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
218화 - 이 꼬맹이는 누구?(2)
“길드장이 바뀌어서 그런지 여기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진 것 같네요. 앞으로도 계속 계셔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아티아는 허리 숙여 쟁반을 회수하며 일부러 민성과 눈을 맞추고 눈웃음 지었다. 허리를 바짝 숙인 탓인지 갑옷에 가리어져있던 그녀의 가슴골이 언뜻 드러났다.
“계속 있을지 말지는 내가 판단할 일이야.”
“호호호. 물론이죠.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게 길드장님 의견이니까요. 일들 보셔요.”
아티아는 아무렇지 않게 찻잔을 드는 민성을 보곤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리곤 쟁반을 들고 총총걸음으로 테이블을 벗어났다.
후륵-
뜨거운 차를 한 모금 삼킨 민성은 찻잔을 내리며 맞은편에 앉은 보니스를 바라봤다. 어딘가 맥 빠진 모습이 돌풍에 꺾인 볏단 같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걸 어떻게 충족시켜줄 생각인데? 잘 생각해서 답하는 게 좋을걸? 그냥 잠깐 상황 모면이나 하자고 한 소리면 남은 명예석도 제대로 보전하긴 힘들 거야. 닐바스! 가져와!”
“뭐, 뭐? 뭘 가져오라고?”
뜬금없는 민성의 요청에 남은 카드를 살피며 정비하던 닐바스는 당혹하여 고개를 움찔거렸다.
“진짜 눈치 없네. 찰떡같이 알아먹으라고 말해줘도 개떡 같이 알아먹네. 강제 호출이랑 갈취 가져오라고.”
“그…… 그건 내 건데?”
“계약. 네 건 내 거. 내 것도 내 거. 잊은 건 아니지? 많이는 필요 없으니까 일단 한 개씩 내놔.”
민성이 계약서를 꺼내 살랑 흔들어 보이자, 닐바스는 손가락과 입을 꿈틀거리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었다.
“빠릿빠릿하게 좀 움직일 것이지. 자, 그럼 이제 계속 얘기를 들어볼까?”
“…….”
닐바스에게서 아이템을 받은 민성은 고개를 돌려 경직된 보니스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리곤 면접자들을 상대하는 면접관처럼 인자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자칫 빈틈이라도 보이면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말이다.
‘여긴 대체 어떻게 돼먹은 곳이야!’
흔한 길드의 훈훈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모습에 보니스는 얼어붙어 입만 달싹거렸다.
“얘기 안 할 거야? 안 할 거면…….”
“저는 구입처에서 3년가량을 굴렀어요. 주로 한 일은 정보 길드에서 얻어 온 정보를 제 나름대로 가공, 승률이 높은 쪽에 투자해왔어요. 한마디로 여기에는 방대한 양의 길드 정보가 있다는 말이 되는 셈이죠. 그쪽도 길드장이라면 정보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겠죠?”
보니스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실제로 민성의 전투에 배팅하기 전까지 그녀는 무려 90%에 가까운 투자승률을 보이고 있었다.
“호오, 그래?”
“그럼요! 이래 봬도 이 바닥에선 나름 베테랑이니까요.”
민성이 짐짓 놀라 관심 있는 듯한 눈치를 보이자, 자신감을 얻은 보니스는 상기되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래서 네 머릿속에 있는 정보들이 나한테 어떤 이득으로 돌아온다는 건데?”
“정보들을 조합해 향후 비킬 길드의 움직임에 큰 공헌을 세우는 게 가능해요. 소멸된 길드로 예시를 드는 건 좀 그렇지만 이번 할튼 길드를 예로 들어볼게요. 이번 할튼 길드 같은 경우 B급 능력자인 할튼을 주축으로 설립된 C급 길드로 대부분 비킬에 원한을 가진 이들로 구성돼 있었죠.”
보니스는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냈다. 그리곤 테이블에 놓인 차를 벌컥 들이키곤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원한이 있다고 해도 그런 이들이 A급 위주로 구성된 비킬 길드에 어금니를 보인다? 이건 100% 배후에 누가 있다는 소리죠. 실제로 마이스터들이 움직이기도 했고요.”
민성은 슬쩍 고개를 돌려 아티아에게 고갯짓했다. 정세를 보는 눈은 닐바스보다 아티아가 압도적으로 우월하다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맞아요. 그래서 저도 함정이라 생각한 거였어요.”
한창 주방을 정리하며 그들을 주시하던 아티아가 긍정하자, 민성은 다시 고개를 돌려 보니스를 바라보며 손깍지를 꼈다.
