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
204화 - 길드전(4)
“아직 여유가 있나 보구나! 이것도 피해봐라! 임팩트 킬!”
그 모습에 자신감을 얻은 길버트의 창날은 집요할 정도로 민성의 목숨줄을 노리고 쇄도해왔다. 거먼 아우라를 풍기는 창날이 민성을 스쳐 지나 바닥에 박히자 격렬한 폭음과 함께 파편이 튀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덧 진동이 멈추자,
“놈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지금이다! 죽여!”
민성이 확연하게 느려진 움직임을 보이자, 연합원들은 사납게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쿠웍! 쿠웍!”
“트리플 샷!”
“아이스 스피어!”
“오만한 자를 벌하는 성스러운 빛이여!”
공중에선 기회를 엿보던 그리폰라이더들의 스킬과 화살이, 지상에선 수많은 군세가 쏟아낸 스킬들이 민성을 향해 쇄도해왔다. 하나하나는 그 급이 높지 않았으나 몰아치는 스킬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었다.
“아름다운 최후를 맞겠군. 좋겠어. 모든 전사들이 바라고 원하는 마지막이니까 말이야.”
그 모습을 본 길버트는 재빨리 창을 회수했다. 자칫 자리에 있다가 민성과 함께 스킬에 휩쓸려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 닐바스의 스킬은 부족한 감이 있었는데. 시험하기에는 딱 좋겠네.’
민성은 쏟아져 내리는 스킬 비를 보며 히죽 웃었다. 강화된 코트의 방어도 테스트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다. 위태롭다 싶으면 회복스킬을 사용하면 그만이다.
“그럼 네가 맞든가, 새끼야!”
“다음 생애에는 좀 더 명예로운 삶을 살아가기 바란다.”
민성이 느릿하게 가운뎃손가락을 쳐올렸으나, 길버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에서 이탈했다. 그와 동시에 민성이 있는 자리로 스킬 세례가 내리꽂혔다.
쾅-
공기를 찢는 격렬한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민성을 집어삼켰다. 뿐만 아니라 폭발의 여파로 시뻘건 화염이 뒤이어 민성이 있던 자리를 덮쳤다. 그 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연합원들은 검이나 방패 따위로 날아오는 파편을 막아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죽었겠지?”
“당연히 죽었겠지! 저 폭발에 살아 있을 리가 없잖아!”
“살아 있으면 그건 신이지, 암.”
그러나 막연한 불안감은 그들의 가슴속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
“…….”
길버트 역시 맹렬히 타오르는 화염을 가만히 지켜봤다. 놈의 육신은 분명 저 화염 속에 타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살점 하나 남기지 못하고 말이다. 헌데 어째서인지 가슴속에 가득 들어찬 불쾌한 감정은 빠져나갈 생각을 않았다.
“놈은 죽었다! 우릴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마이스터는 영원하다!”
와아아아-
길버트는 괜스레 목소리를 높여 수하들을 독려했다.
“이제 남은 건 닐바스와 놈의 길드원 몇뿐이다! 돌격!”
“빨리 움직여! 우리 할케니아가 먼저 닐바스를 확보해야 한다!”
최악의 적인 민성을 처리한 연합원들은 각자의 목적에 따라 급히 푸른 크리스털로 돌진했다. 그러나 길버트는 그런 이들을 지그시 응시할 뿐,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대장!”
그때, 연합원들 사이를 뚫고 온 란둔이 검은 포대기를 길버트 앞에 내려놨다. 그리곤 주변 시선을 살피며 포대기를 풀었다.
“이거 놔, 이 새끼들아! 이 시부럴 새끼들아, 놓으라고!”
“끌고 왔습니다. 저항이 거세 다른 놈들은 잡아오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길버트는 온갖 상처와 체액으로 덮여 엉망이 된 닐바스를 보곤 란둔의 갑주를 몇 차례 두들겨줬다.
“괜찮아. 필요한 건 닐바스뿐이니까. 심문할 것이니, 잠깐 가리고 있어. 다른 놈들한테 보여 봐야 좋을 것 없으니까.”
“예!”
