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
215화 - 마이스터 길드
48. 마이스터 길드
라이든의 중심부이자 수도인 포가든. 높은 줄 모르고 뻗은 우람한 나무들이 곳곳에 자리해 있고, 푸르른 잎새 사이로 투기장 전역을 비추는 선명한 빛이 포가든에 드리웠다. 새들의 지저귐과 나뭇잎 살랑이는 소리가 잔잔한 오케스트라처럼 퍼져, 나무 밑동을 오가는 수많은 손님들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포가든의 중심지이자 만남의 광장 역할을 하는 네이처 윌. 그 주변으로 모여든 수많은 손님들은 각자의 목적을 따라 충실한 하루를 보낸다.
“이번에 설립한 드마리스 길드에서 길드원 모집합니다! 최소 D랭크부터 받아요!”
“코인으로 명예석 삽니다! 명예석 파실 분 계세요?”
“저기, 여기에 명예석 상점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세요?”
명예석 상점을 이용하러 온 이들이나 그들을 상대로 장사하기 위해 모인 장사치들, 혹은 길드를 홍보하는 손님들이 대다수였다.
“요즘 벌이가 시원찮아서 걱정이야.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보이니. 후……. 명예석이라도 좀 많이 얻고 싶은데 그것도 쉽지 않아서야, 원.”
“어쩔 수 있나? 운 좋은 놈들이야 코인으로 좋은 스킬, 무기 뽑아서 활약한다지만 우리 같이 운 없는 놈들은 한 방 터질 때까지 악착같이 살아남거나 뒈져야지 별수 있나? 내 상자에선 등신 같은 것만 나오고. 니미럴……. 죽어라 노력하면 뭐 해?”
하지만 밝은 분위기와 대비되게 나무 사이로 펼쳐진 상점 사이를 둘러보던 한 행인들은 연거푸 푸념하며 스스로의 신세를 한탄했다.
“우리같이 힘없는 놈들은 그저 차출 안 되는 것만도 감사히 여겨야지. 적어도 원한 사지 않는 이상 상점 안에 있으면 죽진 않으니까. 빌어먹을. 조만간 또 토벌전에 가야겠네.”
토벌전에서 승리해 명예석을 얻으면 된다지만 언제나 성공보다 높은 실패할 확률을 안고 뛰어들어야만 했다. 실패 시 페널티도 꽤나 뼈아프지만 차원전쟁에 강제 차출되어 진짜 죽는 것보다야 나았다.
“이번에 시간의 돌 몇 개 사고 나면 남는 것도 없겠어.”
행인은 보유한 명예석을 확인하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의 돌을 대략 2주 치 구매하고 나면 그나마 남아 있던 것도 바닥을 보일 듯했다.
시간의 돌. 사용 시, 상점이용기간을 하루 더 늘려주는 아이템이다. 본디 차원전쟁 승리보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상점시간은 총 3일. 하지만 전쟁을 기피하는 손님들이 애용하는 덕에, 명예석 상점에서 판매 수 TOP 10 안에 드는 물건이기도 했다.
“좀 괜찮은 파티원이라도 구하면 좋겠는데. 이렇게 먹고 살기 힘들어서야……. 이참에 나도 비킬 같은 길드나 들어가볼까? 한탕 하고 투기장만 이용 안 하면 되는 거잖아?”
“쉿! 말조심해. 소문 못 들었어?”
행인은 갑자기 동료의 옆구리를 툭 건들며 주변 눈치를 살폈다.
“뭐가?”
“정말 몰라서 물어? 이번에 마이스터랑 몇몇 대형 길드가 연합해서 비킬 길드를 쳤다는 소문이 파다해.”
행인은 그의 동료에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그래? 근데 문제될 게 있어?”
“문제는 마이스터들이 대판 깨졌다는 거지.”
“뭐?”
동료가 놀라 입을 막고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행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자칫 포가든을 주 활동무대로 삼는 마이스터 길드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낭패를 볼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어떻게 된 거래? 비킬도 힘 좀 깨나 쓰는 길드라지만 마이스터에 비빌 정도는 아니잖아?”
“그게…… 소문에 의하면 한 놈한테 당했다더라고.”
“뭐? 한 놈?”
