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
201화 - 길드전(1)
46. 길드전
‘장난하나! 아니, 이게 뭔 소리야! 무분별한 탈퇴와 가입 방지를 위해 72시간 동안 탈퇴 불가? 아니, 것보다 이런 사항은 가입할 때 미리 알려줘야 하는 거 아냐?’
민성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빠르게 추스르곤 몇 차례 더 버튼을 눌렀다.
띠링-
[길드 탈퇴에 실패하셨습니다.]
[길드 탈퇴에 실패하셨습니다.]
메시지는 민성의 희망을 확인사살 하듯 변함없는 내용을 비췄다.
“와나……. 도대체 이딴 건 어떤 새끼 머릿속에서 나온 거야. 설마 에드워드 그 자식 머릿속에서 나온 룰인가?”
민성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곤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같잖은 변수 때문에 결국 그의 의도와는 별개로 길드전을 치러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버렸다.
“도와줘…….”
민성은 어느새 기어와 그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닐바스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비굴해 보일 정도로 처량한 모습이었지만 민성의 눈빛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이놈은 이 사실을 모르는 건가?’
탈퇴 버튼 한 번 누르기만 하면 쉽사리 알 수 있는 정보건만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허나 저들의 반응은 정말 모르기에 나올 수밖에 없는 반응이었다.
‘하긴 모르니까 이렇게 달라붙어 있는 거겠지. 후…….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남은 방법은 하나뿐인가…….’
닐바스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던 민성은 천천히 입을 열며 아이템 창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도와줄게.”
“정말로? 정말?”
갑작스레 수락이 떨어지자, 닐바스는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되물으며 민성의 딱딱한 얼굴을 응시했다.
“그래. 조건만 수락하면 말이야.”
“뭐…… 뭔데!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뭐든 들어줄게!”
“개인 창고. 그거 길드장만 사용할 수 있다 했지? 길드장 자리 넘겨라.”
민성의 요구에 닐바스는 잠시간 얼빠진 표정을 짓더니 다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패배하면 길드가 보유한 이점은 모두 상대에게 넘어가고 사라질 길드다. 그에게는 반갑다 못해 이득인 제안이었다.
“그래! 들어줄게! 길드장 자리쯤이야 얼마든…….”
“창고 안의 물건들은 고대로 놔둔 채로 말이야.”
민성이 추가 요건을 제시하자 닐바스의 안색은 조금 어두워졌다. 그러나 곧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 정도야…….”
“그리고 네가 갖고 있는 명예석도 전부 내놓고. 아, 다 털리면 토벌전인지 뭔지로 간다 했었지? 1개는 남겨줄게.”
민성은 입을 쩍 벌린 닐바스를 보며 싱긋 웃었다.
“어차피 죽으면 타 길드로 넘어갈 텐데. 싫으면 말고. 그래도 스벤한테 조금은 미안해서 도와주려 했더니 어쩔 수 없네. 잘 죽어.”
“알았어! 알았다고! 다 줄게! 다 주면 될 거 아냐!”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말이 짧다? 그리고 누가 보면 내가 원해서 달라 하는 것 같잖아.”
민성이 갑의 권위를 보이며 주저 없이 등 돌리려 하자, 닐바스는 화급히 민성의 다리를 붙잡고 소리 질렀다.
“……제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꼭 드리고 싶습니다!”
옆에서 그들의 행각을 지켜보던 망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들을 외면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자, 그럼 여기다 사인해.”
민성은 미리 꺼내놨던 종이를 부적 붙이듯 닐바스의 이마에 탁 붙였다. 업보의 계약서. ‘모두의 강화석’을 얻는 와중에 들어온 아이템이었다.
“이건…….”
종이를 받아든 닐바스는 빠르게 내용을 살폈다. 안에는 민성이 제시한 조건들이 주르륵 나열돼 있었다. 철저할 정도로 준비된 민성의 모습에 닐바스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길드전까지 남은 시간, 10초.]
“빨리 사인하는 게 좋을걸. 5초가 될 때까지 안 하면 이 제안도 끝이니까.”
“…….”
