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200화 - 비킬 길드(3)
“내가 뭐랬어, 이 답답한 새끼야! 참으라고 했잖아! 말귀 좀 알아 처먹으면 안 돼? 어?”
“…….”
펑퍼짐한 망토는 닐바스의 멱살을 잡아들어 올리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러나 닐바스는 멍한 얼굴로 하늘을 쳐다볼 뿐, 묵묵부답이었다. 사실 닐바스는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마이스터가 참전한다는 메시지가 뜨기 무섭게, 그의 앞에 길드원들의 길드 탈퇴 안내 메시지가 줄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메시지 안에는 투기장에 없는 놈들의 이름부터 이 자리에 있는 놈들의 것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미안, 닐. 난 탈퇴하겠어. 다른 놈들은 몰라도 마이스터 길드에는 이길 수 없어. 고마웠다.”
실제로 망토들 중 하나가 멱살 잡힌 닐바스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뜬 것을 기점으로,
“나……. 나도! 애초에 명예석만 전부 모으면 나갈 생각이었기도 하고. 마, 맞아! 길드전을 할 거면 최소한 길드원와 상의는 했어야지! 나도 탈퇴한다!”
“전투는 좋지만 승산이 없는 전투에서 개죽음 당할 수는 없어. 미안하다, 닐.”
망토들은 우후죽순 자리를 뜨기 시작해, 남은 숫자는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탈퇴한 이들은 몰랐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이스터 길드의 검은 손길을. 탈퇴해 자리를 벗어나던 길드원들은 갑작스레 날아온 빛들에 가격당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큭……. 망할 새끼들…….”
닐바스는 허탈하고 처량한 웃음을 흘렸다. 예상은 했다지만 이렇게 뒤도 안 보고 떠나갈 줄은 몰랐다. 아니, 모래로 성을 지었을 때부터 언젠가는 커다란 파도에 무너지리라 생각했다. 단지 그 시점이 그의 예상보다 빨랐을 뿐.
[길드전까지 남은 시간, 120초.]
엇갈리는 희비 속에서 시간은 야속하게도 멈출 줄을 몰랐다.
“하아……. 거지같네.”
길드원들의 이탈을 바라보던 펑퍼짐한 망토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잡고 있던 닐바스의 멱살을 놓았다.
“소원대로 돼서 좋겠네.”
“……미안.”
“미안이고 나발이고 길드장이면 어떻게든 수습하려 노력이라도 해봐야 할 거 아냐!”
닐바스의 맥없는 목소리에 발끈한 망토는 재차 그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너도 빨리 탈퇴해.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지랄하지 마, 새끼야! 너 혼자 키운 길드 아냐. 내 지분도 있어. 내가 길드 하우스 지으려고 개고생한 걸 생각하면! 후……. 됐다. 몇이나 남았어?”
망토의 물음에 닐바스는 마디마다 얇은 막이 달린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여덟? 여덟이라고?”
“그래서 말했잖아. 탈퇴하라고. 남아 봐야 개죽음이야.”
펑퍼짐한 망토가 실없이 웃기 시작하자, 닐바스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정신 나간 놈들이 여덟이나 남았어? 닐도 아주 헛지랄 하진 않았네? 그래도 남아준 놈들이 여덟이나 되고 말이야. 스벤도 있었으면 아홉인가?”
망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곤 다시 닐바스를 바라봤다.
“근데 일곱은 대충 짐작이 가는데 한 놈은 누구야?”
닐바스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눈가를 찌푸리고 있는 민성을 가리켰다. 골목에 몰린 그들과 달리 태평해 보이는 모습은 구경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아, 맞다. 저놈도 가입했다 했었지? 그럼 일곱이네.”
힐끗 민성을 바라본 망토는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곧 탈퇴할 놈, 숫자에 넣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러나 민성을 바라보는 닐바스의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길드전까지 남은 시간, 90초.]
