들이니까요. 그쪽이 원한다면 전투에 참여했던 길드원들은 전원 방출하도록 할게요. 안 그래도 블랙 스미스의 장 자리가 비었는데 그 자리도 내드리죠. 돌의 소유권도 인정하고요. 어때요?”
그녀는 커다란 선심 쓴다는 듯 오만으로 찬 눈을 치켜뜨며, 어서 잡으라는 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상당히 파격적인 제안이군요.”
민성은 구미가 당긴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골똘히 고민했다.
“A랭크 수백보다 S랭크 하나가 더 절실하니까요.”
아린은 재차 손을 흔들며 고심하는 민성에게 미소를 보였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고민해도 결국에는 그녀의 제안을 수용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마이스터의 위명은 그만큼 크고 강대했다.
“근데 어쩐답니까. 제가 욕심이 좀 많아야 말이죠. 태생적으로 누구 밑에 들어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길드장 자리를 넘겨주신다면 생각이 좀 달라질지도 모르겠는데요. 어때요?”
잠시간 고민하는 척하던 민성은 씩 웃으며 역으로 손을 내밀었다.
“……제가 잘못 들었나요? 지금…… 뭐라고 했죠?”
갑작스런 민성의 태세변환에 당혹스러움을 느낀 아린은 말까지 더듬거리고 말았다.
“아니면 진영 이전해서 내 길드에 들어오는 건 어때? 나쁘진 않게 대접해줄게.”
민성은 쐐기를 박겠다는 듯 말까지 놓으며 한껏 빈정거렸다.
“……좋아요. 명색이 S랭크인데 그 정도 기백은 있어야 이쪽도 영입할 맛이 나죠. 포가든으로 따라와요. 마이스터의 실체를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테니까요.”
아린은 모욕감에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손을 내렸다.
“뭔 소리야? 다음은 없는데?”
민성은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곤 뻘쭘하게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안내원의 손을 콱 잡았다.
“에드워드한테 호출돼서 욕먹기 싫으면 컴퍼니로 진영 이동시켜, 지금 당장.”
“네?”
점장의 호출이라는 소리에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떨더니 황급히 민성이 내민 손을 잡았다.
“……네, 명예석 500개 확실히 받았습니다. 지금 당장 이전해드리겠습니다.”
안내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팔뚝에 달려있던 나무 문양은 사라지고 도시 문양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완료됐습니다. 새 진영에서 원하시는 꿈을 이루시길. 저…… 근데 점장님과는 무슨…….”
“간단해서 좋네.”
안내원의 조심스러운 질문을 묵살한 민성은 팔뚝을 힐끗 살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아린은 얼떨떨한 얼굴로 민성의 팔뚝을 바라봤다.
“무슨 짓이긴 무슨 짓이야. 생각을 좀 해봐라. 용대가리가 될 수 있는데 내가 뭐가 아쉬워서 뱀 꼬리 하러 네 밑으로 기어들어가냐. 다음에는 진영전에서 보자.”
민성은 양 중지를 치켜 보이곤 멍하니 상황을 관전하고 있던 아티아에게 소리쳤다.
“아티아, 당장 닐바스 데리고 컴퍼니로 넘어가. 중앙대로만 넘으면 못 쫓아온다며?”
“……네? 네!”
아티아는 보니스와 함께 손님들 속으로 사라졌다.
“좋은 말 잘 들었고, 다른 호구 알아봐. 알았지?”
“가긴 어딜 가!”
민성이 비웃음을 던지며 이동하려 하자, 살기가 가득 담긴 아린의 외침에 접수처는 일순간 정적에 휘감겼다.
“대접 좀 해주니까, 감히 나를…… 나를 물 먹여?”
“왜? 그걸로 부족했어? 어지간히 수분이 부족했나 보네.”
“이 새끼가!”
민성의 빈정거림에 눈이 뒤집힌 여인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작게 중얼거리자, 두 줄기의 빛이 민성을 향해 쇄도해왔다.
[아린님이 ‘강제 호출’을 사용하셨습니다. 5초 후, 무신 경기장으로 이동됩니다.]
[아린님이 ‘갈취’를 사용하셨습니다. 명예석 8.,500개가 승리보상으로 지정됩니다.]
‘S랭크는 얼마나 강한지 구경 좀 해보자.’
“자신 있어? 난 자신 있는데.”
일부러 빛에 강타당한 민성은 슬며시 대검을 꺼내들며 여인에게 손가락을 까딱여 보였다.
[4…….]
“지옥에서 울부짖게 만들어주마.”
여인 역시 표독스럽게 민성을 쏘아보며 비수를 꺼내들었다.
[2…….]
카운트가 줄어들자, 민성은 여유롭게 전투에 돌입할 준비를 하려 했다. 하지만,
스윽-
‘이건 또 뭐야?’
갑작스레 민성의 몸이 빛에 휘감기기 시작했다.
띠링-
[지배자의 권능, 상점 자유 이용권의 기간이 만기됐습니다.]
“뭐?”
느닷없는 알림에 민성은 당혹감을 느꼈다.
“도망치지 마! 이 개자식아!”
하지만 표독스러운 얼굴로 달려오는 여인을 보니 절로 미소가 나왔다.
“어쩐다냐, 시간이 다 됐다는데. 말했잖아. 내 시간은 금이라고. 그리고 적당히 좀 처먹어. 돼지새끼도 아니고 그렇게 처먹으려고 하다가 배 터진다. 그럼 다음에 진영전에서 보자.”
[스킬 해당자가 구역을 이탈했습니다. 강제 호출이 취소됐습니다.]
[스킬 해당자가 구역을 이탈했습니다. 갈취가 취소됐습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분을 이기지 못한 아린의 괴성을 마지막으로 민성의 몸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
타워 인근의 안전지대. 병사들이 눈삽과 넉가래를 이용해 막사 주변에 쌓인 눈을 밀어내고 있었다.
“젠장. 4월에 제설작업이라니. 여기가 강원도도 아니고.”
“끙차! 그러게 말입니다. 하늘도 무심한 것 같습니다.”
병사들은 눈 더미를 구석에 쌓으며 푸념을 늘어놨다. 한창 벚꽃이 져야 할 4월임에도 눈발은 좀처럼 사그라들 생각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