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207화 - 길드전(7)
“간만에 영감이 올바른 소리도 하는구먼.”
원수 대하듯 하던 하리보와 이모뎁은 어느새 의기투합하여 보상 인상을 외쳤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먼저 닐바스를 찾아내는 쪽에 좀 더 얹어드리겠습니다. 다행히 제게 그 정도 재량은 있으니까요.”
“음?”
“흠.”
길버트는 빙긋 웃으며 당황하는 둘에게 말을 이었다.
“아니면 인상은 없습니다. 거절하시면 그 이상의 교섭은 없습니다. 저희 마이스터는 앞으로도 여러분들과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싶습니다만…….”
“하지! 하겠네! 이 몸의 노련미를 보여주지!”
“좋지! 영감보다 먼저 찾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이 망둥이 같은 놈은 공경이라는 걸 몰라! 싹수가 노란 놈 같으니.”
잠시간 의기투합했던 둘은 재차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아, 그리고 제가 발견했을 경우에는 양측 다 추가 보상은 받으실 수 없습니다. 그럼.”
길버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닐바스를 찾아 이동하려는 찰나,
퉁-
구멍 속에서 울린 미세한 소리에 길버트들은 몸을 움찔거렸다.
“…….”
셋은 말없이 구멍만을 바라봤다. 부디 그들의 청각 기관에 문제가 있길 바라며 말이다.
쿵-
그러나 기대와 달리 재차 구멍 속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보다 조금 더 커다래진 채로 말이다. 이모뎁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영감. 어떻게 된 거야? 사실 길드 스킬, 외관만 그럴듯하고 실속 없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불멸자조차도 능히 말살할 수 있는 파괴력이란 말이다! 시험 삼아 한번 맞아보는 건 어떠냐.”
하리보는 믿기 어렵다는 듯 머리를 흔들며 버럭 소리쳤다. 그리곤 이모뎁의 붕대를 움켜잡았다.
“어이, 영감. 농담이지?”
“이놈! 내가 농담 따먹기나 할 팔콘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젠장. 말을 말아야지. 아, 좀 놔! 다 풀려, 이 할배야!”
하리보가 흥분하여 붕대 잡은 날개를 거칠게 흔들자, 이모뎁은 짜증스럽게 그의 날개를 쳐냈다. 그 역시 페가수스 길드 스킬의 매서움은 잘 알고 있었다. 단지 하리보의 기를 살릴까 걱정돼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쾅-
“옵니다.”
이젠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굉음이 들려오자 길버트는 작게 중얼거렸다. 동시에 구덩이에서 작은 덩어리 하나가 튀어 올라 그들 앞에 떨어졌다. 흙먼지와 말라붙은 체액이 덕지덕지 붙은 그것. 그것은 길버트들을 앞에 두고도 손으로 바삐 먼지를 털어내기 바빴다.
“…….”
길버트들은 각기 경악과 공포가 가득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뭐 해? 계속 얘기들 나눠. 이생에서 나누는 마지막 대화가 될 텐데. 그 정도는 기다려줄게.”
민성은 광선의 열기에 녹아 눌어붙은 체액을 뜯어내며 싱긋 웃었다.
“역시…….”
길버트는 처량한 웃음을 흘렸다. 가슴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불길한 느낌. 그 느낌은 믿음을 배신하지 않고 어김없이 적중해버렸다. 실패를 직감한 길버트는 남들 모르게 통신 아이템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습니다. 생각지 못한 변수가 있었습니다. 예. 죄송합니다……. 어떠한 처벌이건 달게 받겠습니다. 예, 그럼…….”
그리곤 재빨리 통신을 끝내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하리보 옆에 섰다.
“도…… 도대체 네놈 정체가 뭐냐? 어떻게 그걸 맞고도 살 수 있단 말이냐!”
하리보는 떨리는 날개로 삿대질해대며 거품을 물었다. 아무리 페가수스의 모든 길드원들이 모이진 않았다지만, A급 랭크 전사들도 순식간에 소멸시킬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S급 능력자가 온다 해도 능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명실상부 최고의 스킬이라 여기던 자부심은 오늘부로 거울처럼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좀 지치네.’
“유언은 다 끝낸 거야?”