“어쩔 거야? 이제 시간도 없는데. 계속 도망 다니든가 아니면 사이좋게 죽는 것 말곤 방법 없을 것 같은데. 그냥 죽을 생각은 없을 거 아냐?”
“……당연하지.”
닐바스는 홀린 듯 민성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쯧쯧……. 확실히 끝장을 안 내니까 이 꼴을 당하지.’
메시지를 확인한 민성은 눈가를 찌푸렸다. 닐바스에게 아이템만 받고 탈퇴하려 했건만 꽤나 귀찮은 일에 휘말린 듯했다. 아니, 귀찮음을 넘어 언뜻 위험한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이건 탈퇴하는 편이 좋겠네. 득보다 실이 크겠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메시지를 보아 길드에서 탈퇴하면 이것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길드를 탈퇴할 경우 닐바스에게서 아이템을 받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괜한 일에 휘말리는 것보단 포기하는 편이 나았다.
‘가만있자……. 탈퇴는 어떻게 하지? 길드창에 들어가서 하면 되나?’
닐바스의 길드에 가입하고 새로이 생성된 길드창. 분명 그 하단에 조그만 탈퇴란이 있던 걸로 기억한다.
“길드창 오픈.”
민성이 작게 중얼거리자, 그의 앞에 작은 창이 나타났다. 안에는 비킬 길드의 최초 생성 시간과 길드원들의 이름과 랭크가 적혀 있는 목록이 나열돼 있었다.
‘엄청 줄었네. 의리라곤 쥐뿔도 없는 놈들의 모임이었구만.’
전부 탈퇴했는지 괴이한 이름들로 빽빽하던 길드원 목록에 남은 길드원들의 이름은 단 여덟뿐이었다. 그리고 그 숫자는 곧 일곱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래도 아주 인망 없는 새끼는 아니었네.”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가오는 파멸을 앞에 두고도 도망치지 않은 놈들이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닐바스가 조금은 달리 보였다. 하는 짓은 쓰레기 같았을지 몰라도 엄연히 투기장의 규칙을 정당하게 이용했을 뿐이다.
“이제는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민성이 피식 웃으며 탈퇴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도와줘라. 제발……. 이렇게 부탁한다.”
바닥에서 간절하고 절박한 음성이 들려오자, 민성은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을 멈칫하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닐바스가 머리 위로 불룩 튀어나온 뿔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바짝 조아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존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놈인가?’
민성은 헛웃음 흘리며 닐바스를 내려다봤다. 그토록 괴롭힘 당한 상대에게 주저 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도움을 촉구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 부분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목적을 위해서 자존심을 내려놓는 일. 쉽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와줄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마음에 든 것과 도와주는 것은 별개였다.
[길드전까지 남은 시간, 70초.]
“세상에……. 무한의 도박사가 고개를 조아리다니…….”
“완전히 정신이 나간 모양인데? 저런 새끼들은 당해도 싸지. 빌어먹을 새끼. 속이 다 시원하네.”
수많은 눈과 귀들이 그들을 주시했다. 사방에서 경멸의 눈초리, 모멸찬 언사가 쏟아져 나왔으나 닐바스는 더욱 몸을 바닥에 밀착시켰다.
“닐! 뭐 하는 거야!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최소한의 준비는 하고 싸워야 할 것 아냐! 이럴 시간 없어!”
“기다려, 아티아!”
옆에 있던 펑퍼짐한 망토가 당황하여 닐바스를 일으키려 했으나, 닐바스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진짜 뭐 하자는 건데?”
“……나도 잘 몰라.”
사실 닐바스도 스스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알고 있다. 눈앞의 존재는 분명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하긴 했다. A랭크를 받은 그가 온 힘을 다해도 이길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놈 역시 수적 열세를 뒤엎을 정도의 힘을 갖고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그의 본능은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잘하고 있다고. 그렇게 바짝 엎드려 자비를 구하라고 말이다.
