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
220화 - 개인 창고(1)
“……조건이 너무 좋은 것 같은데요.”
투기장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기간 연장 아이템이라거나 생활에 필요한 부분은 민성 쪽에서 전부 부담한다. 대신 보니스는 투기장에 떠도는 소문부터 정보길드의 정보 등을 끌어 모아 민성에게 제공한다는 게 계약서 내용의 요지였다. 그랬기에 더욱 수상쩍었다.
“그래서? 싫어? 싫으면 말고. 안 하면 네 손해지, 뭐.”
“잠깐만요! 할게요! 한다니까요!”
민성이 계약서를 낚아채려 하자 보니스는 다급히 계약서를 낚아채 사인했다. 이윽고 계약서가 발동하자 민성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축하해. 이제부터 너는 길드의 정보요원이야. 계약서에 적힌 대로 앞으로 모은 정보들은 주기적으로 나한테 보고하면 돼. 어때? 쉽지?”
“네, 그렇긴 한데…….”
보니스는 말꼬리를 흘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계속 가슴이 답답한 게 꼭 무언가를 놓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 참고로 일하는 게 영 시원찮다 싶으면 이쪽에서 계약 파기할 수 있는 거 알지? 파기되면 2배로 보상해야 하니까 꽤 부릴 생각 말고 열심히 정보 물어와.”
“네? 그런 조항은 없었는데요?”
갑작스런 민성의 발언에 보니스는 화들짝 놀라 능글대는 그의 얼굴을 노려봤다.
“무슨 소리야? 제대로 적혀 있었는데. 잘 생각해봐.”
민성이 머리를 톡톡 두드리자, 보니스는 머리를 굴려 계약서 내용을 되새겼다. 그리곤 곧 안색이 하얗게 변해 손을 떨었다. 좁쌀만 한 크기의 글자들이 나열된 사항들 사이로 작게 적혀있었다.
“날……. 날 속였군요.”
“속이다니? 단지 다른 사항들보다 조금 많이 작게 쓴 것뿐인데. 그러니까 잘 보고 사인하라고 했잖아. 잘 봤어야지. 그래도 덕분에 좋은 거 하나 배웠네? 계약서는 유심히 또 상세히 살펴라. 맞지?”
‘뼈가 으스러질 때까지 굴려주마. 누구 돈인데 당연히 개처럼 일해줘야지, 암.’
민성은 울상이 된 보니스의 어깨를 상냥하게 두들겨주며 악덕 중소기업 사장처럼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해주면 전혀 무방한 사항이잖아? 아니면 설마 농땡이라도 부리려 했어?”
“그, 그건 아니지만…….”
딱히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보니스는 몸을 잘게 떨 뿐 반박하지 못했다.
“쯧쯧쯧…….”
민성들이 협상하는 동안 정리를 끝내고 멀찍이서 그 모습을 관전하던 닐바스는 고개를 저었다.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에 속아 농락당한 소녀의 모습은 참으로 애처로워 보였다.
“뭘 혀를 차고 있어. 이제 네 차롄데.”
“우왁!”
닐바스는 언제 다가왔는지, 옆에 서서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민성을 보곤 놀라 비명 질렀다.
“뭘 귀신 본 것처럼 놀라고 그래. 뭐 잘못 주워 먹었어?”
“아니, 그게 아니고…….”
“이제 개인 창고로 갈 거야. 얼른 앞장서.”
민성은 계약서를 흔들어 보이며 닐바스의 등을 떠밀었다. 닐바스가 그를 위해 모아놓은 노력의 산물들을 보러 갈 시간이었다.
“큼……. 따라와.”
닐바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민성 역시 그를 따라 계단에 오르려던 찰나 고개를 돌렸다.
“아, 보니스!”
민성의 부름에 보니스는 힘없이 처진 고개를 들었다.
“내가 영지를 얻는 날에 네 소원도 이뤄줄 테니까 분발해. 인력이 필요하다 싶으면 이놈들도 부려먹고.”
“…….”
보니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까와 달리 그녀의 눈에는 생기가 들어차고 있었다.
