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캐쉬상점 쓴다-214화 (214/303)

# 214

214화 - 그들만의 대화 속에는(3)

“그래.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어?”

“예. 한두 번이 아니었…….”

딱-

“끄아아아아아악!”

자르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루크의 비명소리를 듣곤 고개를 저었다. 녀석은 인간이 아니니 이번 결정이 아무래도 좋은 듯했다.

“그리고 리나도 벽에서 병력 철수시켜. 그리고 자르도…….”

“그래도 최소한의 기회는 주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아직 이곳저곳에서 분전하고 있는 인간들이 많습니다.”

자르는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하며 상관의 눈치를 살폈다.

“흠…….”

다행히도 그의 간곡한 호소가 통했는지 남자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한 번의 멸망, 홍수 이래로 인간들은 급격히 진화해왔습니다. 굳이 지배자님께서 손쓰시지 않아도 그들은 자력으로 충분히 쓰레기들을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의 최후의 희망을 앗아가는 건 재고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자르는 숨 한 번 쉬지 않고 인간의 유능함을 조목조목 늘어놨다.

“그건 그렇지. 근데 인간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 알잖아. 내가 인간 출신인 거. 어떨 때는 말도 안 된다 싶을 정도로 유능한 종족이긴 한데, 너무 기복이 심해. 솔직히 썩 믿음이 가지 않아.”

글렀다. 지배자님께서는 이미 멸망 쪽으로 생각이 기우신 모양이다. 더욱이 한때 인간이었던 지배자가 말하니 더욱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누구였더라? 그 서쪽에서 대장이랍시고 날뛰던 놈. 골 때리는 자식 있잖아.”

“아두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화제가 전환되자, 자르는 서둘러 남자의 질문에 답했다.

“그래! 그놈도 나왔지? 그놈은 어디로 떨어졌어?”

“한국에 위치한 부산 지역입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자르의 답에 남자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허공을 응시했다. 그 모습을 본 자르는 한숨 돌리며 그의 태도를 지속적으로 살폈다.

“어쭈……. 이놈 봐라? 아주 가관이네.”

모든 것이 얼어붙어 산 자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 부산의 광경과 얼음으로 된 왕좌에 오만하게 앉아 있는 아두르의 모습이 남자의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쓰레기장 속 쓰레기가 한껏 활개치고 다니는 모습을 보니, 처음 벽이 무너졌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들었던 짜증이 다시금 밀려왔다.

“아직까진 잠잠하지만 진행 중인 거점화를 끝내면 곧 움직이기 시작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지배자는 의자 받침대를 톡톡 두드리더니 이윽고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눈을 빛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10년. 10년 내로 인간들이 아두르를 죽이면 멸망은 없던 걸로 하자.”

“예?”

뜬금없는 상관의 제안에 자르는 놀라 되물었다. 언제고 인간이 쓰러뜨릴 수 있겠다 생각은 했지만 인간의 성장기간을 감안했을 때 10년은 너무 짧았다. 오히려 10년 내로 몰살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가능성을 보이라는 거지. 지금이야 한쪽만 터져서 그렇지 다른 쓰레기들까지 튀어나가면 인간들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그건…….”

딱-

남자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헉, 헉.”

그러자 바람에 산발이 되어 헐떡이는 루크가 의자로 돌아왔다. 남자는 그런 루크를 보며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휴가는 취소야. 일단 돌아가서 계속 만들고 있어. 속도는 평소의 3배로.”

“……아까는 푹 쉬라면서요. 푹 쉬라고 했잖아요…….”

루크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말이 3배지 버그까지 감안하면 배수는 더욱 증가한다. 일하다 죽으라는 소리였다.

“루크야. 이제 슬슬 그만 속을 때도 되지 않았어?”

“……그럼 그렇지. 이럴 줄 알았어.”

“얼른 가봐. 3배면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을 거 같은데.”

남자의 말이 끝나자, 루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왔을 때처럼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빈 의자를 보며 웃음지은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리나도 당분간은 더 맡아줘야겠어.”

“그럼요, 지배자님! 10년이라 해봐야 짧은 시간이니까요! 이번에는 반드시 목숨 걸고 막아낼게요!”

리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다졌다.

“아, 그리고 탐색은 내가 따로 언급하기 전까진 중지해줘.”

“네? 네!”

리나는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으나 어서 가라는 손짓에 고개를 꾸벅이곤 사라졌다. 리나까지 모습을 감추자 거실에는 남자와 자르 단 둘만이 남아 묘한 기류를 형성해냈다. 한동안 말없이 커피만을 들이키던 남자가 먼저 침묵을 깼다.