“그래서 요점이 뭔데? 누구나 조금만 생각하면 예상할 수 있는 걸 말하지 말고 요점을 말해. 솔직히 그런 어설픈 수작은 저기 무식한 놈 아니면 누가 당해주겠어?”
민성은 고개를 까딱여 짐 꾸러미를 푸는 닐바스를 가리켰다. 민성의 비판에 입술을 살짝 깨문 보니스는 웃는 낯을 유지하곤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요점은 제가 비킬에 있는 이상, 그런 실수는 더 나올 수가 없다는 소리에요. 실수나 피해는 최소화하고 이득은 극대화해서 비킬의 앞날에 탄탄한 다리를 깔아드릴 수 있다는 거죠!”
보니스는 자신 있게 테이블을 내려치며 말을 이었다. 처음 길드 하우스에 들어왔을 때의 불안감, 긴장감은 오간데 없는 모습이었다.
“그 결과! 비킬 길드는 언제나 승승장구! 그렇게 기세를 이어나가다 보면 3대 길드가 4대 길드 되는 것도 순식간 아니겠어요? 어때요?”
민성은 대답 대신 빙긋 웃으며 손들어 잔뜩 흥분해 있는 보니스를 지목했다.
“응, 경고. 아이템 사용, 갈취.”
[강민성 님이 ‘갈취’를 사용하셨습니다. 명예석 9개가 승리보상으로 지정됩니다.]
‘뭐야. 300개를 지정했는데 겨우 9개?’
갈취할 액수를 지정하라기에 300개를 지정했건만, 제멋대로 9개로 강제고정이 돼버렸다. 아무래도 상대방이 지정한 만큼의 액수가 없다면 보유한 최대치의 액수로 자동 변경되는 모양이다.
“아…… 아니, 잠깐만요! 이게 대체……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돌발적인 민성의 행동에 보니스는 당황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짓이긴. 쓸데없는 헛소리를 했으니까 경고 준 거지. 아, 참고로 다음은 레드카드. 퇴장이야.”
“뭐라고요?”
그의 뜻을 이해한 보니스는 이를 악물곤 민성을 노려봤다. 괜히 닐바스에게서 아이템을 받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를 만족시킬 만한 답변을 하지 못할 경우, 제재를 가하겠다는 간접적인 경고이기도 했다. 처음은 갈취였으니 다음은 강제 호출. 즉, 저 괴물새끼와 개인전을 벌여야 한다는 소리였다.
“왜죠? 설명해요!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다는 소리예요!”
기껏 잡은 기회의 끈이 다시 빠져나가려 하자, 악에 받친 보니스는 해명을 요구했다. 민성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한테 어떤 이득이 되냐고 물었지 언제 내가 길드원들이 이득 볼 수 있는 방법을 물었어? 아니잖아? 나한테 돌아오는 이득에 대해 설명했어야지. 애초에 내 질문의 요지에 대해 이해를 못한 것 같은데, 정말 투자로 먹고 산 거 맞아?”
민성의 차가운 발언에 길드 하우스 안은 묘한 침묵에 휘감겼다.
“쯧쯧, 악마한테 제대로 한 방 맞았네.”
닐바스는 괜스레 중얼거리며 짐을 풀었고, 아티아 역시 낮은 휘파람을 불며 시선을 돌렸다. 사실 보니스의 말은 틀리다기보다는 어려웠다. 길드의 전력이 상승하면 유명세가 퍼질 것이고, 다른 길드에 가입돼 있는 유망한 능력자들을 빼오는 것도 한결 수월해진다. 그로인해 길드 전력은 수직상승해 더 유명세가 퍼지고 앞선 행위를 반복해, 뫼비우스의 띠를 형성하게 된다. 실제로 대부분 대형 길드들이 몸집을 불리는 데 사용한 방법이기도 했다.
“장…… 장기적으로 봤을 때, 길드 전력 상승도 그쪽에 이득으로 돌아가는 거잖아요!”
“아니지. 장기적으로 봐도 마찬가지야. 쟤들이 이득 보는 거지 내가 이득 보는 게 아니잖아? 말했지, 난 쥐들 프로필에 관심 없다니까?”
하지만 민성에겐 그저 가벼운 예외사항에 불과했다. 민성은 바삭한 쿠키를 우물거리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 모습이 꼭 장난감에 흥미를 잃은 아이 같았다.
“이런 답답한……. 같은 길드원이잖아요!”
생각과는 다른 민성의 대답에 보니스는 가슴을 두드리며 격하게 항변했다.
