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
211화 - 길드 하우스로
47.길드 하우스로
할 말을 잃은 보니스는 멍하니 양피지를 바라봤다. 주인이 불만 있으면 이용하지 말라는데 거기에 대항할 의견이 떠오르지 않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쭉 펴져 있던 어깨는 쪼그라진 풍선처럼 왜소해졌다.
“……라는 게! 저희 점장님의 뜻입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희 점장님 성격이 좀 고약해서 말입니다. 허허.”
보니스의 기세가 한풀 꺾이자, 싸늘한 눈빛으로 보니스를 내려다보던 드워프는 잽싸게 뒷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보니스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발길을 돌려 사라져버렸다.
“냉정한 레이디구먼. 키도 적당히 아담한 게 딱 내 타입이었는데.”
드워프는 못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빠져나가는 손님들을 바라봤다.
“힘내, 인마……. 다시 시작하면 돼. 목숨까지 잃은 건 아니잖아?”
“내가 다시 투기장에 발 들이면 개새끼다, 개새끼…….”
마지막 희망이었던 보니스마저 무릎 꿇자, 보상받고자 하는 의지가 완전히 꺾인 모습이었다.
“좋아, 좋아. 자, 그럼 다 해결된 것 같으니깐…….”
그 모습을 만족스레 바라보던 드워프는 들고 있던 양피지를 돌돌 말곤 선반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고…… 고생하셨습니다, 점장님.”
“점장님? 점장님이 오셨습니까?”
안내원의 인사에 놀란 드워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눈은 안내원을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었다.
“아, 죄…… 죄송…….”
“그럼 저는 완료됐다고 보고 올리러 가겠습니다.”
“예, 예. 그럼…….”
드워프는 안내원의 인사를 뒤로하고 구입처 뒷문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단출하면서도 익숙한 사무실이 보이자, 드워프는 그제야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즐겨도 너무 즐기시는 거 아닙니까? 거 적당히 좀 사용하시지. 어이구, 허리야.”
그리곤 누구에게 하소연하듯 중얼거리며 푹신한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어쩌지? 어쩔까? 그냥 죽으면 편할까?’
한편 구입처를 벗어난 보니스는 이를 악물고 접수처 내를 걸었다. 희망이 꺾여나가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로지 성공만을 바라보고 투기장에 온 지도 거의 2년이 됐다. 2년 동안 고생해 번 돈이 2초 만에 날아간 상실감은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웠다.
툭-
바닥만 보고 걸은 탓일까, 보니스는 누군가의 묵직한 몽둥이에 걸려 발을 헛딛고 말았다.
“눈 좀 똑바로 뜨고 다녀!”
“죄송합니다.”
정작 사과 받아야 하는 것은 그녀였지만 보니스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다 돈이 없는 그녀의 잘못인 것 같았다. 세상이 돈이 없어 패배자가 된 그녀를 멸시하는 듯했다.
“어?”
억누르고 있었던 약한 감정이 밖으로 튀어나오자 눈시울에 투명한 것이 걸렸다. 보니스는 옷소매 사이로 손을 뻗어 그것을 빠르게 훔치곤 서둘러 접수처를 빠져나왔다.
“형님들! 오늘 갓 수확해온 포포낫 시식해보고 가세요! 달작지근하면서도 톡톡 튀는 것이 참 맛있습니다!”
“고급 제조스킬과 단진의 무지실로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만든 수제 신발 팔아요!”
중앙대로로 나오자 상인들의 생기 넘치는 목소리가 대로를 울렸다. 그러나 심해까지 가라앉은 보니스의 마음은 끌어올리지 못했다. 초점 없는 동공에 들어오는 것은 메마른 바닥뿐이었다.
‘전부 틀렸어. 역시 죽는 편이 낫겠지? 그래, 그게 나을 거야. 어떻게 죽는 게 좋을까? 이왕 죽을 거 편하게 죽고 싶은데.’
한참을 멍하니 걷던 보니스는 중앙대로 한쪽에 구비된 벤치에 기어올라 앉았다. 그리곤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죽고자 마음먹으니 평소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밝은 햇살, 어디선가 불어오는 포근한 바람. 접수처 안에만 박혀있을 땐 느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죽기에는 딱 좋은 날씨네.”
