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캐쉬상점 쓴다-213화 (213/303)

# 213

213화 - 그들만의 대화 속에는(2)

딱-

“헉, 헉. 전 왜 내보내신 겁니까? 저는 아무런 잘못도 안 했습니다!”

지배자가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머리가 산발이 된 루크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왜 잘못이 없어? 네가 더 빨리 게임들을 찍어냈으면 이럴 일도 없었을 거 아냐.”

“예?”

루크가 안경을 고쳐 쓰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묻자, 지배자는 재차 손가락을 들었다.

“그렇죠! 제가 다 느려서 생긴 일입니다.”

“그치? 그럼 지금부터 속도 더 올려. 2배로.”

“2…… 2배…….”

루크는 지배자가 뻗은 손가락 2개를 보곤 게거품을 물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은 지배자는 고개를 돌려 리나를 바라봤다.

“원인은 알아냈어?”

“네, 지배자님! 그 예전 지배자님께서 한번 리셋하시면서 남아 있던 던전 중 하나에서 미사일이 발사됐었어요! 아무래도 그게 원인이 돼서 벽이 박살난 것 같아요!”

리나는 문책을 면했다는 기쁨 때문인지 분홍빛 양 갈래 머리를 흔들며 쾌활하게 답했다. 그러나 원인을 알았음에도 오히려 지배자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하……. 그 양반, 아주 똥을 제대로 튀기고 갔네.’

백번 이해해 일부 세력을 남긴 것은 납득이라도 할 수 있었다. 향후 차원 보호 기간이 끝났을 때, 차원전쟁에 대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원은 필요했기 때문이다. 던전 역시 일종의 안배 차원으로 남겼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랬기에 건들지 않고 놔둔 것이건만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아니 도대체 뭔 생각이야?’

정작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던전에서 발사됐다는 미사일이었다. 인간은 벽에 간섭할 수 없다. 그러니 미사일을 설치한 이는 선임 지배자가 분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설치한 목적을 도무지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 인간……. 설마 신고식이랍시고 설치해둔 건 아니겠지?’

“지…… 지배자님.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한 게 있나요?”

남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침묵하자, 덩달아 긴장한 리나는 풀죽어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야. 것보다 다른 던전들은? 다른 던전들도 전부 살펴봤어?”

남자는 어서 보고를 이어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네……. 총 3군데 더 설치돼 있어서 전부 제거했어요!”

“3군데? 그걸 3곳에나 더 설치했다고? 허……. 아주 부수려고 작정을 했네.”

목적은 몰라도 이로서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그의 선임은 쓰레기장의 모든 벽을 파괴하길 원한다는 것.

“아, 그리고 지배자님! 이것도 보세요!”

남자가 입꼬리를 올리자 덩달아 신이 난 리나는 세모꼴의 크리스털을 꺼내어 내밀었다. 그리곤 무어라 중얼거리자 크리스털에서 옅은 빛이 뿜어져 나와 허공에 쏘아졌다.

[크에에에엑!]

[제발 좀 죽어,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광해군 던전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녹화한 영상처럼 빛 속에 떠올랐다.

“흠…….”

남자는 커피 잔을 들어 홀짝이며 빛 속에서 재생되는 영상을 주시했다. 이윽고 민성이 던전을 탈출하고 물속에 잠긴 광해군의 미소가 빛과 함께 소멸함과 동시에 영상도 끝을 맺었다.

“어디서 봤던 얼굴인데…….”

남자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영상에서 비추었던 민성의 얼굴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곤 곧 기억을 떠올리곤 눈을 빛냈다. 차원 전쟁으로 총 공헌도 1위를 달성해 눈의 소생을 원했던, 소박한 소원을 빌었던 인간이었다.

‘어쩐지 이렇다 할 조직도 특색도 없던 인간이 그런 스킬들을 갖고 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한 가지 가설을 떠올린 남자는 무미건조한 미소를 지으며 과거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그럼, 뒷일 잘 부탁한다.”