“명목상 같은 길드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것뿐이지, 같은 울타리 안에 있다고 늑대가 양 되는 건 아니잖아? 그치? 그리고 슬슬 제대로 된 걸 꺼내 놓는 게 어때? 걸레조각 같은 정보 말고.”
“무슨 뜻이에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민성의 말에 보니스는 불안한 눈빛으로 그의 입을 바라봤다. 또 어떤 소리로 그녀를 곤혹스럽게 할지 예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네가 보유한 정보도 어디선가 수입해왔을 거 아냐. 그러니까 그런 거 말고 네가 독자적으로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내가 만족할 정보를 내놓으라고.”
“그…… 그게 무슨 뜻이죠? 이해하기 어려운데요?”
보니스는 살짝 떨리는 입술로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민성은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래? 그럼 간단하게 설명해줄게. 네가 처음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곧 추격대도 뒤따라 나타났어. 맞지?”
보니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민성은 계속 의견을 피력해 나갔다.
“그게 무슨 뜻이겠어, 네가 알고 있는 건 다른 대형 길드들도 알고 있다는 소리지. 개나 소나 다 알고 있는 정보가 정보야? 걸레조각이지.”
“그…… 그건…….”
민성이 독설에 가까운 반론을 던지며 정곡을 찌르고 들어오자, 보니스는 말을 더듬으며 눈에 띄게 당황했다. 실제로 그녀는 일부러 정보길드에 관한 사항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래야 정보에 대한 값어치가 상승하고 그에 따라 그녀의 몸값 역시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왜? 모를 줄 알았어? 누구나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일인데.”
민성은 피식 웃으며 지진 난 듯 떨리는 그녀의 동공을 응시했다.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며 짐을 풀던 닐바스는 정녕 몰랐다는 표정이었지만, 일부 예외는 있기 마련이었다.
“자, 이제 답은 충분히 해준 거 같으니까 빨리 다음 의견 제시해봐. 설마 그게 끝은 아닐 거 아냐?”
민성은 어서 말하라는 듯 손을 까딱여 보였다. 그러나 보니스는 묵묵부답 손톱을 잘근 물어뜯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놈은 어떤 정보를 필요로 하는 걸까? 놈에게 이득이 될 만한 정보가 뭐지?’
보니스는 애써 타들어가는 속을 다독이며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강민성……. 강민성…….’
정보 길드의 말에 따르면 학살자 스벤을 따라 투기장에 온 지 얼마 안 된 초심자. 스벤의 영향이 컸는지 곧장 비킬 길드에 가입. 첫 길드전으로 라이든을 충격으로 몰아넣고 있는 장본인이자 이번 전투로 라이든의 랭킹 게시판에 52위까지 치고 올라온 괴수. 당연히 원할 줄 알았던 적대 길드의 정보도 라이든의 정세도 필요 없다 하니 그런 이가 필요로 하는 게 있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반드시 맞춰야만 한다.
첫 발은 빗나갔다. 이제 남은 화살은 단 하나. 목표를 맞추지 못한다면 실패의 여파는 감당할 수 없는 독이 되어 돌아올 터. 놈이 뭘 원하는지 신속하고 빠르게 파악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은 충분히 준 것 같은데. 아마도 그게 끝이었나 보네.”
잠시간 침묵하는 보니스를 바라보던 민성은 싱긋 웃으며 손목에 걸린 시계를 힐끗 살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이쪽도 계속 너한테 시간 할애할 정도로 느긋한 입장은 아니니까. 결투장에서 보자.”
그리곤 천천히 퇴장 카드인 강제 호출에 손을 뻗었다.
“잠깐! 잠깐만요! 잠시만 기다려봐요!”
생각에 잠겨 있던 보니스는 다급하게 민성의 손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민성은 냉정할 정도로 차갑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시간은 충분히 줬다. 에효. 만족할 만한 걸 제공하겠다더니. 약간이나마 믿은 내가 바보지.”
그리곤 강제 호출을 사용하려는 찰나,
“영주! 영주가 되는 법을 알고 있어요! 대형 길드들은 모르는 정보라고요!”
보니스는 도박하는 심정으로 절규하듯 소리 지르며 민성의 손을 노려봤다.
“……그래?
“후…….”
민성이 천천히 강제 호출에서 손을 빼자 그제야 보니스는 안도하여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발상을 전환한 것이 아무래도 정답인 모양이었다. 민성이 원하는 것이 아닌 투기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원하는 것으로 초점을 돌렸다. 투기장을 이용하는 이라면 누구나 갈망하는 영주. 민성이라고 원치 않을 리 없을 거라 판단했고, 다행히도 도박은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