란둔이 작은 장벽을 치자 길버트는 닐바스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어지간히도 분했는지 리자드 맨은 몸을 작게 들썩이고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그래. 악명 높은 비킬 길드의 길드장이 이런 꼴이 될지 누가 알았을까?”
“이 미친 새끼가! 애초에 네놈 새끼들이 노리고 함정 판 거 아냐! 어!”
‘둘 다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닐바스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주판을 두드리곤 혀를 찼다. 민성이 강한 힘으로 적을 쓸어버리고 와중에 심대한 부상을 당해 죽는다. 이보다 완벽한 시나리오는 없을 터였다. 그럼 스벤의 복수도 이룰 뿐더러 민성에게 약조한 보상도 넘길 필요 없었다. 특히나 창고에 잠들어 있는 그것. 그것만은 누구에게도 넘기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모았는데!’
그가 피땀 흘리며 모아둔 아이템을 보관한 개인 창고를 털리느니, 까짓것 저주를 받거나 죽는 편이 이득인 것 같았다.
퍽-
닐바스가 악다구니 지르자 길버트는 굵은 창대로 그의 주둥이를 후려쳤다.
“함정이라니.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애초에 너희는 잠시 방목해놓은 가축에 불과해. 설마 마이스터가 힘이 없어 너희를 방치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뭐?”
뜬금없는 길버트의 질문에 닐바스는 눈을 옅게 뜨고 백색 투구를 노려봤다.
“우리는 너희가 초심자들의 명예석을 털어먹으며 충분히 살찌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 결실을 수확할 차례인 거지.”
정의를 표방하는 놈들이니 대놓고 초심자들의 명예석을 갈취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용한 것이……. 길버트의 말에서 진의를 읽은 닐바스는 모욕감에 몸을 잘게 떨었다.
“……그러니까. 여태껏 일부러 우리 길드의 활동을 눈감아줬다?”
“너희는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줬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 그 자리는 또 다른 누군가가 차지하겠지. 그간 수고했다.”
“이 시발새끼가아아!”
무뚝뚝한 길버트의 음성에 눈이 홱 돌아간 닐바스는 괴성을 지르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곧장 제지를 받고 거칠게 바닥을 뒹굴었다.
“아이템 사용, 탐색의 돋보기.”
길버트가 닐바스를 가리키며 작게 중얼거리자, 그의 앞에 닐바스가 가진 아이템의 목록이 나타났다.
“…….”
그러나 예상과 달리 텅텅 빈 목록이 뜨자 투구 속 얼굴이 천천히 굳어갔다.
“오만한 선인의 돌은 어디에 뒀지?”
“큭……. 뭘 노리나 했더니. 그거였어?”
닐바스는 바닥에 혈액 섞인 침을 뱉으며 비웃음 지었다.
“어디에 뒀냐고 물었다.”
“너 같으면 그런 물건을 가지고 다니겠어? 어? 병신이야?”
닐바스가 낄낄대며 빈정거리자 길버트는 재차 창대로 그의 얼굴을 거칠게 후려쳤다.
“흥. 네놈 같은 놈들 생각이야 뻔해. 보나마나 창고에 숨겼겠지. 길드 하우스의 위치를 말해라.”
“큭……. 미친 새끼. 너 같으면 말하겠냐? 그냥 죽여.”
“어차피 시간문제일 뿐이다.”
닐바스의 입에 걸린 미소를 빤히 쳐다보던 길버트는 란둔에게 손짓했다.
“죽여. 그리고 나가는 대로 곧장 수색에 들어간다. 다른 길드보다 먼저 차지해야 하는 것 알지?”
“물론입니다, 대장.”
란둔은 등 돌린 길버트에게 가벼이 목례해 보이고 닐바스에게 다가가 그의 목에 검을 디밀었다.
“흡!”
란둔의 검이 높이 쳐들리자, 닐바스는 처연한 웃음을 흘리며 하늘을 바라봤다. 손에 타인의 피를 묻힌 순간부터 죽음이 두렵진 않았다. 다만 스벤의 복수와 멸망해 가는 왕국의 재건을 이루지 못한다는 진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쇄액-
“……죄송합니다, 아버지.”
