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202화 - 길드전(2)
[전투까지 남은 시간, 10초.]
“야, 뭐라도 좀 해봐. 미친 길드장이 바닥 기어 다니면서 애원했으면 뭐라도 있을 거 아냐! 이 초심자 새끼야!”
전투시간이 지척까지 다가온 탓인지, 펑퍼짐한 망토는 평정심을 잃고 민성의 멱살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이해는 하겠는데…….”
민성은 피식 웃으며 코트 자락을 쥔 망토의 손을 가볍게 쳐냈다.
치익-
“크윽…….”
손에서 타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일시에 체력과 마력이 뭉텅 빠져나가자, 펑퍼짐한 망토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으며 손을 놨다.
“차기 길드장한테 함부로 손대면 안 되지.”
“이 초심자 새끼가…….”
펑퍼짐한 망토는 초심자에게 밀렸다는 사실에 분노에 휘감겨 방패를 높이 쳐들었다. 그와 동시에, 민성은 기괴하다 여길 정도로 입꼬리를 올렸다.
사아악-
전신을 오싹하게 만드는 끈적한 살기가 몸을 휘감았다. 망토는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전신을 가렸다.
“이 새끼…….”
그 이상 했다간 너부터 죽인다. 그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전투까지 남은 시간…….]
……2
……1
“반응은 좋네.”
어느덧 전투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방패를 바라보던 민성은 싱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길드전을 시작합니다.]
“속도를 높여라.”
그리고 전투가 시작됨과 동시에 민성은 그들 앞에서 자취를 감췄다.
“닐……. 진짜 봐준 게 아니었구나.”
워낙 해괴한 짓거리를 많이 했기에 A랭크인 그가 패배했다 했을 때도 스벤의 은퇴를 덮고자 던진 우스갯소리인 줄로만 알았다. 심지어 닐바스가 엎드려 애원할 때도 그의 최후의 유희 정도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구태여 말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 모든 것이 진실이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말했잖아. 아니라고. 아무리 내가 신용이 없어도 그렇지…….”
“도대체 저놈 정체가 뭐야?”
펑퍼짐한 망토는 민성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몰라.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놈이 미쳐도 제대로 미친 놈이란 거지.”
닐바스 역시 조용히 읊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 상대 진영을 응시했다.
탁-
지면에 발끝이 닿음과 동시에 다른 발이 추진력을 얻어 힘차게 앞으로 뻗는다. 민성은 그의 앞에 펼쳐진, 모든 게 멈춘 것 같은 세계를 빠르게 질주해 나갔다. 메마른 땅의 돌부리와 거친 표면도 민성의 움직임을 막진 못했다.
“돌진!”
“다른 길드보다 먼저 닐바스를 확보해야 한다!”
‘거지 떼처럼 몰려왔네. 멀리서 볼 땐 몰랐는데.’
순식간에 적과 당도한 민성은 피식 웃으며 더욱 속력을 올렸다. 그사이 민성의 손목에 달린 시계의 초침이 두어 번 움직였다.
휙-
민성은 바람이 이마를 간질이고 사라지듯 그들의 곁을 스쳐갔다.
“방금 뭔가 지나가지 않았냐?”
블랙 스미스의 선두에 서 있던 백색 갑옷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고 불현듯 손을 들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갑작스레 길버트가 약진을 멈추자 부하들 역시 그의 지시에 따라 걸음을 멈췄다.
“아니……. 뭔가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길버트는 급히 몸을 돌려 크리스털을 살폈다. 그 외에도 감 좋은 일부만이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고 불현듯 몸을 돌렸다. 그러나 크리스털은 멀쩡했고 그들의 불안감은 기우에 그치는 듯했다.
“후……. 노파심이었나.”
“대장은 너무 걱정이 많으셔서 탈입니다. 고작 8뿐입니다.”
“그렇지? 요즘 우리 차원이 좀 밀려서 그런가, 쓸데없는 걱정만 늘어나는군그래.”
길버트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괜스레 손을 휘저었다.
“답답할 노릇이죠. 길버트 님만 차출하면 승리는 확실할 텐데 관리인이란 것들이 그리 융통성이 없으니 말입니다.”
