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
224화 - 진영 이전
“잡담할 시간에 발을 놀리라고. 아니면 다 같이 사이좋게 손잡고 경기장으로 가든가.”
어느새 되돌아온 민성은 서로 마주 노려보고 있는 여인들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길드장님! 저희는 잘 따라가고 있었는데 이년이 저희 위치 알리려 하는 것 같아서 그만……. 혹시 알고 보니 마이스터에서 붙인 스파이인 건 아닐까요?”
아티아는 민성의 팔에 찰싹 달라붙어 눈웃음치며 교태를 부렸다.
“…….”
그런 아티아의 모습에 보니스는 헛웃음 흘리며 허공을 응시했다.
“아티아. 우리 종족에게도 청각 기관이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아티아는 시무룩해져 하얀 날개를 축 접어 보였다. 분명 시야에서 사라진 걸 확인했건만 하여튼 귀신같은 남자였다.
“그렇다고 틀린 말 한 건 아니니까 한 번은 용서하마.”
“네!”
아티아가 활기를 되찾자, 민성은 발로 애꿎은 바닥만 헤집고 있는 보니스를 바라봤다.
“내 지인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더 설명이 필요해?”
“아니요. 충분히 이해했어요. 얼른 가요.”
보니스는 힘없이 고개를 젓곤 걸음을 옮겼다.
“하아…….”
민성은 축 처진 보니스의 등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경기장으로 끌고 가 정신교육을 시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의견 또한 오답은 아니었기에 넘어가기로 했다.
‘거기다 앞으로 내 뜻대로 움직여줘야 하는데 고작 이런 일로 의욕을 꺾을 순 없지.’
더욱이 이번 일로 계약서의 처벌 사항을 무릅쓰고 뒤통수를 칠지도 모를 일. 그런 싹은 사전에 잘라내야만 했다.
“보니스.”
“……네?”
민성의 부름에 보니스는 걸음을 멈추고 힘 빠진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네 입장에서만 생각 말고 내 입장에서 생각을 해봐. 대면한 지 겨우 4일째다. 내가 믿음을 주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라고 생각 안 해?”
민성의 물음에 보니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상의 믿음을 얻고 싶으면 일단 성과를 보여. 그럼 그땐 나도 믿음을 주마. 참고로 난 한 번 믿음 주면 뒤통수 맞을 때까진 믿어준다. 똑똑한 너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잘 알거라 생각한다.”
“……그럴게요. 저도 딱히 잘한 건 없으니까요.”
보니스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는 아티아를 보곤 헛웃음을 흘렸다. 저런 여시 같은 년과 함께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날이 막막했지만 말이다.
“그래. 이제 어느 정도 앙금들도 풀린 것 같으니 서둘러 이동하자.”
민성은 닐바스들의 걸음을 재촉하며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닐바스들 역시 각자의 생각과 고민들을 안은 채 민성의 뒤를 따랐다.
“아, 보니스. 네 활동 자금은 닐바스에게 맡겨놨다. 넉넉하게 줬으니까 필요할 때 찾아서 써.”
“…….”
갑자기 민성이 고개를 돌려 잊고 있었던 사항을 알려주자, 보니스는 동그래진 눈으로 민성의 넓은 등을 바라봤다.
‘성격은 더럽고 까칠해, 오류 덩어리지만 의외로 믿을 만 할 것 같기도 하고…….’
불편한 심기 탓에 늘어져 있던 보니스의 입가에 따듯한 미소가 번져갔다.
“거봐. 코인보다 확실한 보증 수표가 없다니까. 그치?”
보니스의 심경변화를 눈치챈 아티아는 싱글싱글 웃으며 보니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보니스는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에 얹혀 있던 손을 밀어냈다.
“저런 물주…… 대단하신 분이 길드장이 되셔서 참 다행이야.”
“……나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지?”
가만히 있던 닐바스는 괜히 헛기침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머,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속 좁은 전 길드장님께서 찔리시는 구석이 있으신가 봐?”
“확실히 전 길드장님께선 부족한 부분이 많으셨어요.”