하리보의 질문을 가볍게 무시한 민성은 광선에 얻어맞아 쑤시는 어깨를 주무르며 긴장한 티가 역력한 이들을 바라봤다. 강화한 대검과 코트가 아니었다면 중상을 입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파괴력이었다.
“죽어!”
“뒈져! 뒈지라고! 이 괴물 새끼야!”
민성에게 근접한 연합원들은 함성 지르며 민성의 주위를 둘러쌌다. 끝이 뾰족 서 있는 창날, 두터운 철퇴와 메이스 등, 무수한 숫자의 무기가 민성을 덮쳐왔다.
“그놈들 참 더럽게 끈질기네.”
민성은 그의 시야를 가득 메운 병장기들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언뜻 봤을 때 그의 모습은 불가항력의 힘에 체념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민성의 중얼거림이 끝나기 무섭게 살의로 얼룩진 무기들이 민성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잔챙이들은 좀 꺼져 있어.”
치익-
“끄아아악!”
민성은 파리 떼처럼 달려드는 연합원들을 검면으로 가볍게 때려잡았다. 민성의 손놀림을 따라 대검이 춤출 때마다 연합원들의 몸은 비명과 함께 하늘 위로 솟구쳤다.
“…….”
길버트들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있는 것 없는 것 전부 끌어다 퍼부어도 괴물 놈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다. 순식간에 연합원들 수십이 쓸려나갔지만,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얘져 어떤 명령을 내려야 할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주춤-
“으…….”
“것보다, 어디 보자……. 그래도 이중에선 네가 제일 쓸모 있을 것 같네. 뭐, 나머지는 필요 없겠지.”
겁먹은 개들이 스스로 꼬랑지 말자, 민성은 물건 품평하듯 길버트들을 쓱 둘러보곤 씩 웃었다.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긴. 강화효과 실험도 끝났으니까 더 이상 쥐새끼들은 필요 없다는 소리지. 실험시간은 여기까지.”
실험을 끝낸 실험용 쥐는 폐사된다. 마찬가지로 민성에게 효용성이 없는 연합원들은 실험용 쥐에 지나지 않았다.
“…….”
“거하게 대접 받았으니까 이제 이쪽에서도 대접해야지. 토할 정도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민성의 말에 길버트는 입을 꾹 다물고 검날을 앞으로 세웠다. 초라한 몰골을 한 민성이었지만 방심은 없었다. 스킬의 맹폭 속에서 살아남은 놈, 어떤 암수를 숨겨놨을지 몰랐다.
척-
그러자 길버트를 따라 연합원들도 언제든 돌진할 수 있도록 채비를 갖췄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갑옷? 갑옷은 생명이 없어. 친구로 만들 수…….]
[움직인다! 살아 있는 갑옷이다! 죽여!]
갑작스레 민성이 입을 꿈틀거리자, 유령이 된 난장이들이 쏟아져 나와 길버트의 몸에 달라붙었다.
“이건…….”
길버트는 몸에 그득 달라붙은 난장이들을 털어내고자 창대를 휘둘렀다. 그러나 악귀가 된 난장이들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뭐긴 니들이 좋아하는 저주지. 광전사의 외침!”
크아앙-
순식간에 길버트의 앞으로 접근한 민성은 거친 함성을 질러 길버트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그리곤 검을 옆으로 세워 길버트의 배를 힘껏 갈겼다.
“흡!”
난장이에 시선이 쏠려 있던 길버트는 다급히 창대를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아까와 달리 둔해진 몸은 그의 믿음을 배신했다.
“커헉!”
제대로 반응조차 못 하고 복부에 타격을 허용한 길버트는 천천히 고꾸라졌다.
“대장! 이 새끼가!”
길버트의 수하들이 황급히 길버트를 돕고자 했으나 그보다 민성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정보는 토해내고 가야지.”
민성은 잽싸게 어깨에 길버트를 이고는 뒤로 빠져 닐바스의 곁으로 돌아왔다.
“이놈!”
“어? 움직여? 이 자식 죽는 꼴 보고 싶어? 어?”
머리를 잃은 블랙 스미스들은 분개하여 돌격하려 했으나, 민성의 협박에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뭣들 해! 고작 한 놈이잖아! 안 죽이고 뭐 하는 거냐고!”