“관리인 잘못은 아니지. 결국 그들을 통솔하는 건 지배자니까.”
“예?”
길버트가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제대로 듣지 못했던 수하는 다시 되물었다.
“아니야. 것보다 전투가 시작되면 닐바스의 신변을 가장 먼저 확보해라. 그건 반드시 우리 마이스터가 손에 넣어야만 한다.”
“예”
길버트는 가장 근접해 있던 수하에게 나지막이 명령하곤 전방을 응시하며 힘차게 소리쳤다.
“자, 잡담은 여기까지! 오늘은 라이든을 좀먹는 비킬 놈들을 완전히 뿌리 뽑는 날이다! 가장 먼저 크리스털을 파괴하는 건 우리 블랙 스미스가 돼야만 한다! 방해하는 놈들은 동맹이어도 가차 없이 죽여버려!”
“예!”
“전원! 돌…….”
한껏 수하들의 사기를 끌어올린 길버트가 호기롭게 외치며 질주하려는 찰나,
쾅-
그들 뒤에서 격렬한 폭발음 소리가 울렸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아군 측의 크리스털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레드 크리스털의 남은 체력: 1%]
동시에 비킬 길드를 배척하는 모든 길드에 경고 메시지가 날아갔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왜 갑자기 크리스털이 파괴된 건데!”
“저희도 잘…….”
굉음과 메시지를 접한 길버트는 버럭 소리 지르며 다급히 몸을 돌렸다.
“저…… 저건!”
새빨간 크리스털의 중심에는 거무스름한 막대기 같은 것이 박혀 있었고, 막대기를 시발점으로 크리스털에는 깨지기 직전의 달걀처럼 거대한 균열이 생겨나 있었다.
“저 새끼! 저 새끼다!”
길버트는 대장의 위신도 잊고 막대기 끝에 대롱 매달려 있는 민성을 가리키며 게거품을 물었다. 비단 놀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 말도 안 돼…….”
민성을 발견한 이들은 마찬가지로 입을 뻐끔거리며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수많은 전투를 거치고 살아남은 강자들이 모인 곳이다. 헌데 그런 이들의 이목을 감쪽같이 속이고 후방을 점했다? 도무지 납득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시선 따위 아랑곳 않고 크리스털에 박힌 대검을 뽑아내기 바빴다.
“후……. 생각보다 단단하네.”
민성은 낮게 중얼거리며 대검을 뽑아냈다. 단숨에 파괴할 생각으로 전력을 다해 찍었으나 크리스털은 생각 이상으로 단단했다. 하지만 민성은 몰랐다. 본디 크리스털을 부수기 위해선 A급 랭크의 전사들이 뭉쳐 한참 두들겨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경치 좋네.”
암벽 등반하듯 삽시간에 크리스털을 타고 올라 정상에 도달한 민성은 눈앞에 펼쳐진 경치를 느긋하게 감상했다. 그를 발견한 무리들이 화급히 회군하는 모습은 꽤 볼만했다. 공중에선 성난 그리폰들이, 지상에선 수많은 군세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몰려왔다. 그 모습이 꼭 말총에 불붙은 말 같았다.
“자, 그럼 마무리 지어볼까.”
민성은 겨우 숨만 붙어 있는 크리스털 위로 대검을 높이 쳐들었다.
“기다려! 젠장! 기다리라고!”
“잠시만 기다려! 그래! 협상! 협상하자! 원하는 걸 얘기해! 우리 마이스터 길드는 뭐든 들어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일단 멈춰봐!”
적군들 속에서 애원조에 가까운 비명소리가 울려 민성의 귀에 닿았다.
“호오…… 그래? 원하는 거? 원하는 거라…….”
민성이 고심하듯 슬쩍 대검을 내리자, 무리들은 더욱 목소리를 높여 민성을 다독였다. 크리스털이 부서지면 모든 게 끝이다. 일단 민성의 비위를 최대한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냐! 네가 원한다면 블랙 스미스의 대장 자리도 양보하마! 아니면 길드장님께 네 업적을 말씀드리마! 분명 높은 등급의 아이템이나 스킬을 하사하실 거다! 너 정도면 4성은 거뜬히 받을 수 있을 거야!”
