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203화 - 길드전(3)
“나트가 당했어…….”
“마…… 말도 안 돼! 무슨 발검이 저렇게 빨라?”
전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민성은 한숨을 내쉬며 대검을 회수했다.
“것보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 너희들. 대체 왜 살아 있는 거냐?”
조금 전 들렸던 신음소리들은 전부 거짓이었다는 듯 죽었으리라 여겼던 병력들은 너무도 멀쩡한 모습으로 민성 앞에 서 있었다.
‘설마 버그 같은 건가?’
승리 조건인 크리스털을 파괴했음에도 죽지 않았다. 그러니 투기장의 착오로 인해 발생한 버그 말고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어이! 괜찮아?”
헉헉대며 민성의 곁으로 다가온 닐바스는 민성이 찔린 부위를 힐끔 살폈다. 그의 검은 코트에는 혈흔은커녕 작은 생채기조차 없었다.
“역시 미친 괴물새끼…….”
멀쩡한 민성의 모습에 닐바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폭탄마의 세례’를 받고도 머리카락 한 올 타지 않은 놈이다. 역시 본능을 따라 놈에게 엎드린 것은 신의 한 수였다. 괴물이라 생각은 했다만 수많은 이들의 이목을 감쪽같이 속이고 크리스털을 파괴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저놈들. 왜 안 죽은 거냐? 크리스털만 부수면 끝난다며?”
민성은 닐바스를 쏘아보며 대검을 까딱여 보였다. 만약 놈이 같잖은 수작이라도 부린 거라면 놈부터 죽일 생각이었다.
“그……. 아무래도 나락의 끝자락을 사용한 덕에 전멸시키지 않으면 끝나지 않나 봐…….”
닐바스는 민성의 눈치를 살피며 겨우 입을 열었다. 처음에 말하지 못했던, ‘나락의 끝자락’의 효과 덕에 일반적인 크리스털 쟁탈전과는 양상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 확실치 않았기에 말하지 들었지만 눈앞의 괴물이 그 사실을 이해해줄리 없었다.
“……그러니까. 룰이고 나발이고 다 쳐 죽여야 한다?”
민성이 허탈한 웃음을 흘리자, 닐바스는 죽을죄를 지은 죄인처럼 입만 우물거리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치자. 근데. 그런 건 미리 말했어야 할 거 아냐, 이 새끼야!”
“나…… 나도 확실하지 않아서 그랬지! 그래도 이제 명확한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 됐잖아?”
“돼?”
이젠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자 민성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때,
“이유는 몰라도 절호의 기회다! 분명 놈은 크리스털을 파괴하느라 전력을 다했을 터! 놈만 죽이면 비킬 길드도 끝이다! 돌진!”
“겨우 한 놈이야! 죽여버려!”
정비를 끝낸 적들은 새로이 얻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함성을 지르며 민성들을 향해 돌격해오고 있었다. 선두에는 길버트가 묵직한 장창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
사실 길버트 역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크리스털이 파괴되고 전신을 옥죄는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뿐, 고통은 씻은 듯 사라져버렸다. 꼭 새로운 기회를 받은 것처럼.
“아, 진짜 귀찮게들 구네.”
민성은 달려오는 적들을 힐끗 살피곤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을 피하고자 지름길을 택했건만 설마 막힌 길일 줄이야.
“야. 끝날 때까지 다른 놈들이랑 적당히 몸 사리고 있어. 그리고 제대로 된 변명도 생각해두고. 고통 받기 싫으면 말이야.”
민성은 닐바스를 어깨 위로 번쩍 쳐들었다. 전투에 돌입하기 전 거추장스러운 놈을 먼저 치울 생각이었다.
“어어어?”
갑작스러운 민성의 행동에 닐바스는 헛소리를 지르며 버둥거렸다. 그러나 답변은 필요 없다는 듯, 민성은 닐바스를 곧장 푸른 크리스털 쪽으로 힘껏 던졌다.
“끄아아아아아!”
쿵-
작은 점이 크리스털에 처박힌 걸 확인한 민성은 몸을 돌렸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성난 무리들의 병장기가 그의 목숨을 노려오고 있었다.
“죽여라!”