하지만 돌아온 것은 그새 의기투합한 여인들의 경시뿐이었다.
“끙…….”
괜히 꼈다가 본전도 못 건진 닐바스는 먼 산을 바라보며 처연한 미소만을 지었다.
터벅-
그렇게 한참 길을 걷던 민성들은 별 탈 없이 하이린 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윽고 민성들을 태운 특급 탈것, 엘리멘탈 와이번 두 마리가 하늘로 치솟더니 이내 구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
쿠워억-
한참 비행한 끝에 민성들은 중앙대로 인근에 착륙했다. 민성은 잡고 있던 엘리멘탈 와이번의 화사한 갈기를 놓곤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 뒤로 환각의 망토를 걸친 닐바스들이 차례차례 등에서 내려왔다.
“이제 옮기고 나면 추적당할 일도 없겠네요.”
새 출발 할 생각에 아티아는 들뜬 모습을 보였다.
“진작 옮기지 그랬어?”
“그런 생각 왜 안 해봤겠어요. 몇 번이고 옮기자고 하면 뭐 해요. 말을 들어 처먹어야죠.”
민성의 물음에 아티아는 닐바스를 날카롭게 쏘아봤다.
“나라고 생각 안 한 줄 알아? 컴퍼니 쪽이 고인 물이 심하다고 해서 망설였던 거지…….”
닐바스는 무안했는지 여러 차례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고인 물. 유입되는 인구가 적어 기존 세력들끼리 해먹는 것을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닐바스의 간략한 설명에 민성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초심자들이 적으면 빨아 먹을 명예석도 제한될 터. 진영을 옮기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됐다.
“근데 라이든도 초심자들만 더 많을 뿐이지 딱히 다를 게 없었잖아?”
“……그건 그렇지.”
아티아의 매서운 질문에 닐바스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라이든 역시 3대 길드가 반 점령하듯 운영하고 있었기에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고인 물은 퍼내고 우리가 새로운 물이 되면 되지. 간단해서 좋네. 그치?”
“뭐…….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닌데…….”
“그럼요. 길드장님만 계시면 뭔들 못 하겠어요.”
“……가능할까요?”
민성이 싱긋 웃으며 묻자, 닐바스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당연히 가능하지. 내 말만 따르면. 일단 들어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을 알려줄게. 내 차원의 일을 마무리할 때까진 못 올 확률이 높으니까.”
민성은 눈을 돌려 혹시 모를 추적자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일단 무슨 일이 있어도 옆으로 새지 말고 들어가면 곧바로 진영부터 옮겨. 그리고 진영을 옮기는 대로 아티아는 새 길드 하우스 알아보고 길드원들 모집해.”
원래 길드원을 모집할 생각은 없었으나, 진영전에서 길드원들의 활약 역시 공훈을 쌓는 데 효과적이라는 보니스의 설명을 듣곤 생각이 바뀌었다. 뿐만 아니라 항상 투기장에서 죽치고 있을 수도 없었기에 추가 인력은 반드시 필요했다.
‘지금은 아티아에게 맡기지만 시간이 되면 내 입맛대로 골라야지.’
“네! 저만 믿으세요, 길드장님! 예쁜 집으로 알아볼게요.”
아티아가 날개를 작게 흔들어 보이자, 민성은 고개를 저었다.
“예쁜 건 됐고. 길드원도, 집도 실속 있는 걸로 알아봐. 그리고 보니스.”
“네.”
민성의 부름에 작은 난쟁이 소녀는 고개를 쳐들었다.
“너에게는 딱히 할 말은 없고, 계약서 내용대로만 움직여주면 돼. 머리 좋은 녀석이니까 알아서 잘해주리라 믿는다.”
“……네.”
적절한 칭찬은 난장이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칭찬 탓인지 보니스는 빨개진 얼굴을 가리며 작게 답했다.
“마지막으로 닐바스.”
“음?”
닐바스는 모른 척 되물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얼굴에는 막연한 기대심을 품고 있었다.
“꼭 혼자 결정내리지 말고 꼭 함께 논의하고 움직여. 넌 혼자 결정내리면 피 보는 스타일 같으니까.”