“우…… 우리도! 그리폰을 제공하마! 그러니 일단 검을 멈추고 대화로 타협하자! 그러니까 일단 거기서 내려와!”
민성이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를 유혹하는 달콤한 말들이 전장을 더욱 진동했다.
“근데 어쩌냐? 나는 최소 쓸 만한 5성급 아니면 안 받는데. 그리고 어떤 멍청한 새끼가 멸망전 신청한 덕에 죽으면 끝나는데, 아이템이 무슨 소용이야?”
“그…… 그런!”
“공갈질을 할 거면 좀 더 그럴듯한 공물을 내밀었어야지. 그치?”
민성은 크리스털 지척까지 다가온 이들을 내려다보며 악마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재차 대검을 쳐들었다.
“안 돼!”
“돼!”
그리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무시한 채, 금 간 크리스털을 내리찍었다.
빠직-
[아군 측의 크리스털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레드 크리스털의 남은 체력: 0%]
[크리스털이 파괴됩니다.]
“안 돼애애애애!”
균열 사이에서 찬란한 광채가 새어나오기 시작하자, 길버트는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괴성을 질러댔다.
“어이쿠.”
광채에서 불길함을 직감한 민성은 서둘러 크리스털에서 뛰어내렸다. 민성이 바닥에 착지함과 동시에 내부에서 시작된 폭발은 크리스털 표층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펑-
거대한 굉음이 메마른 대지를 울렸고, 폭발의 여파로 날카로운 바람이 민성의 볼을 훑고 지나갔다.
“워……. 멋진데?”
민성은 고개를 쳐들고 허공에 펼쳐진, 찰나의 시간이 제공하는 그림을 감상했다. 붉은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나풀나풀 떨어지는 모습은 꼭 석양에 붉게 물든 눈송이 같았다.
“으어어어억…….”
고통에 겨워하는 신음소리들이 민성의 등을 애절하게 두들겼다. 날 보라고. 우리를 파멸로 몰아넣었으니 그 최후를 눈에 담아달라는 패배자들의 애원처럼 들렸다. 그러나 민성은 허공을 수놓은 붉은 폭죽을 감상할 뿐, 돌아보지 않았다.
“후…….”
‘이제 어쩐다.’
민성은 눈가를 긁적이며 앞으로의 일을 계획했다. 의도가 무엇이었든 그는 수많은 상위 길드 전력을 박살내버렸다. 이제 라이든 진영에는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닐바스의 동료 혹은 동맹 길드의 일원이란 소문이 퍼질 게 뻔했다. 결국 평범한 투기장 생활과는 이별이란 소리였다.
‘젠장. 나도 초심자들 털어먹기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니야!”
“얼씨구.”
민성은 메마른 대지 저 너머에서 달려오는 닐바스를 보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의 모습이 꼭 퇴근한 주인을 마중 나온 애완견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음?”
무엇이 그리도 다급했는지 닐바스는 손을 휘저으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피해! 끝난 게 아니라고, 이 멍청한 새끼야!”
“뭐라는 거야?”
허나 거리가 있는 탓에 닐바스의 말은 민성의 귀에 닿지 않았다. 민성이 눈가를 찌푸리고 움직이려는 찰나,
챙-
옆구리를 간질이는 느낌에 민성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백색의 갑옷을 두른 이의 장검이 코트와 맞닿아 있었다.
“어…… 어째서…….”
상대방의 투구 속에서 당황한 음성이 새어나오자, 민성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지가 찔러놓고 지가 놀라는 놈은 또 처음이네. 어째서긴 뭘 어째서야. 이 코트가 네 몸값보다 비싸니까 그렇지.”
“그럴 리가…….”
그리곤 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검을 가볍고 빠르게 횡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투구와 갑주 사이로 옅은 실금이 생기고 그 사이로 붉은 액체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어어? 어…….”
갑옷은 당황하여 이음새 부분을 매만지더니 말을 잇지 못하고 천천히 쓰러져 내렸다.
“뭘 그리 놀라. 죽일 생각을 했으면 죽을 생각도 했어야지.”
민성은 중얼거리며 몸과 분리돼 바닥을 구르는 투구를 차갑게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