“아니, 이렇게 갑작스레 은퇴한다 해버리면 전 어쩌라는 겁니까? 쓰레기장은 어쩌고요? 그거 터지면 감당 못 하는 거 알잖아요! 보호기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일부러 이러는 거죠!”

남자는 갈색 바바리를 입은 이의 등에 꽥 소리 질렀다.

“미안. 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 못 들어가니까. 보지 못했던 것도 보일지도 모르고. 더 현명하고 평화로운 방법을 찾으러 가는 거니까 이해해줘.”

“또, 또! 그놈의 공존! 놈들은 찌꺼기라고요! 에너지를 흡수하고 남은 찌꺼기! 선배는 음식물 찌꺼기랑 함께 살고 싶다고 생각해요? 아니잖아요! 그리고 애초에 시작점이 다른 놈들이랑 인간들이 공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인간들끼리도 문화가 달라서 저들끼리 으르렁 거리는 판국에? 하……. 전 선배의 사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남자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자, 바바리를 입은 이는 머리에 중절모를 푹 눌러쓰며 앞으로 걸었다.

“나도 이해를 바라지는 않아. 다만 3대가 쓰레기장을 만든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고 난 그 이유를 알고 싶어.”

“명색이 지배자라는 작자가 음식물 찌꺼기 통 성애자일 줄이야…….”

남자는 점차 멀어지는 등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젠장! 미안하면 포인트라도 넘기고 가든가!”

“넘기면 곧바로 은퇴 계획 세울 게 보이는데 줄 수는 없지. 레이첼. 그녀와 잘 상의해서 움직여. 어지간한 비서들보다 훨씬 나으니까. 그럼.”

바바리는 손을 높이 뻗어 흔들어 보이곤 남자의 앞에서 사라졌다.

*

그것이 남자가 기억하는 전대 지배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직도 공존을 꿈꾸는 겁니까?’

어디 가서 객사할 정도로 나약한 양반은 아니었다.

“저는 저 남자가 이번 이변의 원인이라 생각해요, 지배자님!”

과거의 기억 속에서 빠져나온 남자는 재차 크리스털을 작동시켜 영상 속 민성을 가리키는 리나와 민성을 곁눈질했다.

‘놈이 선배의 장기 말이라도 되는 겁니까? 상관없습니다. 선배가 이렇게 나오신다면 저도 생각이 있으니까요.’

민성을 빤히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은 점차 묘하게 변해갔다.

“어지간한 멍청이가 아닌 이상 영상만 봐도 누가 범인인지 알겠구만. 굳이 그걸 어필하고 싶을까.”

루크의 낮은 구시렁거림에 리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봤다. 그러나 루크는 살짝 몸을 움찔거렸을 뿐, 들으라는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렇잖아? 애초에 어떤 멍청이가 조금만 더 벽에 신경 썼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고, 내 작업량도 2배로 늘어나진 않았겠지. 이래서 몸만 쓸 줄 아는 멍청이한테는 단순한 업무만 맡겨야 하는 건데.”

“이게 진짜…….”

리나가 표독스럽게 쏘아보자 루크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노려봤다.

“그 이상 지배자님 앞에서 무례를 범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자르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은 둘은 꼬리만 강아지처럼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그래서 결과는? 자르, 현재 피해상태가 어떻게 돼?”

“빠르게 적응하는 종족이라 그런지 생각 이상으로 잘 대처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피해 숫자는 대략 수천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인간 무기의 한계를 감안했을 때, 피해는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저의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남자의 질문에 시선을 거둔 자르는 고개를 숙여 보이곤 정중히 답했다. 그러나 평소보다 긴장한 탓인지 자르의 등에선 한 줄기의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쓰레기장에서 흘러나온 쓰레기들이 벌인 행각으로 그의 주인이 꿈꾸던 파라다이스를 더럽히고 말았다. 더욱이 차원 전쟁에서 패배한 전례가 있는 쓰레기들은 이미 승리한 차원의 에너지로 인식된 탓에, 다시 차원 전투가 벌어져도 전쟁에 소집되지 않는다. 백해무익. 쓰레기. 찌꺼기. 어디에도 쓸데없는 놈들. 그것이 놈들의 본질이다. 헌데 그런 놈들을 놓쳤으니, 언제 불호령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래? 억대로 죽었을 줄 알았는데 아직까진 괜찮네.”