삐걱-
마지막 나무 계단을 밟고 2층에 오른 민성은 그들을 반기는 조촐한 풍경을 관찰했다. 기다란 복도와 사이사이마다 달린 나무문들이 2층의 전부였다. 그나마 휑한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 걸어놓은 듯한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꽤 독특한 취향을 갖고 있었네.”
문을 지나치며 그림을 감상하던 민성은 닐바스의 뒤통수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실제로 그림들은 하나같이 악마를 찢어발기거나 지옥 속에 밀어 넣는 등, 선뜻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티아가 그린 거야. 그녀의 취미거든.”
“그래? 보기보다 고상한 면이 있었네.”
“나도 가끔 붓 드는 모습을 보면 어색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민성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피식 웃은 닐바스는 곧 한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곤 뒤돌아 민성의 눈을 응시했다.
“그나저나 부려먹다니. 그건 무슨 뜻이야? 설마 나나 아티아보고 저 꼬맹이 시중이나 들라는 소리는 아니지?”
닐바스가 손가락을 들어 바닥을 가리켜 보이자, 민성은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목이 잘려나가고 있는 악마의 그림을 바라봤다.
“닐바스. 냉정하게 봤을 때, 네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생각해?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은데.”
“뭐?”
모멸에 가까운 민성의 핀잔에 닐바스는 걸음을 멈추곤 민성을 노려봤다.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시점에도 이성 잃어서 상대방 페이스에 말려들고, 그 덕에 길드에 똥물 제대로 튀겨서 길드원은 전원 이탈. 그렇다고 보니스처럼 투기장 정세에 빠삭한 것도 아니고. 갖고 있는 거라곤 어설픈 스킬과 아이템이 전부.”
민성은 잔잔한 어조로 닐바스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읊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어? 능력미달이니까 저 꼬맹이 수발이나 들라는 소리야?”
“맞아. 전반적인 능력은 네가 앞설지 몰라도 나머진 그녀가 위인 것 같으니까.”
닐바스가 낮게 으르렁대며 어금니를 보이자, 민성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윽…….”
칭찬에 욕을 섞은 두루뭉술한 답에 닐바스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민성은 그림에서 시선을 거두곤 닐바스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툭 쳐줬다. 현실을 인지시켜줬으니 이제 어느 정도 다독여줄 생각이었다.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도 그 편이 여러모로 득이 되리라.
“닐바스. 우리 차원에 이런 말이 있어. 입에 쓸수록 몸에 좋은 법이라고. 지금 내가 말한 네 단점들. 당장은 납득하기 어렵겠지. 그러고 싶지도 않을 거고. 하지만 단점을 정확히 직시하고 고친다면, 훗날 한층 더 발전한 네 모습을 볼 수 있을걸?”
“써도 너무 쓴 것 같은데.”
“나도 싹이 노란 놈한텐 이런 얘기도 안 해. 어느 정도 가망 있어 보이는 놈한테나 말하지. 아직은 멀었지만 넌 충분히 가망 있는 놈이고.”
“크흠…….”
민성의 북돋음에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낀 닐바스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니까 앞으로 보니스를 내 머리라 생각하고 그녀가 하는 일, 최대한 보조해. 코인이나 명예석이 필요하다하면 제공해주고. 돈은 내가 줄 테니까. 인력을 필요로 하면 너희가 나서서 도와주면 돼. 어렵지 않지?”
“그렇긴 하다만…… 그런 일은 네가 직접 하는 편이 낫지 않아?”
닐바스의 물음에 민성은 고개를 저었다.
“난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어. 밖에서도 할 일이 있으니까. 투기장 일에만 신경 쓸 수 없다는 소리야.”
실제로 민성은 어느 정도 길드 정리를 끝내면 곧장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밀린 숙제처럼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퀘스트를 마무리 지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어차피 너희는 목적 이룰 때까진 계속 투기장 생활을 할 거라며?”
마차에서 시간의 돌을 이용해 투기장 생활을 지속중이라는 닐바스의 말을 떠올린 민성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니까 일단 받아.”
“음?”