“쇼 타임이다, 새끼들아!”
지옥을 보여줄 시간이다. 민성은 옅은 웃음을 흘리며 거리낌 없이 무기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직 ‘속도를 높여라’가 발동 중이었기에 민성의 신형은 안개가 사라지듯 증발해버렸다.
“젠장할! 또 사라졌어!”
“진짜 투명스킬 갖고 있는 거 아냐?”
민성이 삽시간에 자취를 감추자 할튼 연합은 민성을 찾기 바빴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디로 사라진 거야! 찾아! 무조건…….”
치익-
“크헉!”
갑자기 타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비명소리가 울리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두 동강 난 몸이 바닥에 엎어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지옥의 시작에 불과했다.
치익-
“어? 캑…….”
“끄아아아악!”
도처에서 구슬픈 비명이 울렸다. 가슴이 쩍 벌어져 속을 환히 보이는 이부터, 깔끔하게 두 동강나 몸속의 체액을 게워내는 자까지. 죽음의 종류도 다양했다.
“사…… 살려줘!”
그 모습에 연합원들은 하나둘 패닉 상태에 빠졌다.
“놈을 찾아내! 찾아내라고!”
“겁먹지 마! 승리하면 죽어도 죽지 않는다! 기껏해야 A랭크다! 스킬 유지시간은 길지 않을 거다! 정신 차려!”
삽시간에 수십에 달하는 연합원들이 드러눕자 각 장들은 고함치며 길드원들을 독촉했다.
“빌어먹을. 보여야 찾든 말든 할 거 아……. 컥!”
그러나 장들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눕는 이들이 증가하자, 할튼 연합은 역병을 맞아 멸망해 가는 마을처럼 무너져갔다.
“라이트닝 볼……크어어억!”
“오지 마! 오지 마! 텔레포트 소드! 죽어!”
수만 볼트를 머금은 구체도, 허공을 관통하는 검도 민성의 몸에 닿지 않았다.
“대장. 어쩝니까? 이대로 가다간 놈한테 전멸 당하는 것 아닙니까?”
“투명이 아니야.”
부하의 질문에 민성의 움직임을 눈으로 쫒던 길버트는 낮게 중얼거렸다. 바람. 놈은 바람이다. 형상이 없는 것과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닿지 않는다면 멈춰 세우면 그만이다.
“예?”
“투명이 아니라고. 말도 안 되게 빠른 것뿐이지. 놈은 무적이 아니다! 내가 놈의 모습을 드러나게 하겠다. 저주 준비해! 놈부터 처치한다!”
크리스털을 파괴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안 이상,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둘 중 한쪽의 완전한 멸살. 그러기 위해서 일단 저 피바람부터 멈춰 세워야했다.
“예!”
어수선한 분위기의 타 길드들과 달리 블랙 스미스는 길버트의 명령을 따라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란둔! 2조를 이끌고 닐바스를 포획해 와라. 절대 죽이지도, 다른 놈들한테 뺏기지도 마라.”
“예!”
백색 갑옷들 중 일부가 혼란한 틈새를 뚫고 잽싸게 자리를 벗어나자, 길버트는 묵직한 창을 들어 바닥을 내리찍었다.
“이놈. 잔재주도 여기까지다! 어스 퀘이크!”
쾅-
그러자 창끝에서 퍼져나간 균열은 순식간에 메마른 지면을 뒤덮었다.
“땅이 흔들린다!”
“도…… 도망쳐!”
길버트의 스킬은 아비규환인 현장을 더욱 혼란하게 만들었다. 지면은 거세게 출렁이는 파도처럼 좌우로 요동쳤고, 균열 사이로 거대한 바위들이 튀어 올랐다. 연합원 중 일부는 갈라져 아가리를 벌린 틈새 사이로 끌려 들어가기도 했다.
“길버트! 이게 무슨 짓이야!”
“이 미친 새끼야! 고작 한 놈한테 대형 스킬을 쓰면 어쩌자는 거야!”
타 길드장들의 항의가 빗발쳤으나 길버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어디냐……. 어디냐…….”
길버트의 시선은 단 한 존재만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와나! 이건 또 뭐야!’