“자르도 계속 지금처럼 토토 관리 잘해주고. 아, 그리고 루크가 분발할 거니까 작업속도에 물량 맞추는 것도 잊지 말고.”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르가 고개 숙여 순종의 뜻을 보이자 남자는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눈웃음 지었다.

“덤으로 리나 뒤 좀 같이 봐줘. 멀쩡한 척하는 게 다 보여서 내가 다 안쓰럽네.”

남자는 혀를 끌끌 차며 리나가 앉아 있던 의자를 흘낏 쳐다봤다. 책임감 강한 녀석이라 내색은 안 해도 분명 속으론 자학하고 있을 게 뻔했다.

“알겠습니다.”

자르가 고개를 숙이자, 남자는 마찬가지로 가보라는 듯 손짓했다. 그러자 잠시 머뭇거리던 자르는 고개를 숙여 보이곤 거실을 빠져나갔다. 자르마저 자리를 뜨자 고요함만이 공기처럼 거실을 떠다녔다.

“후…….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남자는 이미 식어버린 냉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일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세상은 그가 의도하는 대로 돌아가 주지 않았다.

“키아아아아!”

“살려줘! 살려……크억!”

눈을 감자, 세상 곳곳에서 들려오는 절규와 비명소리가 귀에서 앵앵거렸다. 좀 더 나은, 모든 인간들이 행복할 수 있는, 그러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 달리 여기저기서 어긋난 톱니바퀴처럼 삐그덕 대는 소리를 울려대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망할 쓰레기 새끼들…….”

그가 추구하는 행복한 세상은 오로지 인간들만의 것이다. 쓰레기들, 다른 지배자들이 만들어낸 실패작들이 그가 추구하는 세상에 설 자리는 없었다. 짜증이 치솟자 남자는 저도 모르게 손에 쥔 커피 잔에 힘을 줬다. 그러자 커피 잔이 조각조각 갈라져 내용물이 흘러나왔다.

드르륵-

갑작스레 문 열리는 소리에 남자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레이첼이 정원에서 수확한 열대과일들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거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장난스러운 멘트를 던지며 그녀의 화를 돋웠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남자는 손가락을 퉁겨 조각난 잔과 내용물을 처리하곤 허공을 지그시 응시했다.

“무슨 생각이야?”

어느새 그의 옆으로 다가와 강렬한 시선을 보내는 레이첼을 본 남자는 피식 웃었다.

“무슨 소리야?”

그리곤 되물으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모르는 척하지 마. 10년? 대체 무슨 생각이야? 고작 10년간의 성장으로 인간들이 아두르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아니면 정말 리셋이라도 할 생각이야?”

“하여튼 비밀의 묘미라곤 눈곱만큼도 모르는 귀신같은 여자라니까. 그래서 내가 레이첼을 좋아하는 거지만. 우리 결혼식은 언제 올릴까?”

그녀의 물음에 남자는 실소하며 손가락을 퉁겨 새 커피 잔을 생성시켰다. 그리곤 김이 오르는 커피를 조심스레 입에 댔다.

“장난질 할 생각 없어. 무슨 생각이야? 진짜 리셋할 계획이야?”

사뭇 진지한 그녀의 눈빛에 남자도 머금고 있던 미소를 지웠다.

“설마. 역대 지배자들 중에 나만큼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양반들 있었어? 아니잖아.”

“사랑은 개뿔. 포인트를 사랑하는 거겠지. 솔직히 말해. 무슨 생각이야? 아무 생각 없이 리셋을 언급하진 않았을 거 아냐.”

“하아. 그냥…….”

냉랭한 레이첼의 말에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짙은 한숨을 내셨다. 그리곤 광대가 입가에 그린 분장처럼 괴이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어딘가 숨어 후배의 고통을 즐기고 있을 선배 얼굴 좀 보고 싶어서.”

“뭐? 너 설마…… 이번 일에 에덴이 개입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남자의 의미심장한 발언에 레이첼은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그 양반 정도 되는 존재가 아니면 누가 그랬겠어? 아니면 설마…….”

남자는 살기가 넘실대는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봤다.

“늙은이들이 내 차원에 개입한 건 아니겠지? 유희랍시고 한동안 머물렀었다며?”

“그건 아니야. 그분들의 관심사는 차원전쟁으로 기울어진 지 오래니까.”