갑작스레 민성이 손을 내밀자 닐바스는 어정쩡하게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이 정도면 부족하진 않겠지.’
거래 신청을 했던 민성은 거래 창이 나오자, 5루비를 치환해 10,000코인으로 바꿔 거래 창에 올렸다.
“이, 이게 무슨…….”
이윽고 거래가 완료되자 민성은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닐바스를 보며 미소 지었다.
“일단 그걸로 보니스 지원하면서 길드 운영비로 써. 나중에 부족하면 더 줄 테니까.”
“…….”
말을 잃은 닐바스의 입에 고여 있던 멀건 액체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부족하다니. 이게 무슨 미친 소린가. 평범한 범부라면 평생을 차원 전쟁터에서 구른다 해도 만지기 어려운 액수였다. 헌데 그런 액수를 아무렇지 않게 건네다니.
짝-
갑자기 닐바스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스스로 그의 뺨을 연달아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리곤 한층 가라앉은 시선으로 민성을 응시했다.
“내, 내가 이걸 갖고 도망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괜찮아. 그 정도는 푼돈이니까. 갖고 튀어도 돼.”
겨우 10,000코인. 닐바스가 갖고 도망간다 해도 루비에 흠도 나지 않을 금액이다. 다만 시험차원에서 건넨 것뿐. 만약 그가 길드원들과 함께 10,000코인을 능률적으로 사용한다면 더 큰 액수를 선사할 것이었고, 그렇지 않다면 새로 길드를 창립하면 그만이었다.
‘코인은 구하기 쉬워도 제대로 된 놈들 구하기는 어려운 법이니까.’
그래도 닐바스는 마이스터와의 전투에서 위급한 상황에서도 몇 번이고 위험을 알리고자 달려왔다. 섣불리 뒤통수 칠 놈은 아닐 것이다.
“나도 자존심이 있지, 그렇게는 못 해.”
“그건 지켜봐야 알 일이지.”
민성은 여전히 굳어 있는 닐바스의 어깨를 앞으로 밀며, 어서 창고로 안내하라는 듯 손짓했다. 곧 한 나무문 앞에 멈춰선 닐바스는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리곤 안으로 들어갔다.
“……너도 취향 참 독특하다.”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선 민성은 방 안의 광경에 혀를 내둘렀다. 책장 몇 개와 작은 침대, 그리고 백색 드레스를 입은 흉측한 도마뱀 그림이 방 안 곳곳에 걸려 있었다.
“미인이시지? 헬레나 공주님, 우리나라 최고의 미인이자 자애의 여신이지. 저 까끌한 손을 한 번 더 잡을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어. 이보다 예쁘신 분은 존재하지 않을 거야. 아무렴, 그렇고말고.”
“어……. 그래.”
취향은 존중받아야 마땅했기에, 민성은 그림을 사랑스럽게 쓰다듬는 닐바스의 등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닐바스가 그림에 눈이 멀어 떨어질 줄 몰랐다.
“공주님께 인사하는 건 좋은데 창고부터 열지?”
잠시간 기다려주다 짜증이 치솟은 민성은 퉁명스레 말했다.
“끙……. 이 고고한 로맨스를 몰라주다니.”
그제야 닐바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림에서 떨어졌다. 그리곤 방 귀퉁이에 서 있던 책장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책장 뒤에 감춰져 있던 그림판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림판 안에는 여타의 방 안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흉물스러운 도마뱀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빨리 열어봐.”
“네가 직접 열어. 난 이제 못 해. 길드장만 열 수 있으니까.”
민성이 독촉하자 닐바스는 고개를 저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민성에게 길드장 자리를 위임한 탓에 개인 창고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탓이었다.
“그렇겠네.”
민성은 닐바스의 말을 따라 그림판을 옆으로 밀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리 밀어도 철문은 열리지 않았다.
“안 열리는데?”
“아, 비밀번호는 ‘사랑스러운 헬레나 공주님, 제 몸과 마음은 영원토록 당신 것입니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 돼.”
“……농담이지?”
민성이 어처구니없게 바라봤지만 닐바스는 어서 하라는 듯 눈빛으로 권유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