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
205화 - 길드전(5)
“대장. 다 덤벼들면 충분히 죽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옆에서 부하의 속삭임이 들려오자 길버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먼저 움직이면 손해다.”
아직 놈의 힘은 미지에 가까웠다. 먼저 움직였다간 독박을 쓸 확률이 높았다. 설령 블랙 스미스가 움직인다 해도 곧바로 타 길드원들이 호응해줄지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잠자코 구경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 길버트. 당황하지 마! 넌 자랑스러운 블랙 스미스의 수장이다! 정신 차려!’
길버트는 스스로를 독려하며 민성을 노려봤다. 그들의 발아래 쓰러져 명예석을 토해낸 컴퍼니 진영의 손님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실제로 컴퍼니에선 어지간한 초심자가 아닌 이상, 길버트와 블랙 스미스를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더욱이 최상위 길드들이 연합하는 일이 극도로 드물었기에, 이번 전투에 수많은 이목이 쏠려 있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고작 한 놈이야! 한 놈이라고!’
헌데 고작 한 놈에게 겁먹어 몸 사렸다간, 마이스터의 전투 집단 중에서도 최고라 불리는 블랙 스미스의 이름이 울 것이었다.
“다른 놈들의 도움 따위 받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강하다!”
“맞습니다! 저희는 무적입니다, 대장!”
갑작스레 길버트가 고함지르자. 그의 수하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소리치며 호응했다. 그러자 길버트는 기세를 몰아 검 끝으로 민성을 가리켰다.
“놈은 멀쩡한 척하지만 방금 공격으로 크나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실제로 놈은 꽤 상위 등급의 방어 스킬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나마도 지금은 쿨타임 돌고 있을 게 분명했다. 놈을 죽이기엔 최적기였다.
“놈을 죽이고 돌을 확보한다.”
철컥-
병사들의 주위를 감도는 긴장감이 길버트의 낮은 외침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
“블랙 스미스. 전원 돌격!”
길버트가 괴성을 지르며 앞으로 돌진하자, 수하들 역시 함성을 내지르며 그의 뒤를 쫓았다.
“우리도 움직인다! 돌격! 돌격! 다른 길드보다 늦어선 안 된다!”
“닐바스! 닐바스를 최우선적으로 챙겨!”
그러자 서로 눈치만 살피던 할케니아와 페가수스도 기다렸다는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야를 맹렬히 질주하는 백색 갑옷들 뒤로 다수의 군세와 서슬 퍼런 부리를 딱딱거리는 그리폰들이 허공을 그득 메웠다.
“그놈들 다구리 참 좋아하네. 야, 일어나.”
민성은 몰려오는 무리들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며 엎어져 있는 닐바스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크흑.”
그러나 닐바스는 여전히 눈물을 짜며 일어날 생각을 않았다. 기껏 위험을 알려주러 왔다가 복날의 개처럼 두들겨 맞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사정을 봐줄 민성이 아니었다.
“재들한테 밟혀 끌려갈래? 아니면 나한테 맞고 일어날래?”
민성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대검을 쳐들자,
“일어났어! 이것 봐! 일어났잖아!”
닐바스는 눈물을 훔치며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진작 좀 빠릿하게 움직일 것이지.”
“와아아아아!”
민성은 가까이 다가온 적들을 힐끗 살피곤 계속 말을 이어갔다.
“어디 구석에 숨어 있어. 멍청이도 아니고,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뭐?”
닐바스는 기가 차다는 얼굴로 민성을 바라봤다. 도대체 이 허허벌판인 곳에서 어디로 숨으란 말인가? 제멋대로 튀어나가 크리스털을 부술 때부터 진정 미친놈인 건 알았지만, 이제 전황조차 읽지 못할 정도로 돌아버린 모양이었다.
“유령 출몰.”
민성의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닐바스의 의문도 씻은 듯 날아갔다.
“어?”
닐바스는 난데없이 투명해져 보이지 않는 그의 손을 찬찬히 흔들어 보였다. 손이 있어야 할 곳에는 황폐한 땅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닐바스는 슬며시 카드를 꺼내 민성의 눈에 흔들어보였다.
“더 맞기 싫으면 카드 집어넣고 사리고 있어.”