레이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러자 남자는 살기를 풀곤 부드러운 미소를 흘렸다.

“늙은이들이 한 게 아니라면 남은 건 그 양반뿐이지. 다른 선배님들께서는 다 오래전에 뒈지셨으니까. 은퇴했으면 다른 차원으로 여행도 좀 다니고 할 것이지. 아직 그놈의 미련이 남으셨나 봐.”

“…….”

레이첼은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남자를 훑었다. 이미 에덴이 범인이라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는 남자에겐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리셋할 생각 없으면서 애들은 왜 속인 건데?”

자르같이 가정을 갖고 있는 이들은 남자의 이번 발언에 상당히 동요할 가능성이 높았다.

“경각심을 가져야 더 일 잘하니까. 이번 일 그냥 넘어가 준 것만으로 고마워해야지.”

질타에 가까운 레이첼의 물음에도 남자는 귀를 후벼 나온 잔해를 훅 불며 무심하게 말했다.

“애들 잘못이 아닌 걸 알면서도?”

“별수 있나? 에덴을 찾을 때까진 계속 굴러야지.”

냉정할 정도로 차가운 남자의 발언에 레이첼은 과일바구니를 던지고 싶은 욕구를 겨우 억눌렀다. 평상시라면 거침없이 던졌겠지만 배를 빵빵하게 불린 복어를 섣불리 건드렸다간 역효과를 볼 것이다.

“그래서. 에덴은 어떻게 찾으려고? 방도는 있고?”

“당연히 시켜야지. 널린 게 인력인데.”

남자는 손가락을 퉁겨 수박만 한 지구본을 만들어냈다. 지구본 위에는 좁쌀만 한 인간들의 모형들로 바글거렸다.

“그렇게 후배랑 숨바꼭질 하고 싶으시다는데 들어드리죠. 대신 잘 숨어계셔야 합니다.”

잠시간 지구본을 노려보던 남자는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리며 재차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화사한 용모를 가진 엘프가 나타나 그의 앞에 부복했다.

“부르셨습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토씨 하나 빼놓지 말고 인간들에게 그대로 전파해. 그리고 필요하면 권능을 사용해도 좋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잠깐만! 어떻게 하려고?”

남자가 내용을 전파하려는 찰나, 레이첼은 그의 옷소매를 잡고 앞으로 틀었다.

“어떻게 하긴? 찾아서 죽여야지.”

“단기간이었어도 그는 네 전임자였어. 근데 그런 사람을 죽인다고?”

레이첼은 회의적인 눈빛을 보냈지만 남자는 그것을 외면했다.

“그럼? 찾아서 개심이라도 시켜? 웃기지 마. 그 양반한테 정들어서 그런가 본데 할 짓이 있고 안 할 짓이 있어. 그 양반은 선을 넘었어.”

“우리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지도 몰라.”

“이미 은퇴한 사람이야. 그것까지 내가 알아야 할 이유는 없어. 그리고 늙은이들이 간섭할 수 있는 범위도 아니잖아?”

남자는 차갑게 대꾸하며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레이첼은 멍하니 남자를 올려다봤다.

“……알아서 해. 뇌에 사리만 찬 멍청한 새끼.”

그리곤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쏘아붙이고 홱 몸을 돌려 남자의 곁을 벗어났다.

“저……. 괜찮으신 겁니까?”

부복한 채 둘의 다툼을 지켜보던 관리자는 뒤를 힐끔거리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아, 별거 아냐. 사리분별은 할 줄 아는 여자니까 겨우 이 정도 사항으로 보고하지는 않겠지.”

남자는 무뚝뚝하게 대꾸하곤 전파사항을 전달했다.

“……정말이십니까?”

남자의 말이 끝나자 안색이 어두워진 관리인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되물었다.

“그래. 그대로 전해. 그리고 내가 말했던 녀석에겐 무조건 눈 붙이고.”

단순한 의심에서 그칠 생각은 없었다. 전임자의 숨겨진 패일지도 모르는 민성을 놓칠 수 없었다. 혹시나 전임자와 접점이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자칫하면 실직자 되겠군요. 허허, 그럼…….”

관리인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깊숙이 숙여 보이곤 자리에서 사라졌다.

“자, 선배. 제 패는 보여드렸습니다. 이제 어떻게 나오실 겁니까? 그놈의 측은지심 때문에 인간이 멸망위기에 놓여도 쓰레기들을 구제하실 겁니까?”

남자는 작게 중얼거리며 찬찬히 돌고 있는 지구본을 노려봤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