보니스는 눈을 감고 잠시간 이 평화를 만끽했다. 그러나 평화는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하……. 나도 코인 좀 많았으면 좋겠다. 그럼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을 거 아냐.”
“난 명예석. 들어오는 건 적고, 나가는 건 많고. 이렇게 살기 힘들어서야, 원.”
먹을거리를 든 한 무리가 비어 있던 옆 벤치를 차지하곤 저들끼리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나오려나?”
“뭐가?”
“마이스터 말야. 기껏 함정까지 파놓고 끌어들였다는데 역으로 당해버렸으니, 쯧쯧. 어지간히도 독이 올랐겠지?”
익숙한 단어가 나와 그들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던 보니스는 고개를 저었다. 결과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소문이 퍼진 모양이다.
“비킬 길드가 그렇게 강했나? 확실히 실력 좋은 개새끼들이지만 마이스터나 다른 길드들에 비빌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글쎄. 듣자하니 고작 한 놈한테 전멸 당했다더라고.”
“뭐? 한 놈?”
옆 벤치에서 놀란 목소리가 울리자 보니스는 실실 웃음만 흘렸다. 그 한 놈 덕에 날린 돈 생각이 다시 난 탓이었다.
“그럼 우리 앞으로 몸 사리고 다녀야 하는 거 아냐? 비킬 놈들 이젠 대놓고 돌아다닐 것 같은데…….”
“에이, 걱정 마, 짜샤. 자존심 센 마이스터가 가만히 있겠어? 분명 눈에 불 켜고 찾아 죽이려 들걸?”
“그럼 다행이지만…….”
‘슬슬 가볼까.’
보니스는 천천히 벤치에서 일어나 중앙대로로 이동하려 했다. 맑은 날씨도 즐겼으니 이제 적당히 누울 묫자리만 찾으면 될 것 같았다.
“것보다 애초에 왜 그런 존재에 대한 정보가 없었을까? 솔직히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마이스터랑 연합을 혼자 때려잡는 놈이 존재했을지 말야.”
“모르지……. 엄청 좋은 아이템이나 스킬을 갖고 있다면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고. 가만……. 혹시 이참에 비킬 길드에 가입하면 콩고물 좀 떨어지는 거 아냐? 어때?”
한 행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보니스의 몸도 우뚝 멈춰 섰다.
‘그래. 만약 정말 그 영상이 오류가 아니었다면 남자는 엄청난 스킬이나 아이템을 보유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연합들도 때려잡았겠지. 그래! 확실해! 잠깐만…… 잘만 하면 이거…….’
보니스는 갖고 있는 정보와 추론을 최대한 조합하며 머리를 굴렸다. 그리곤 곧 생동감 넘치는 눈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음 언저리에서 허덕대던 이의 모습이라곤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일단 정보 길드에 가야겠어. 기다려라, 비킬.’
정보 길드에도 다시 방문해야 할 듯했다. 모르긴 해도 지금쯤 그쪽에서도 영상을 접했을 것이고, 총력을 기울여 그 남자의 정보를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큭……. 바랄 걸 바라, 인마! 초심자 털어먹는 새끼들이 퍽이나 돈 뿌리겠다. 그리고 이렇게 구설수에 올랐는데 한동안 짱박혀 있겠지. 헛소리는 그만 하고 밥이나 먹자고. 이집 커밥 진짜 맛있어! 빨리 먹어봐!”
벤치에 앉은 행인들은 대화를 끝내곤 들고 있던 먹을거리에 열중하려는 찰나.
“꺄아아아아악!”
“뭐, 뭐야……. 미친년인가?”
행인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대로를 질주하는 보니스의 등을 멍하니 쳐다봤다.
*
라이든의 외곽이자 컴퍼니와의 국경선과는 한참 동떨어진 서쪽 끝자락 영지, 하이린.
“크르엉!”
“야, 뭔 길드 하우스가 이런 구석에 처박혀 있어!”
