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
223화 - 참 쉽죠?
“근데 문제가 있어요.”
더 이상 이견이 없자 보니스는 좌중들을 둘러보며 못다 한 말을 이어갔다.
“뭔데?”
“포위는 어떻게 하려고요? 위장 망토도 무용지물이라 지금 나갔다간 바로 경기장으로 끌려 갈 것 같은데. 방도는 있나요?”
보니스의 물음에 민성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건 네가 생각해야 할 문제 아냐? 그러라고 계약한 건데 벌써 밑바닥을 드러내서야 쓰나?”
“아니, 애초에 정답이 정해진 문제를 저보고 뒤집으라고 해봐야 가능할 리 없다는 거 알잖아요! 적어도 상식이 허용되는 판을 제공하고 머리 굴려보라 하셔야죠!”
빈정거림에 가까운 민성의 물음에 보니스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목청을 높였다.
“상식?”
“그, 그래요! 상식이요!”
민성이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차 싶었던 보니스는 괜히 주눅 들어 말을 더듬거렸다.
“상식 좋지. 상식적으로 행동하면 적어도 손해 볼 일은 거의 없으니까. 내가 널 고용하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도 그거였고. 여기 있는 놈들은 다 정신 나간 놈들뿐이라, 제정신에 짱돌도 좀 굴릴 줄 아는 녀석도 한 명쯤은 있어야지.”
민성은 닐바스들을 가리키며 보니스를 추켜세웠다.
“그렇죠.”
보니스는 민성의 말에 호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녀 말고는 이렇다 할 정신머리를 가진 이가 없는 듯했다.
“근데, 상식적으로만 생각하고 움직이면 아무것도 못 해.”
“네?”
“애초에 상식이 통하는 곳이었어? 아니잖아. 그랬으면 네가 나를 만날 일도 없었을걸?”
민성의 물음에 보니스는 얼마 전 악몽에 가까웠던 현실을 떠올리곤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건데요.”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도 좋지만 언제나 예외, 변수를 생각하고 움직여. 알았지?”
민성은 무릎을 구부려 보니스의 어깨를 툭툭 건드려 준 뒤,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소리쳤다.
“자, 걱정들 말고 나갈 준비 해!”
“…….”
보니스는 그런 민성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 쉬었다. 이윽고 빠르게 나갈 채비를 끝마친 닐바스들은 문 앞에 서 민성을 바라봤다.
“아까워 죽겠네…….”
길드 창고와 개인 창고 등에 있는 물건들은 놔두고 가는 탓에, 닐바스는 아쉬움에 입맛만 다셨다.
“전부 쓰레기들 밖에 없던데 뭐가 아쉬워?”
“아니, 뭐, 그냥 그렇다고…….”
노력의 부산물들을 쓰레기로 변모시키는 민성의 언행에 닐바스는 씁쓸하게 웃음 지을 뿐이었다. 그러나 대가로 그 이상의 코인을 받았으니 뭐라 딴죽 걸기도 어려웠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길드장님이야 확실히 탈출할 수 있다 해도 나머지는…….”
보니스는 여전히 불안했는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러나 민성은 손가락을 들어 달싹거리는 보니스의 입에 갖다 댔다.
“말했지? 언제나 변수를 생각하라고.”
“…….”
보니스는 민성의 손가락을 옆으로 밀어내며 빙긋 웃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저놈의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유령 출몰.”
민성이 작게 중얼거리자, 투명한 막이 그들을 덮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거면 별 탈 없이 빠져나갈 수 있겠어.”
이미 앞전 전투에서 그 효능을 경험했던 닐바스는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이건 뭐죠?”
영상에선 나오지 않았던 민성의 새로운 능력에 놀란 보니스는 동그래진 눈으로 반투명해진 민성을 바라봤다. 영상 이후로 더 이상 놀랄 일이 없다 생각했건만, 저놈은 무슨 도깨비 주머니도 아닌 것이 끊임없이 그녀를 놀래킨다.
“아무래도 스킬 같은데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
아티아는 이 상황이 익숙한지 조용히 속삭이며 보니스를 다독였다.