동료가 놀라 눈을 부릅뜨자 행인은 재차 동료의 입을 틀어막았다.
“거참! 이 친구야! 목청 좀 낮춰. 괜히 불똥 맞고 싶어서 그래?”
“크흠……. 미안혀. 그나저나 설마하니 마이스터가 고작 한 놈에게 당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행인들은 저들끼리 소곤거리며 다른 나무들보다 유독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힐끔 바라봤다. 마이스터가 사용하고 있는 길드 하우스였다. 거대한 나무 문 위에는 길드 마이스터라는 푯말이 큼지막하게 달려 있었다.
“그래서 그 마이스터를 깨부순 미친놈은 누구래?”
“그건 나도 모르지. 어쨌건 당분간은 조심해야 할 거야. 분명 잔뜩 독이 올랐을 테니까. 괜히 혓바닥 잘못 놀려서 마이스터 심기 건드릴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 나중에 접수처 가서 기록 살펴보면 되니까 예정대로 아이템만 사고 얼른 뜨자고.”
마이스터 길드 하우스를 바라보던 행인들은 시선을 거두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
한편 뒤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검은 그림자는 멀어지는 행인들의 등을 빤히 쏘아봤다. 그리곤 마이스터 길드 하우스의 나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겉보기와 다르게 나무 속은 상상 이상으로 넓었다. 넓은 축구장 여러 개를 합쳐놓은 크기의 수련장과 길드원들이 편안하게 휴식할 수 있도록 배치한 샤워장, 주점 따위의 편의시설들이 1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
안으로 들어서자 수련장에서 들려오는 격한 고함 소리가 그림자를 반겼다.
“똑바로 찔러! 목표물을 제대로 보고 창대에 힘을 실은 채로 찌르란 말야! 다시!”
“하!”
잠시간 길드원들의 훈련을 지켜보던 그림자는 1층 한편에 위치한 커다란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5층.”
그림자가 작게 중얼거리자, 허공에서 굵은 나무줄기가 내려와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리곤 새총 쏘듯 그림자를 위로 날려 보냈다. 이윽고 줄기의 힘이 빠졌는지 그림자를 툭 놨다.
폭-
푹신한 나뭇잎에 떨어진 그림자는 몸을 갈무리하곤 눈앞에 있는 나무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문패 사이로 희번덕거리는 눈동자가 뜨이더니 좌우로 데구르르 구르며 그림자를 살폈다.
“들어와.”
냉랭하기 그지없는 음성과 함께 문이 열리자 그림자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림자는 잘 자란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있는 넓은 대지를 가로질렀다.
“으윽…….”
“쿨럭, 쿨럭…….”
나무 사이사이에서 고통에 괴로워하는 신음이 들려왔지만 아랑곳 않았다. 이윽고 부드러워 보이는 버섯을 의자 삼아 앉아 있는 여인이 보이자, 그림자는 그녀 앞으로 다가가 무릎 꿇었다. 에메랄드 빛 드레스의 끝자락이 그림자의 눈에 비쳤다. 그러나 정작 여인의 시선은 다른 곳에 고정돼 있었다.
“된통 깨진 소감들이 어때? 응? 왜 다들 말을 못 해, 말을? 입은 장식이야?”
여인은 다트 하듯 나무에 비수를 던지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푹-
“크윽…….”
그녀의 손을 벗어난 비수는 가지에 묶여 매달려 있던 길버트의 몸에 틀어박혔다. 복부에서 격한 고통이 밀려오자 길버트는 몸을 비틀며 낮은 신음을 토했다. 이미 한 차례 폭풍을 겪었는지 그의 몸에는 깊은 상처와 말라붙은 피딱지로 그득했다. 길버트의 뒤로는 마찬가지로 엉망이 된 블랙 스미스들이 나무열매처럼 가지에 묶여 매달려 있었다.
“후……. 그래. 입이 있어도 열 수가 없겠지. 아니, 열면 안 되지.”
여인은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재차 비수를 던졌다. 비수는 세차게 날아가 앞서 박혀있던 비수 자리에 정확히 꽂혔다.
“컥…….”