“…….”
기대와 달리 따끔한 충고가 돌아오자, 닐바스의 얼굴은 구겨진 종이처럼 쭈그러들었다. 하지만 민성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만약에 돌발 상황이 벌어져도 내가 커버할 거니까, 너희는 신경 쓰지 말고 진영 이전하고. 내가 복귀할 때까지 말한 대로 활동해주면 돼.”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자, 민성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아. 언급한 대로만 행동한다면 이변은 없을 거다. 그럼 가자. 유령 출몰.”
민성 역시 닐바스에게 받은 환각의 망토를 두르곤 작게 중얼거렸다. 투명해진 이들은 곧 중앙대로로 접어들어 접수처 안으로 들어갔다.
접수처 안으로 들어서자, 민성은 혹여나 있을 함정이나 매복을 대비해 주변을 살폈다.
“컴퍼니 진영의 리바풀 길드에서 신규 길드원들을 모집합니다! 원래 충원 계획이 없었으나 아쉽게도 이번에 몇 분이 이탈하게 된 관계로 추가로 길드원들을 모집하게 됐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500위권 안에 드는 랭커분들도 몇 분 포진하고 계십니다. 소수정예를 추구하는 길드라 딱 3분만 모시겠습니다. 많은 지원 부탁드립니다!”
“설립된 지 30년이 넘은 유래 깊은 감바니 길드에서 가족 분들 모십니다! 비록 차원과 생김새는 다르지만 저희는 가족 같은 관계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최소 B랭크 이상인 분들만 지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행히 이렇다 할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라이든과 컴퍼니 진영 마크를 단 손님들, 그리고 상점 입장 횟수 10번을 채워 새로 유입된 이들로 벅적거리고 있었다.
[앞장서.]
민성이 입을 뻐끔거리며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닐바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접수처 안내원을 향해 걸어갔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갈게.’
민성은 그를 찾아 헤매고 있을 동료들을 떠올리곤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곧 만날 수 있다. 진영 이전을 마무리하는 대로 돌아가 신과 아루를 찾는다. 민성이 굳은 다짐을 한 채, 안내원에게 걸어가는 와중,
툭-
누군가가 투명해진 민성의 어깨를 건드렸다. 민성은 반사적으로 대검을 빼들며 뒤로 돌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 퍼뜩퍼뜩 다닐 것이지 어딜 그렇게 처박혀 있었나!”
익숙한 깐족거림, 뼈다귀만 남은 공룡이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구경은 잘 했어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민성은 대검을 내리곤 입 모양으로 반가움을 표했다.
“인간, 벙어리가 된 건가? 왜 말을 못 하나? 내가 인간을 위해 이곳에서 무려 3일을 기다렸는데, 반응이 고작 그것밖에 안 되나!”
하지만 민성의 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티노는 턱주가리를 딱딱대며 열을 올렸다.
‘아이고, 이 답답한 녀석아. 그렇게 나랑 지냈으면서 감을 못 잡냐. 딱 보고 눈치를 채야지.’
민성은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두드려 보였다.
“뭐 해?”
닐바스들이 어서 오라오는 듯 손짓하고 있었다. 투명화가 풀린 것을 봐선 진영 이전을 끝낸 듯 했다.
“기다려줘서 고마운데 조금 있다가 얘기합시다.”
어차피 저들이 모습을 보인 이상, 더 이상 투명화가 의미 없다 판단한 민성은 스킬을 해제하곤 서둘러 안내원을 향해 달려갔다.
“다 끝냈어?”
민성은 안내원 옆에서 대기하던 닐바스를 바라봤다.
“너만 하면 돼.”
닐바스는 팔뚝을 가리켜 보였다. 라이든을 뜻하던 나무 문양 대신 컴퍼니의 도시 문양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그래?”
민성은 고개를 끄덕이곤 안내원 앞에 얼굴을 디밀었다.
“어서 오세요. 또 하나의 전쟁터 투기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떤 용무로 오셨는지요?”
“진영 이전을 하려고 합니다.”
안내원의 상냥한 물음에 민성은 무뚝뚝하게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