“아뇨, 그래도 그렇지…….”
“괜히 토 달아서 그의 심기 건드려서 좋을 건 없잖아요? 저희는 적당히 장단이나 맞추면서 떡이나 얻어먹으면 돼요. 알았죠?”
아티아는 보니스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이곤 민성의 등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리 넓진 않았지만 어지간한 남성 천족보다 훨씬 듬직해 보였다.
“그럼 나가자.”
문고리를 돌리려던 민성은 손을 멈칫거리더니 힐끗 뒤를 쳐다봤다.
“그리고 충격 받으면 풀리니까 조심해서 움직여. 풀리면 버리고 간다.”
민성은 닐바스들이 채 답하기도 전에 문고리를 힘껏 돌렸다.
덜컥-
“열렸다!”
3일간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자, 길드 하우스 주변을 지키고 있던 마이스터 길드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문 주위를 둘러쌌다.
“그럼 그렇지. 제깟 놈들이 나오지 않고서야 배기겠어?”
최소 한 달은 버틸 줄 알았건만 고작 3일 만에 백기를 들 줄이야. 놈들의 빈곤한 재정 상황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래서 줄을 잘 서야 하는 거야. 다른 길드 들어갔어 봐.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그들은 낄낄대며 민성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쥐새끼 한 마리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왜 안 나와?”
“어이, 플루크! 조금 떨어져 주라고! 겁먹어서 못 나오고 있잖아!”
“아아, 그런 거였어? 비킬 양반들! 안 잡아먹으니까 천천히들 나오라고!”
플루크라 불린 양철 깡통같이 생긴 이는 검을 뒤로 내저으며 길드원들을 뒤로 물렸다. 그때,
“응?
살랑이는 바람 속에서 낯선 향기가 그의 후각기관을 스치고 지나갔다. 수상쩍은 느낌에 플루크는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그의 길드원들과 산간초목들 뿐이었다.
“착각한 건가……. 조만간 다시 기름칠 해야겠네.”
플루크는 그의 가슴에 달린 작은 버클을 건드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 이미 투명해진 민성들이 그들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벅-
새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울리는 오솔길. 길에는 행인 한 명 없건만, 흙 위로 주인 없는 발자국들이 규칙적으로 새겨지고 있었다.
“스킬 해제.”
이윽고 작은 중얼거림 소리와 함께 투명했던 민성들의 모습이 숲길 위로 드러났다.
“후……. 걸리는 줄 알았어요.”
보니스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밭떼기처럼 평평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거야, 믿음이.”
닐바스는 난장이를 내려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곤 한쪽 눈가를 찌푸리고 있는 민성을 바라봤다. 성격은 더럽게 까칠해도 실력만큼은 확실한 존재. 아군 입장에선 이보다 듬직할 수는 없었다.
“그런 것치곤 손이 떨리고 있는 것 같은데?”
“무, 무슨 소리야! 알잖아! 나 수전증 있는 거!”
아티아가 딴죽 걸자 닐바스는 황급히 손을 가리며 목청을 높였다.
“흐응? 그랬었나?”
“아무리 길드 하우스 말곤 관심이 없어도 그렇지, 나랑 한 시간이 얼만데 길드장…… 전 길드장이 갖고 있는 지병도 모를 수가 있어?”
“내가 그것까지 알아야 할 이유는 없으니깐?”
아티아가 환한 미소를 보이자, 닐바스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 좋아하기에는 너무 이른 거 같은데. 갈 길 바쁘다. 잡담할 시간에 발을 놀려, 발을.”
민성은 그런 이들을 보며 차가운 말을 던졌다. 그리곤 서둘러 숲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갑작스레 민성이 던진 냉랭한 한마디에 탈출의 기쁨을 만끽하던 이들은 할 말을 잃고 서로를 바라봤다.
“원래 저런 성격이에요? 혹시 조울증 앓고 있는 건 아니죠?”
“글쎄……. 뭔가 급한 일이 생긴 걸 수도 있지. 낸들 알겠어?”