기존에 박혀있던 비수가 밀려나며 등을 뚫고 튀어나왔다. 내장과 살 찢어지는 고통에 길버트는 피가 터져 나올 정도로 입술을 악물었다. 벌어진 부위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져 지면을 적셔갔다.
“죄……. 쿨럭……. 죄송합니다. 부디 부하들에게는 선처를…….”
“죄송? 당연히 죄송해해야지! 명색이 블랙 스미스란 것들이 마이스터 이름에 먹칠을 했으면 당연히 죄송해해야지! 보고만 하면 끝인 줄 알아? 내가 회의에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알기는 해?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할케니아가 그 따위로 나왔겠어!”
여인은 재차 언성을 높이며 길버트의 복부에 비수를 던졌다. 그리곤 몸을 격하게 꿈틀거리는 열매들을 만족스레 지켜보며 다시 푹신한 버섯에 앉았다. 그림자는 비로소 고개를 들곤 여인의 눈을 응시했다. 반투명해 하늘거리는 드레스 안으로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가 언뜻 비쳤다.
“징벌이 너무 가벼운 것 같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수하들은 미워하면 안 되지. 그러니 너도 매달리고 싶지 않다면 주제넘게 끼어들지 마렴.”
여인은 발치에 무릎 꿇고 있는 그림자를 보곤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실례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말씀하신 것, 가져왔습니다. 열어도 되겠습니까?”
그림자는 공손히 두 손을 들어 올려 구입처에서 가져온 큐브를 내밀었다. 여인은 대답 대신 손가락을 위아래로 까딱였다. 그러자 그림자 역시 그녀의 뜻에 따라 큐브를 좌우로 비틀었다.
달칵-
그와 동시에 화려한 불빛과 함께 담겨 있던 영상이 밖으로 퍼져 나왔다. 하지만 화려함 빛 속에는 민성의 대검 아래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마이스터와 연합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만하면 됐어.”
이마를 잔뜩 찌푸린 채 주의 깊게 영상을 관찰하던 여인은 파도치는 것을 마지막으로 손을 저었다. 여인의 명령에 따라 그림자는 큐브를 다시 비틀었다.
“영상만 보면 거의 S급 같은데…… 그래도 아주 얼빠진 놈한테 당한 건 아니었네.”
길버트들을 흘겨보던 여인은 그림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바깥에도 벌써 소문이 나돌고 있습니다.”
“쯧. 하여튼 그놈의 주둥아리들을 다 꿰매야 하는데. 상점 측 오류일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안내인이 직접 해명했다고 합니다.”
여인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진짜 새로운 S급이 출현한 건가? 귀찮게 됐네. 놈에 대한 정보는? 들어온 거 있었어?”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아직 사건이 벌어진 지 얼마 안 되어 정보길드에도 별다른 정보는 없었습니다.”
“그래? 흠…….”
버섯을 톡톡 건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여인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좋아! 지금 당장 하이린으로 추격대 보내고, 묶고 있던 비킬 길드 관련된 정보 싹 다 풀어. 하나도 빠짐없이!”
“……돌에 대한 정보도 말입니까?”
그림자의 물음에 여인은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
“미끼를 던져줘야 고기가 몰려들지. 아예 투기장에 있는 모든 놈들을 파수꾼으로 만들어.”
“……알겠습니다.”
묵묵히 있던 그림자가 고개를 수그리자, 여인은 길버트들에게 시선을 돌리곤 가볍게 박수를 한 번 쳤다.
털썩-
“큭…….”
그러자 줄기에 얼기설기 얽혀있던 블랙스미스들은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저놈들도 치료해주고, 잃은 명예석 다시 회복하기 전까지는 전원 슬럽으로 강등시켜.”
“겨우 저 정도 징벌로 저들이 반성하겠습니까?”
“됐어. 괜히 더 했다가 죽기라도 하면 꿈자리만 더러워지니까. 자, 이제 빨리 나가 봐.”
여인은 어서 나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젓곤 버섯의 삿갓을 툭 쳤다. 그러자 버섯에서 얇은 막이 나와 그녀의 주변을 살포시 둘러쌌다.
“아린 님은 너무 관대하십니다.”
그림자는 홀로 작게 중얼거리곤 바닥에 떨어진 블랙스미스들을 하나씩 부축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