민성은 슬며시 카드를 섞어대는 도마뱀을 보며 피식 웃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안 보일지 모르나, 스킬 시전자인 민성에겐 뚜렷할 정도로 잘 보였다. 민성의 으름장에 몸을 움찔거린 닐바스는 황급히 카드를 집어넣곤 자리를 벗어났다.
“와아아아아! 죽여라! 놈만 죽이면 돼!”
“돌격! 블랙 스미스의 긍지를 보여줘라!”
“닐바스가 없어졌어! 닐바스를 찾아! 돌은 할케니아가 가져야 한다!”
닐바스의 꽁무니를 바라보던 민성은 몸을 돌려 짙은 먼지를 일으키며 몰려오는 적들을 마주했다.
‘이 도둑 새끼들이 어디 남의 물건을 함부로 넘보고 있어.’
닐바스의 것은 모두 그의 것이다. 엄연히 주인이 눈을 부릅뜨고 있건만, 제 것이라도 되는 듯 아이템을 외쳐대니 괘씸하게 느껴졌다.
“도둑은 때려잡아야 제 맛이지.”
민성은 작게 중얼거리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그리곤 뒤꿈치에 힘을 싣곤 다리를 쭉 뻗었다.
“오…… 온다!”
“죽여!
“처지지 마! 고작 한 놈이야! 위축될 필요 없어!
민성이 쏘아진 화살처럼 쇄도해오자, 연합원들 역시 용맹한 함성으로 민성에 대한 두려움을 지워내며 돌격속도를 더욱 높였다.
“커스!”
“교만한 신관을 죽이는 사슬의 속박!”
“대지를 가로지르는 한 줄기의 뿌리!”
서로가 전투의 광기와 살의가 담긴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는 거리까지 근접하자, 몸을 옥죄려 드는 사슬부터 지면을 뚫고 올라온 두터운 창날까지, 수많은 스킬과 저주들이 민성을 향해 쇄도해왔다.
[불굴의 의지가 발동합니다. 커스의 저항에 성공하셨습니다.]
“하, 새끼들. 시작부터 또 장난질이네.”
스킬의 폭격 속에서도 멀쩡했던 그의 모습을 금세 잊은 모양이었다. 스킬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면 남은 방법은 오로지 육탄전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막연한 기대를 갖고 수작질을 부린다. 금붕어도 아니고 학습능력이 상당히 부족한 놈들인 것 같았다.
“어이쿠.”
민성은 조소하며 살짝 발을 틀었다. 그와 동시에 그가 밟고 있던 지면에서 뾰족한 돌기둥이 튀어나와 애먼 허공을 찔렀다. 몸을 휘감으려 드는 굵은 사슬은 단칼에 잘라 두 동강 내버렸다.
“잔재주는 충분히 감상했으니까, 뭐 좀 신선한 거……. 응?”
대검을 회수한 민성은 최선두에서 돌진해오는 이를 보곤 눈을 빛냈다.
“놈을 죽이고 닐바스를 확보해! 이번 전투를 이겨야 우리 할튼도 공훈을 인정받을 수 있다!”
검은 갑주를 두르고 음흉한 기운을 풍기는 할튼 길드장이 유령마를 타고 돌진해오고 있었다. 그의 주변으론 일반 말을 탄 할튼 길드원들이 그를 엄호했다.
‘그러고 보니 저 자식이 시비 털어서 이렇게 됐었지?’
그를 이번 사태에 끌고 들어온, 닐바스와 더불어 무려 지분 50%를 차지하고 있는 대주주였다. 먹잇감을 포착한 민성은 데스나이트를 향해 매섭게 달려들었다.
“돌격! 오늘 전투로 라이든에 할튼의 이름을 똑똑히 남……. 어?”
기세 좋게 달려들던 할튼은 그를 향해 질주해오는 민성을 보곤 당황하여 말을 더듬거렸다. 사실 그는 적당히 싸우는 척하며 공훈이나 얻을 계획이었다. 어차피 대형 길드들의 전투원들이 대거 투입된 상황. 구태여 나설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하고 많은 이들 중 하필 그를 노리고 올 줄은 몰랐다. 그러나 유령마는 그의 마음도 모르고 네 다리를 바삐 놀려 빠른 속도로 민성에게 접근했다.
“안녕?”