거칠게 투레질하는 파이어 이글의 등에서 내린 민성은 연이어 땅으로 하강하는 파이어 이글에게 소리 질렀다. 어쩐지 멀쩡한 수도를 놔두고 파이어 이글의 둥지에 방문할 때부터 수상쩍다고 생각했긴 했다. 하지만 불타는 등 위에서 한참 동안 점으로 변한 마을들을 보고 나서야 그들의 목적지가 꽤나 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서어억? 땅값이 얼만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 엉? 당연히 외곽이 싸니까 이리로 온 거지! 꼬우면 코인 보태든가! 내가 이래서 초심자를…….”
닐바스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꽥 소리 지르며 그리폰의 등에서 내려왔다. 사실 닐바스의 심기는 썩 좋지 못했다. 스벤의 환송회도 제대로 해주지 못했을 뿐더러 민성과의 결투에 패배한 대가로 명예석 100개를 잃었고, 민성과의 계약 때문에 길드장 자리도 내놔야만 했다. 여러모로 손실이 많았던 하루였다.
“하……. 아직도 까칠하네? 경기장으로 가서 대화 좀 할까? 안 그래도 네가 공헌도 2위라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잘됐다, 그치?”
오로지 길드장이라는 이유 하나로 공헌도 2위에 올랐다는 소리를 듣곤 얼마나 어이가 없었던가.
“……좋아해! 잠재력이 무궁무진하거든!”
민성이 대검을 빼들려 하자, 닐바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리며 카드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처음과 달리 그의 카드수량은 반이 넘게 줄어 있었다.
“하여튼 입만 살아가지고.”
민성은 피식 웃으며 대검을 등에 이었다. 그리곤 아이템 창을 열어 명예석을 살폈다. 스벤에게서 받은 명예석 300개, 닐바스를 털어 얻은 100개, S등급을 획득해 얻은 700개 그리고 길드전에서 승리한 보상으로 얻은 9,100개. 총 합산해 10,200개의 명예석이 고이 잠들어 있었다.
‘10,200개라. 확실히 길드전이 크긴 컸네. 다음부터 명예석 필요하면 길드전만 벌이는 게 나으려나?’
“때…… 때려봐! 때려보라고! 어…… 어차피 허세인 거 다 알아! 천벌 맞으면 방어력이 높아도 한 방이라고!”
민성이 생각에 잠기자, 닐바스는 이때다 싶어 기세 좋게 목소리를 높이며 양팔을 좌우로 벌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연신 민성의 움직임을 살피기 바빴다.
“아, 시끄러워. 그래, 그럼. 스벤이 이별 선물로 상점 내에서도 공격 가능하게 해주는 아이템 하나 주고 갔는데 잘 듣나 시험해 봐야겠다.”
“……뭐? 그럴 리…….”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믿기 어렵다는 얼굴로 주춤거리는 닐바스의 모습을 보니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믿기 어려우면 죽어야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닐바스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민성은 매섭게 닐바스를 향해 쏘아갔다.
“으아아아악! 죄송합니다!”
“늦었어. 이번에는 확실하게 빼줄게.”
도마뱀이 다급하게 외치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지만, 이미 재미를 붙인 민성의 대검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둘 다 그만하세요.”
쿵-
그때, 그들 사이로 문짝 크기의 거대한 방패를 든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
기하학적인 그림으로 도배된 철 방패가 닐바스를 가리자, 실제로 공격할 생각이 없었던 민성은 대검을 회수하곤 방패를 바라봤다. 그러자 닐바스를 가리고 있던 방패가 뒤로 치워지더니 그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비슷한 키에 금발의 긴 머리. 그리고 등 뒤에는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새하얀 날개를 달고 있는 여인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닐바스가 보였다.
‘아티아라고 했었나?’
닐바스가 그의 길드원들을 소개해줄 때 언뜻 들었던 이름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천인족이라 소개했었다.
‘하여튼 겉모습은 믿을 게 못된다니까.’
겉보기엔 천사나 다름없는 모습이었으나, 초심자들만을 전문으로 죽이는 닐바스의 길드에 있으니 분명 제정신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