계약서와 민성을 번갈아 바라보던 닐바스는 굳은 결심한 듯 눈을 부릅뜨곤 날카로운 어금니로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그리곤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는 체액으로 서명란에 사인했다. 부디 그의 본능이 올바른 판단을 했으리라 믿으며.
“현명한 선택이야.”
민성은 계약서를 낚아채며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그 역시 엄지손가락을 물어뜯어, 나오는 피로 계약서에 사인했다.
[길드전을 시작합니다. 전장이 랜덤으로 지정됩니다.]
[전장 ‘머나먼 지평선’으로 이동합니다.]
계약이 완료되기 무섭게 민성 일행과 할튼 길드의 길드원들의 몸은 빛에 휘감겨 중앙대로에서 사라져버렸다.
*
“흠…….”
민성은 작게 중얼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푸른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광활하고 메마른 대지. 몸을 숨길 만한 바위나 나무 따위도 보이지 않는다. 뒤로는 푸른 광채를 뿜어대는 거대한 크리스털이 사슬에 감겨 둥실거리고 있었다.
[머나먼 지평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1분 뒤, 전투가 시작됩니다.]
‘머나먼 지평선?’
전투 알림 메시지와 함께 의미 모를 단어가 나오자 민성은 눈가를 긁적였다.
“아티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무리 상대가 마이스터들이라도 그렇지. 남아 있는 놈들이 왜 겨우 이것밖에 없어? 스벤은 또 어디 간 거고!”
슬쩍 고개를 돌리자 망토 중 하나가 불만스럽게 소리치며 펑퍼짐한 망토와 언쟁을 벌이는 모습이 들어왔다.
“어디 가긴? 메시지 받았을 거 아냐. 한센 너 설마…… 또 안 본 건 아니지?”
“메시지고 자시고 마이스터라고! 3대 길드 중 하나랑 붙는 기회를 놓칠 수 있겠어?”
한센은 손에 들린 거대한 낫을 좌우로 붕붕 휘두르며 호기롭게 소리쳤다.
“하……. 등신 새끼야! 내가 메시지 잘 확인하라 했지! 네가 그러니까 등신 소리 듣는 거야, 이 등신아. 다른 놈들이 다 너처럼 전투광인 줄 알아? 후……. 길드장이나 주축 길드원이 전부 이 모양이니 이 꼴이 나지.”
“뭐, 이년아! 너부터 죽여줘? 어?”
“해보시든가.”
펑퍼짐한 망토는 기이한 그림으로 도배된 철 방패를 꺼내들며 으르렁거렸다.
“난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닐이 내 말만 들어 처먹었어도 이렇게 안 됐다고! 내 코인이랑 명예석 어쩔 건데!”
“그럼. 어차피 뒈질 거 나한테 다 넘기든가. 내가 마지막까지 알차게 사용해줄게.”
“닥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 알았어?”
‘분위기는 좋네.’
당장 칼부림이라도 날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민성은 입꼬리를 올렸다. 예정된 패배에 짓눌려 주눅 드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크리스털 쟁탈전인가…….”
바짝 엎드리고 있던 몸을 일으킨 닐바스는 크리스털을 보곤 이맛살을 구겼다. 하고 많은 지형들 중 하필 크리스털 쟁탈전이라니. 아무래도 행운의 화살은 그들을 빗겨나간 모양이었다.
“뭐?”
망토들의 분쟁을 지켜보던 민성은 닐바스의 중얼거림을 듣곤 고개를 돌렸다.
“크…… 크리스털 쟁탈전이라고.”
“그러니까 그게 뭔데? 빨리 설명해봐. 정보가 있어야 대책을 세우지.”
민성은 닐바스를 독촉하며 이고 있던 대검을 천천히 빼냈다. 그들의 맞은편, 대지 저 멀리 보이는 붉은 수정 밑. 그 밑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작은 점들이 보였다. 여태껏 경험으로 보아, 아마 그들의 적이 포진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머나만 지평선. 이곳의 이름이야.”
“그건 알고 있고. 방식은? 그냥 다 죽이면 되는 거야? 아무 이유 없이 이딴 게 여기 있진 않을 거 아냐?”
민성이 크리스털을 가리키며 정보를 촉구하자 닐바스는 서둘러 대화를 이어갔다.