민성이 기다렸다는 듯 싱긋 웃으며 대검을 머리 높이 쳐들자, 할튼 역시 반사적으로 검을 위로 들어올렸다.
좃됐다.
오직 그 한 단어만이 할튼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이윽고 민성의 거대한 대검이 유령마의 몸을 가르고 머리로 날아오자, 할튼은 무기고 자존심이고 내팽개치고 다급히 말에서 떨어졌다.
“어라? 피해?”
민성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무리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지만 그로서는 날벌레가 멀쩡히 살아 있다는 사실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대장! 할튼이 낙마했어!”
“놈이 길드장을 노리고 있어! 막아! 놈을 막아!”
할튼이 낙마하자, 그의 길드원들은 할튼의 빈자리를 커버하며 돌격을 이어갔다.
“하아…….”
민성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검면이 보이게 대검을 옆으로 세웠다. 그리곤 힘을 가득 실어 반원을 그리며 크게 휘둘렀다.
“어?”
콰직-
검면에 강타당한 할튼의 길드원을 시작으로 옆에서 함께 돌진하던 길드원들도 볼링 핀처럼 우수수 쓰러져 내렸다. 그 반동으로 캔 음료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갑주와 투구였을 고철들이 허공으로 튀었다.
“끄아아아악!”
강한 압력에 터진 신체들 사이로 흘러나온 액체가 도화지에 흩뿌려진 물감처럼 지면을 적셨다. 그럼에도 민성은 손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대검이 한 번 위로 들릴 때마다 연합원들은 낙엽 쓸리듯 쓸려나갔다.
“살려……. 살려…….”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선 할튼들의 고통스러운 신음과 원조를 요청하는 목소리로 뒤덮였다.
“그렇게 살고 싶었으면 애초에 이런 곳에 발 들이밀지 말았어야지.”
그러나 민성은 지옥에서 소환된 악마처럼 무자비하고 잔혹하게 적들의 머리를 쓸어 담았다. 심지어 전투가 불가한 부상자들마저 대검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할튼은 멍한 눈으로 길드원이었던 시체들을 바라보며 허탈한 웃음을 토했다. 허공에 날아다니는 갑옷 파편과 부스러기들이 꼭 바스러진 그의 자신감 같았다.
“베는 것보다 이게 더 손맛이 있네.”
민성은 낮게 중얼거리며 난장판이 된 전열을 살폈다.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내심 놀라는 중이었다. 평소였다면 몇 죽이지 못할 공격이 세트 아이템 효과로 상승한 근력과 강화 효과로 제대로 뻥튀기 된 상황이었다.
“돌격해! 놈은 무적이 아니야! 언제고 지칠 거다! 계속 돌격해!”
그러나 수많은 사상자들을 내고도 연합원들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시체는 물론 구해달라고 부르짖는 산 자들마저 짓밟으며 거듭 전진했다. 다만 그 기세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이 자식들이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민성은 거듭 몰려오는 연합원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자 기회라는 듯 사방에서 살의 그득한 무기들이 목숨을 노리고 날아왔다. 가슴팍으로 날아오는 창날이나 날붙이들은 강화된 코트를 뚫지 못했다. 머리를 박살내려 날아오는 철퇴와 메이스 따위들도 대검에 막히거나 민성의 휘두름 한 번에 주인과 함께 역으로 박살나고 말았다.
“하……하하하. 함정……. 함정이었어……. 닐바스 이 개새끼가 함정을 판 거였어…….”
빠져나갈 수 없는 미끼를 걸었고, 닐바스는 그걸 덥석 물었다. 그러나 민성이 난동부리는 걸 보고 있자니, 미끼를 문 것은 오히려 그가 된 것 같았다.
치익-
연합원들의 절규, 그리고 마나와 체력 타는 소리만이 할튼의 귓가에서 앵앵 울렸다. 이윽고 체액이 덕지덕지 묻은 대검이 날아오자, 할튼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허공을 날다 바닥으로 떨어진 할튼의 투구에선 검은 연기만이 새어나왔다.
“놈은…… 괴물이야……. 괴물이라고!”
“저걸 어떻게 이기라는 거야!”
삽시간에 몇백에 가까운 희생자를 내고서야 연합원들은 한풀 기세가 꺾여 전진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