예상과 다른 보고에 남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자르는 남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지배자님.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제 쓰레기장에서 나왔으니 그냥 지배자님께서 직접 처리하셔도 되는 것 아닙니까?”

자르의 조심스러운 물음과 달리 루크는 손톱 밑의 시커먼 때를 긁어내 휙 불며 질문했다.

“루크. 3배다.”

“갸아아아아악!”

남자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루크의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창밖에서 울려왔다.

“하여튼 벌을 안 주면 정신을 못 차려요.”

“…….”

사실 루크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눈앞의 남자가 직접 움직인다면 세상을 좀먹고 있는 쓰레기들은 한순간에 정리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그의 의사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 자르는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답을 기다렸다.

“도움은 없어.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놔둬. 안 그래도 전쟁 벌이려 했는데 잘됐지. 전쟁 대비해서 인간들의 잠재력도 끌어올리고 말이야.”

“지…… 지배자님…….”

자르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인간을 사랑하기에 당연히 그들을 도와주리라 생각했던 그의 예상은 처참히 무너졌다. 아무래도 이번 벽 사건으로 화가 단단히 나신 모양이었다.

“솔직히 편의 많이 봐줬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이 정도 막아줬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야지. 언제까지고 보모 노릇 해줄 순 없잖아? 너희 생각은 어때?”

“…….”

지배자의 말이 끝나자 거실은 묘한 정적에 휩싸였다. 스카이다이빙을 즐기고 돌아온 루크의 거친 숨소리만이 간헐적으로 울렸다. 자르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인간이 이번 재앙을 막아낼 확률을 예측했다.

희박하다. 차원 전쟁이라는 변수가 없어진, 순수한 힘이 격돌하는 전투에서 인간들이 괴수들을 막아낼 확률은 미비했다.

“아니다. 이참에 한번 싹 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게 하면 되지. 저놈의 골 아픈 쓰레기장도 같이 쓸려나갈 테니 좋네? 그렇지 않아? 가만있자, 2대는 홍수로 쓸어버렸으니까 난 뭘로 하는 게 좋을까? 불? 지진? 아니면 깔끔하게 새 행성을 창조하는 게 낫겠지?”

남자는 커피를 물 마시듯 들이켜며 다양한 종말론을 언급했다.

“그…… 그것이…….”

수하들은 저들끼리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지배자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쓰레기장에 근접해 있는 인간들의 생활터전 덕에 토토를 만들고 벽을 보강하는 등 노력을 기울여 인간 세상에 피해가 없도록 해왔다. 그러나 인간을 멸망시키면 더 이상 힘들게 쓰레기장을 제거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지배자님께서 냉정함을 잃으셔서 그렇지 분명 훗날 후회하실 결정이다.’

그가 한 번 내린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여태껏 지배자께서 내린 결정을 스스로 철회하시는 일은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말려야 했다. 더욱이 지상에는 그의 후손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종말만은 막아야 했다. 결론을 내린 자르는 마른침을 삼키며 잔 안에서 흔들리는 흙빛 액체에 고정하던 시선을 천천히 올렸다.

“다들 아무 생각 없어? 아무 생각 없으면 더 이상 개입하지 않고 방관하는 쪽으로 간다. 루크, 더 이상 게임 만들지 마. 한동안 푹 쉬어.”

“정말입니까? 이번에는 정말 쉴 수 있는 겁니까?”

갑작스러운 휴가 지급에 루크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남자를 바라봤다. 여전히 파악할 수 없는 버그로 인해 지금까지 평소 작업량의 두 배를 소화해야만 했었다. 물론 두려움에 그 사실은 알리지 못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