“일어나 새끼야! 초심자 새끼한테 빌기라도 하면 상황이 바뀌어? 바뀌냐고! 너나 스벤이나 제멋대로 굴어서 이 꼴 냈으면, 최소한 길드장의 마지막 위엄 정도는 보이고 뒤져야 할 것 아냐!”
아티아의 날카로운 음성이 전신을 찔러왔다. 그녀의 말이 맞다. 스벤이 민성과 거래하지 않았다면, 그가 오해해 민성과 전투하느라 시간을 소모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후회해 봐야 소용없었다.
“……놈은 나보다 강해.”
“그래! 너보다 강한 놈이라 쳐! 그래 봐야 뭐가 달라지는데!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모두 밀리는데 한 놈 더 있어 봐야 뭐가 달라지냐고!”
아티아는 답답하다는 듯 소리 지르며 닐바스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던 민성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말이 맞아. 한 놈 더 있어 봐야 달라지는 건 없어.”
“그럼 괜히 닐 신경 건드리지 말고 빨리 꺼져!”
망토 속에서 높은 고음의 함성이 터져 나오자, 민성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알아서 잘 마무리들 해. 비킬 길드의 선전을! 기원합니다!”
민성은 주먹을 불끈 쥐어흔들어 보인 뒤, 재차 탈퇴 버튼을 누르려 했다.
툭-
“안 돼!”
“아! 또 뭔데? 질척거리는 너희 길드 특성이냐? 스벤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하…….”
그러나 그의 다리를 붙잡는, 거친 비늘이 덮여 있는 닐바스의 팔에 제지당하고 말았다. 민성이 다리를 흔들어 떼어내 보고자 했지만, 닐바스는 고목에 매달린 매미처럼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제발 부탁이야. 시키는 건 뭐든 하마. 내가 모은 명예석을 달라 하면 모두 줄게. 네가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게. 리자드 왕족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스벤을 죽인 놈들, 다 찾아서 죽이기 전까지 난 죽을 수 없어. 그러니까 제발……. 도와줘라.”
“맹세는 개뿔. 믿을 놈이 따로 있지. 전투 때도 시원하게 통수 갈긴 놈을 믿으라고?”
“그…… 그건…….”
민성의 신랄한 비판에 닐바스는 몸을 움찔거렸다. 민성은 놈의 팔에서 힘이 빠진 틈을 이용해 발길질했다. 그러자 도마뱀의 몸은 가볍게 떨어져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크윽…….”
“닐! 이 시발 초심자 새끼가! 미쳤어?”
아티아는 화급히 닐바스를 부축하며 민성을 노려봤다. 그러나 민성은 아랑곳 않고 남은 시간을 체크했다.
[길드전까지 남은 시간, 50초.]
‘쓸데없이 시간만 날렸네. 더 늦기 전에 빨리 나가자.’
“창고에 쓸 만한 물건도 고작 하나뿐이라며? 그딴 물건이랑 명예석 받고 승리 확률 0에 가까운 전투에 참전해라? 난 손해 보는 짓은 사양하는 주의라.”
민성은 싱긋 웃으며 몸을 추스르는 닐바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곤 지체 않고 탈퇴 버튼을 꾹 눌렀다.
[정말 비킬 길드에서 탈퇴하시겠습니까? 탈퇴 시 72시간 동안 재가입이 불가합니다.]
“당연하지.”
민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의 일을 모색했다.
‘개인전으로 명예석부터 벌어볼까? 아니면 곧장 수도로 가서 상점부터 들를까? 길드부터 만들어야 하니까 아무래도 그게 낫겠네.’
길드 창설에 필요한 길드 창설권도 구매하고 덤으로 명예석 상점도 살핀다. 라이든의 수도로 이동하기로 결정한 민성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띠링-
[무분별한 탈퇴와 가입을 방지하기 위해 한 번 길드에 가입 시 72시간 동안 탈퇴가 불가능합니다.]
[길드 탈퇴에 실패하셨습니다.]
“뭐?”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에 민성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메시지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