보니스가 작게 소곤거리자, 민성의 뒤를 따라 걷던 닐바스는 민성을 두둔하며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평생의 전우라 생각했던 스벤의 속내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겨우 만난 지 일주일도 채 안 된 민성의 속내를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가요? 동굴에 불이라도 났나 보네요.”
보니스는 짧은 다리를 바삐 놀리며 잘게 흔들리는 검은 코트 끝자락을 바라봤다. 교활한 여우와 잔혹한 늑대를 교배한 듯한 존재. 구입처에서 봤던 영상과 협상과정을 종합해 내린 결론이었다. 그런 이가 다급히 걸음을 재촉하니 문뜩 호기심이 생겼다. 기껏 3일간 머리를 쥐어짜내어 마련한 판을 엎어버린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혹시나 따라오지는 않겠죠?”
쪼르르 달려가 민성의 옆에 붙은 보니스는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너희가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쌀쌀맞은 민성의 음성에 보니스는 입술을 꾹 깨물곤 빙긋 웃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럼 당분간 추적은 걱정 안 해도 되겠네요. 근데 왜 이리 속도를 내시는 건가요?”
보니스는 슬쩍 본론을 던지곤 민성의 반응을 살폈다.
“이것도 너희한테 맞춰서 움직여주고 있는 건데, 아직 말할 여력이 있는 걸 보니 좀 더 올려도 되겠네.”
민성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자, 보니스는 멀어지는 등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이를 악물고 뒤를 쫓아갔다.
‘젠장. 별일 없겠지. 별일 없을 거야.’
민성은 자꾸 고개를 쳐들고 올라오는 불안감을 꾹 눌렀다. 신과 아루. 그래도 처음으로 동료라 생각한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그를 찾기 위해 무작정 원정길에 올랐다니 걱정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전력질주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닐바스들이 따라올 수 없을 게 뻔했다. 그들은 영지를 얻기 위한 밑거름.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헉헉, 왜요? 말해주기, 헉, 어려운 건가요? 아니면 싫은 건가요?”
‘아……. 진짜 귀찮게 하네.’
민성은 끈질기게 달라붙는 보니스를 힐끗 내려다보며 한숨 쉬었다.
“굳이 개인적인 일까지 알려줄 이유는 없잖아? 너희는 앞전에 계약서의 항목대로만 일해주면 돼.”
“뭐라고요? 그래도 한 배를 탔다고 생각했는데…….”
보니스가 허탈하게 웃으며 멈췄으나, 민성은 멈출 생각을 않았다.
“믿음은 사소한 행동들이 쌓여서 생기는 거예요! 계약으로만 모든 관계를 결정짓다가 언젠가 된통 당할걸요? 된통 당할 거라고요!”
“조용히 해! 미쳤어? 스파이야? 뒈지려면 혼자 뒈지든가! 쫓아오면 어쩔라고 그래!”
보니스가 멀어지는 민성의 등에 대고 꽥 소리 지르자, 아티아가 다급히 그녀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리곤 불안하게 뒤편을 응시했다.
조용하다.
거리가 충분히 벌어진 덕인지 다행히도 추격의 불씨는 붙지 않은 듯했다. 아티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죽일 듯 보니스를 내려다봤다.
“뭐가 그리 불만인데? 코인이나 명예석보다 더 확실한 보증 수표가 있어? 제일 확실한 믿음을 줬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고!”
“하……. 그러다가 아주 영혼까지 파시겠네요? 코인 좋죠. 저도 돈 좋아해요, 환장할 정도로. 하지만 동업하려면 적어도 상대방에 대한 믿음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티아가 처음부터 정곡을 찌르고 들어왔지만, 보니스는 지기 싫은 마음에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래. 코인이 전부인 세상이야. 그깟 영혼, 좀 내놓으면 어때서? 그리고 넌 생판 남한테 돈 맡기는 거 봤어? 길드장님은 우리에게 영혼과도 같은 코인을 맡기셨어. 근데 그 이상의 믿음을 보이라고? 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불만이면 돌아가든가.”
“뭐라고요?”
“흠…….”
여인들의 다툼을 지켜보던 닐바스는 말없이 아티아의 뒤로 가 고개를 주억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