블랙 스미스들은 주변 연합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어느 길드 하나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놈은 여력이 있어. 괜히 먼저 움직였다가 역으로 당하기라도 한다면…….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그럴 수는 없지! 암!’
‘닐바스를 확보하는 게 급선무야. 어차피 성격 급한 영감이 먼저 움직이겠지. 오만한 선인의 돌은 우리 할케니아의 것이다. 다른 놈들에게 넘길 수는 없어!’
먼저 움직이면 손해다.
하리보와 이모뎁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이었다.
키아아악!
“워, 워! 아직이야! 기다려!”
다만 언제든 민성의 목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늘에서는 성난 그리폰들이, 지상에서는 수많은 연합원들이 천천히 거리를 좁혀왔다.
“가만 있자. 물을 어디서 구해야 하나?”
사면초가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민성은 산책 나온 행인처럼 유유자적하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곤 귀신 보듯 그를 쳐다보는 닐바스를 보곤 눈을 빛냈다.
‘눈물도 물이니까 되겠지.’
“야, 뭐 했다고 쉬고 있어!”
수옥의 조건인 물 한 방울을 떠올린 민성은 주먹으로 닐바스의 코를 세게 때렸다.
“컥!”
닐바스가 고통에 몸을 틀자, 그의 눈에 고여 있던 물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잽싸게 눈물을 낚아챈 민성은 찝찝한 얼굴로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하필 닐바스의 눈물이라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준비는 끝났다.
“수옥.”
민성이 작게 중얼거리자 그의 체내에 있던 마나가 쑥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아주 미세한 떨림이 발끝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잘 가.”
“어어?”
민성은 닐바스를 빈 왼쪽 어깨에 들쳐 메며 싱긋 웃어 보였다. 반대 어깨에는 혼절한 길버트가 덜렁덜렁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소리지?”
“이놈!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연합원들은 민성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무슨 짓을 벌인 건지 몰라도 싸한 한기가 그들의 마음속을 훑고 갔다. 수많은 군세를 주위에 두고도 저리 자신 있어 보이는 민성의 모습은 그들의 불안감을 더욱 부채질했다.
콰르르르-
“어이고, 저기 오네.”
메마른 땅 저 너머에서 파도소리가 들려오자 민성은 넉살좋게 웃었다.
“저…… 저건 대체 뭐야!”
“어이……. 농담이지?”
점차 파도가 가까워지자, 연합원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소리 질렀다. 하늘과 맞닿은 것 같은 높이와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폭의 파란 물결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휩쓸고 지나갈 듯 몰려왔다.
‘이렇게 보니까 어마어마하네.’
광해군의 묘지에선 내부에 있던 탓에 자세히 보지 못했기에 민성은 방관자처럼 느긋하게 파도를 관찰했다. 이리 보고 있자니 새삼 수옥의 섬뜩함을 느낄 수 있을 뿐더러, 지형에 따라 대형스킬의 효과도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으……으아아아! 도망쳐! 휩쓸리기 전에 도망쳐!”
하나둘 뒷걸음질 치던 연합원들은 괴성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도망가지 마! 단순한 눈속임일 뿐이야! 잘 쳐줘봐야 A랭크 새끼일 뿐이다! 그런 놈이 대형스킬을 갖고 있을 리 없다! 환술계열 스킬일 뿐이야!”
“놈을 죽여! 놈만 죽이면 없어질 거다!”
각 장들은 수하들의 전의를 일으키며 시전자인 민성을 죽이려 돌격을 감행했다. 그 모습에 사기가 오른 연합원들은 그들의 뒤를 따랐다.
“웃긴 놈들이네. 양동이 엎은 새끼 죽인다고 엎은 물이 없던 걸로 되는 줄 아나.”
그 모습을 어처구니없게 보고 있던 민성은 피식 웃으며 뒤돌아 냅다 달렸다.
“라이트닝 해머!”
그리폰 위에선 번개를 머금은 망치가,
“부패하는 늪!”
“포이즌 스피어!”
지상에선 독액이 뚝뚝 떨어지는 창날이 민성에게 쇄도해왔다. 그러나 민성은 날아오는 스킬들을 유유히 피해내며 파도를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