높이 들린 란둔의 검이 하강하기 시작하자 닐바스는 두 눈을 꾹 감고 다가올 어둠을 기다렸다. 그때,
챙-
점차 꺼져가던 불길 속에서 갑자기 검은 인영이 튀어나와 란둔의 검을 쳐냈다.
“누구……컥!”
란둔은 다급히 기습에 저항하고자 했으나 그보다 상대방의 움직임이 빨랐다. 순식간에 검은 대검이 갑옷과 투구 사이를 가르고 지나가자, 타는 소리와 함께 란둔의 머리가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
“허. 설마 살아 있었을 줄이야…….”
막연한 불안감은 확실한 두려움으로 탈바꿈해 전신을 덮쳐왔다. 대검의 주인을 알아본 길버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라이든에서도 이름 높은 이들이 합세해 펼친 총공세였다. 살아남기는커녕 살점 하나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놈은 너무도 멀쩡했다. 검은 코트에는 그을음조차 없었고, 머리카락 한 올 타지 않은 듯했다.
“큭……. 역시 괴물새끼야.”
닐바스는 민성을 올려다보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놈과의 계약은 정말이지 신의 한 수였다. 설령 놈이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라 할지라도 지금만큼은 천사처럼 보였다.
“그런 거였어?”
“음? 왜? 뭐?”
민성이 상냥한 웃음과 함께 대검을 슬며시 쳐올리자, 닐바스는 떨리는 동공으로 그를 불안하게 바라봤다.
“오만한 선인의 돌? 쓸 만한 거 없다더니 다 뻥이었네?”
“그…… 그건 말이야. 사실 우리 왕국에선 귀한 것일수록 늦게 대접하는 관습이 있어! 그래, 내 잘못이 아니고 관습이라고, 관습!”
민성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한 닐바스는 반사적으로 본능을 따라 미친 듯이 입을 놀렸다.
“됐고. 일단 좀 맞자.”
그러나 민성은 싱긋 웃으며 검면으로 닐바스를 북어처럼 두들겨 팼다.
“속일 거면 확실히 속였어야지. 밑장 빼다 걸리면 손모가지 날아가는 거 몰라?”
“끄아아아아아아악! 아냐! 없어! 난 없다고! 넌…… 아악! 속고 있는 거라고! 크아악!”
“진실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할 문제고.”
닐바스는 몸을 버둥거리며 대검을 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검은 여지없이 닐바스의 몸을 따라다녔다. 검면이 적중할 때마다 살이 타는 소리와 함께 닐바스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뭐…… 뭐 하는 거지?”
“글쎄…….”
느닷없이 민성이 같은 편을 개 잡듯 패자, 당황한 연합원들은 저들끼리 수군거리며 무기를 더욱 꽉 쥐었다. 그러나 민성은 아랑곳 않고 닐바스를 신나게 때려잡는 데 몰두했다.
꿈틀-
“후우……. 좀 낫네.”
한동안 바삐 손을 놀리던 민성은 처량하게 몸을 부들거리는 닐바스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크흑……. 빌어먹을……. 빌어먹을…….”
닐바스는 한순간에 몰락한 그의 신세가 억울했는지 끅끅대며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친우의 복수를 하기는커녕 동네북이 되어 이리저리 치이기만 하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민성은 닐바스의 사정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또 속이고 싶으면 속여 봐. 알았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닐바스의 눈가에 고인 눈물이 답을 대신했다. 민성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연합원들은 경계하듯 무기를 앞으로 디밀 뿐, 누구 하나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마른침을 연거푸 삼키던 길버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5성 스킬을 얻고 나서 사라졌던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했다.
“병신도 아니고, 설마 내가 대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민성의 빈정거림에 길버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옛 동화집 혹은 이야기꾼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금은보화를 만들어내는 오르골과 그것을 지키는 드래곤의 이야기. 오만한 선인의 돌을 가진 닐바스를 지키는 민성과 꼭 부합하는 이야기였다. 길버트는 스스로가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금은보화를 챙겨 도망가 행복한 삶을 만끽하는 주인공과 달리 그는 드래곤까지 죽여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