“크리스털 쟁탈전. ‘머나먼 지평선’의 또 다른 이름이야. 보통 다들 그렇게 부르지. 방식은 간단해. 먼저 상대 길드의 크리스털을 파괴하는 쪽이 승리. 대다수의 길드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형이기도 해.”
“왜?”
“변수가 적은 곳이라 순수하게 길드들의 힘만으로 승부를 가리기 가장 좋은 지형이거든. 우리에게는 악재지만…….”
닐바스는 이미 패배가 기정된 것처럼 무거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막연한 기대가 담긴 눈으로 민성을 응시했다.
“그래?
민성은 까끌한 대검자루 감촉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여러 길드들이 적측에 붙은 만큼 쉽지 않으리라곤 예상했다. 유일하게 걱정했던 것이 숫자의 열세로 소모되는 체력이었다.
‘그러니까 크리스털만 부수면 되는 거 아냐?’
하지만 크리스털이라는 변수가 존재하는 이상 이번 전투는 손쉽게 이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힘 좋지. 확실하잖아? 전투에만 충실할 수 있어서 좋네.”
민성은 살기를 머금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갖가지 함정과 변수들이 존재하는 차원전쟁이나 버섯에 비하면 아이 장난 같은 전장이었다.
“……잘 선택한 거 맞겠지…….”
민성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에 닐바스는 카드를 섞던 손을 멈췄다. 그리곤 민성에게 도움을 구하라 소리쳐댔던 가슴팍에 손을 갖다 댔다.
“그 외에 유의할 점은?”
“……없어.”
닐바스가 잠깐 입을 우물거리곤 고개를 젓자, 민성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닐바스를 쏘아봤다.
“정말로! 진짜!”
“뭐, 상관없겠지.”
닐바스가 믿어달라는 듯 고개를 흔들어대자 민성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뒀다. 놈의 행동이 탐탁지는 않았으나 한 배를 탄 이상, 구태여 그를 속일 리는 없을 것이었다.
[전투까지 남은 시간, 30초.]
“그나저나 저것들이 우리 상대인가 보네?”
“뭐?”
닐바스가 되묻자, 민성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전방을 가리켰다. 멀리서 꾸물거리던 점은 어느새 그 모습이 뚜렷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이런 미친 새끼들이…… 블랙 스미스를 보냈어?”
전방을 바라본 닐바스는 독기가 한풀 꺾여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척-
할튼 길드 뒤로 중무장한 정예 부대가 정렬했다. 각기 들고 있는 무기는 달랐고 숫자도 그리 많지 않아 보였으나, 새하얀 백색의 갑옷에선 예사롭지 않은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블랙 스미스?”
“……마이스터 길드에서도 최정예들로만 구성된 전투 집단이야. 빌어먹을 새끼들……. 블랙 스미스가 올 줄은 몰랐는데.”
A급 랭크로만 구성된 블랙 스미스. 하나하나의 무력도 대단했지만, 진정 놈들의 무서운 점은 그들이 입고 있는 방어구에 있었다. 아무리 공격을 가하고 스킬을 퍼부어대도 흠집조차 나지 않는 백색의 무구들. 마이스터 길드가 보유한, 상급 제조 스킬을 지닌 장인들이 일구어낸 업적이기도 했다. 진영전에서 컴퍼니의 5대 대형 길드조차 기피하는 놈들이었다.
“거기다 윈드 스톰에 가브리엘까지……. 이 새끼들 진영전이랑 착각한 거 아냐?”
뿐만 아니라 페가수스에서 보낸 그리폰 라이더들이나, 할케니아가 자랑하는 가브리엘 등 라이든에서 알아주는 집단들이 블랙 스미스와 함께하고 있었다.
“다들 미친 거 아냐? 최정예들만 보냈잖아! 전쟁이라도 치르려는 거야? 어이고, 내 팔자야……. 내 말은 쥐뿔도 안 처들으시는 길드장님 덕에 죽게 생겼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탈퇴할 걸, 그놈의 코인이 뭐라고.”
어느새 민성의 옆으로 다가온 펑퍼짐한 망토는 꽥 소리치며 닐바스를 죽일 듯 쏘아봤다. 닐바스가 고개를 푹 숙이자 펑퍼짐한 망토는 표적을 민성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