민성은 거칠게 요동치는 대지 위에서 힘겹게 몸을 가누었다. 스킬은 진작 캔슬했다. 이리 반동이 심한 곳에서 속도를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놈!”
쇄액-
“큭…….”
갑작스레 날카로운 창날이 목젖을 노리고 날아오자 민성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창날은 순식간에 민성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민성은 대검으로 창을 옆으로 쳐내곤 거리를 벌렸다. 떨리는 땅 위에 겨우 안착한 민성은 눈가를 긁적이며 창 주인을 힐끗 살폈다.
“그 무위와 용맹함은 칭찬해줄 만하나 잔재주는 여기까지다!”
찬란한 백색 갑옷과 묵직한 장창을 꼬나 쥔 이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음?”
목 언저리에서 따끔한 느낌이 들자, 민성은 따끔한 부위를 살짝 문지르곤 손바닥을 살폈다. 새빨간 액체가 손금 사이로 퍼져나가 있었다.
‘얼레? 이것 봐라?’
+5강 코트로 단단한 성벽을 구축했건만 성벽에 흠집을 냈다? 민성은 피식 웃으며 체력 포션을 꺼내 상처 부위에 펴 발랐다. 희한하게도 긴장보다 묘한 희열감이 몸속에서 끓어올랐다. 그러나 그와 대비되게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그와 달리, 놈은 평온한 잔디밭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인사가 너무 거친 것 아냐?”
“작별인사가 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다리에 힘을 꽉 준 민성이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 지었으나, 길버트는 작게 읊조리며 창대를 더욱 꼿꼿이 세웠다.
“길버트. 네놈을 죽일 전사의 이름이다! 이름을 대라! 내가 너를 기억하겠다.”
“기억? 뭘 기억해? 어차피 죽을 텐데. 아! 지옥에서 기억하겠다고?”
“이놈! 전사의 명예라는 것을 모르는 놈이었구나! 시작해라!”
민성이 한껏 빈정대자 격노한 길버트는 그의 수하들에게 크게 손짓했다. 그와 동시에,
“속박하는 사슬!”
“할라크의 가지!”
띠링-
[속박하는 사슬에 적중 당했습니다. 10분간 이동속도가 2% 감소합니다.]
[할라크의 가지에 적중 당했습니다. 8분간 민첩이 3 감소합니다.]
수십여 개에 달하는 저주가 민성에게 쏟아져 내렸다.
[불굴의 의지가 발동합니다. 속박하는 사슬의 저항에 성공하셨습니다.]
[불굴의 의지가 발동합니다. 할라크의 가지의 저항에 성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항하듯 수많은 메시지가 저주에 맞불을 놨다. 민성은 연달아 나타나는 메시지를 보며 피식 웃었다.
‘후……. 꽤 난감할 뻔했어.’
‘불굴의 의지’ 덕에 상당수의 저주를 튕겨냈다. 허나 만약 그대로 허용했더라면 신체능력의 절반 이상이 저주로 깎여나갔을 것이다.
‘방어도 방어지만 저주방어도 더 보강해야겠어.’
50% 확률로 상태이상을 벗겨내는 불굴의 의지도 충분히 사기였지만, 민성의 욕망을 꺾을 순 없었다.
“어이고. 전사라는 새끼가 다구리를 놓네. 너희 차원도 참 독특한가 보다. 다구리 놓는 새끼를 전사라 불러주고 말이야?”
“뭐라고 욕해도 좋다. 네놈같이 평화와 명예를 욕보이는 놈에게 전사의 명예는 사치일 뿐이다.”
“명예? 개소리하네. 딱 보니까 미리 준비해뒀구먼, 얼어 죽을 명예 같은 소리 하기는.”
민성은 한껏 빈정거리며 움찔거리는 길버트를 살폈다. 필시 모욕감으로 인한 떨림일 게 뻔했다. 투구 속에 놈의 얼굴이 가려진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놈! 그 간사한 입부터 뜯어 고쳐주마!”
길버트가 격노 섞인 고함을 지르며 창을 내질렀다.
“크윽…….”
민성은 힘겹게 몸을 틀며 창날을 피해냈다. 그러나 아까와 달리 민성의 움직임은 확연히 둔탁해진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