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
198화 - 비킬 길드(1)
44. 비킬 길드
“1시간 정도! 1시간 거리야!”
“흠……. 그래?”
‘생각보다 먼 곳에 박혀 있나 보네. 가는 경로에 수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말 그대로 접수처. 명예석 상점을 이용하기 위해선, 라이든의 수도이자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는 ‘포가든’에 들러야만 했다. 당연히 근방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민성이 살짝 얼굴을 찌푸리자, 닐바스 역시 덩달아 긴장했다.
“수도는 여기서 가까운 편인가?”
“30분…… 정도?”
닐바스의 대답에 민성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럼 포가든에 들렀다가 길드 하우스로 이동하는 걸로 하자. 불만 없지?”
“뭐? 경유해서 가면 도착시간이 2배는 넘게 걸린다고! 너, 우리 길드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잘 몰라서 그런가 본데…….”
“내가 알아야 해? 그런 사항들은 길드장이 재량껏 처리해야지. 그치?”
잠시 걸음을 멈춘 민성은 따듯한 웃음과 함께 닐바스의 합금 숄더패드를 두드려주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계속 이동했다.
“하…….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된 건지.”
한참 민성의 등을 노려보던 닐바스는 푹 한숨을 내쉬곤 죽을상을 하며 민성의 뒤를 따랐다. 그리곤 앞서 길드원들이 했던 것처럼 허리띠에 매고 있던 검은 사각형 물체를 꺼내더니 팡팡 펼쳤다.
“너희 길드원들도 그렇고, 입을 거면 처음부터 입으면 되지 왜 굳이 나갈 때 입어?”
민성은 검은 망토를 두르곤 어깨를 쫙 펴는 닐바스를 어이없게 바라봤다.
“그걸 질문이라고 해? 당연히 모습을 가리려고 입는 거지!”
“아니, 답답한 새끼야. 그러니까 미리 입고 왔으면 될 것을 왜…….”
“접수처 안에서는 모습을 가리는 게 오히려 눈에 띈……. 빨리 튀어!”
민성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닐바스는 민성을 지나쳐 쏜살같이 문으로 향했다.
‘이 새끼가 어딜 도망가려고.’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민성도 재빨리 닐바스의 뒤를 쫓았다. 괜히 결투장에서 괴롭힘에 가까운 고문을 가한 것이 아니었다. 놈이 일구어낸 기반을 빼앗는 것. 영주이자 황금거위를 얻는 길로 가는 첫 걸음이었기에 고이 보내줄 생각 따위 없었다. 그때.
“닐바스가 눈치챘어! 나간다! 준비해!”
“젠장. 길드원들 먼저 내보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쫓아! 오늘은 반드시 그 뿌리를 뽑아내버려야 돼!”
등 뒤에서 악에 받친 커다란 음성이 들려왔다. 힐끗 고개를 돌려 살피니, 접수처를 배회하는 손님들 사이로 일부 인원들이 그들의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이놈들이랑 원한관계에 있는 것들인가?’
조금 속도를 올려 닐바스의 옆에 붙은 민성은 슬쩍 고개를 돌려 놈의 얼굴을 살폈다.
“좃 됐네. 좃 됐어. 진작 튀었어야 됐는데, 어떤 빌어먹게도 재수 없는 새끼 덕에 오늘 여러모로 피 보는구나…….”
다급해 보이면서도 살벌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이 꽤나 익살스럽게 느껴졌다.
“그 재수 없는 새끼. 설마 날 뜻하는 건 아니지?”
민성은 닐바스의 속도에 맞춰 달리며 그의 옆구리를 툭툭 건드렸다. 공격의사가 없었기에 패시브는 발동되지 않았다.
“이거 힘만 무식하게 세지 진짜 멍청한 새끼 아냐! 당연히! 스벤한테 한 소리지…….”
“뭐, 그건 아무래도 좋고. 도망가는 건 좋은데 갈 거면 깽값은 뱉어놓고 가. 아니면 길드장 자리 내놓고 가든가. 창고에서 몇 개만 빼가고 다시 돌려줄게.”
“누구 마음대로!”
닐바스는 괴성을 지르며 접수처의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놈이 나왔다! 지금 나온 놈이 닐바스야! 빨리 아이템을 써!”
‘이건 또 뭐야.’
민성은 닐바스를 따라 걸음을 멈추곤 전방을 응시했다. 접수처를 나오자 수많은 인원들이 중심대로를 점령한 채, 접수처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오……. 망했네, 망했어.”
닐바스는 노란 눈을 데굴 굴리며 포위망을 훑었다. 그러나 앓는 소리와 달리 손은 카드를 섞으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고수님들! 저 양반들 뭐 하고 있는 건지 아세요?”
“보아하니 길드끼리 마찰이라도 생긴 것 같은데? 이 또한 투기장의 매력이지. 어디 보자. 오! 한쪽은 할튼 길드네. 만든 지 얼마 안 된 신생 길드라 들었는데, 그새 꽤나 많은 인원을 끌어들인 모양이야. 길드장이 꽤나 수완 있는 인물인가 보군 그래. 다른 한쪽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구먼. 아무래도 초심자 길드의 분쟁인가 본데 그 또한 보는 맛이 있지.”
중앙대로를 돌아다니던 손님들은 저들끼리 수군덕대며 어수선한 현장을 구경하기 바빴다.
“우리한테까지 피해 오는 건 아니겠지?”
“괜찮아. 자네는 장사한 지 얼마 안 돼서 모르나 본데, 그랬으면 진작 망했어. 신경 쓰지 말고 물건이나 팔아. 어이, 거기 손님, 이것 좀 보고 가셔!”
노점상들은 지척에서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손님들을 부르며 장사에 몰두했다.
“어이, 닐바스. 어떡할까? 포위당한 것 같은데? 싸울 거야? 난 완전 좋은데? 킬킬킬.”
“다행히도 마이스터 놈들은 아니고, 잔챙이들끼리 뭉친 길든 것 같아. 명예석 다발이 굴러왔네.”
이런 상황이 익숙했는지 둘러싸인 길드원들 사이에서는 화기애애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다려! 이 빌어먹을 전투광 새끼들아! 아직 누구 똥인지 모르니까.”
닐바스는 꽥 소리 지르곤 길드원들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고개를 돌리며 둘러싸고 있는 무리를 쳐다봤다.
“뭐야, 이거! 순 쭉정이 새끼들밖에 없잖아! 괜히 쫄았네.”
닐바스는 남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곤 한결 느긋하게 카드를 섞었다. 그때,
“닐바스!”
포위한 무리 사이에서 누군가가 고함치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닐바스? 무한의 도박사 닐바스가 나타났다고? 미친! 어디야?”
“안 보여. 아무래도 환각 종류의 아이템을 사용한 것 같은데.”
그 소리를 들은 손님들 중 일부는 놀란 눈으로 전황을 훑었다.
“그게 누군데 그래요?”
“초심자라더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비킬 길드의 길드장이자 초심자들만 족족 골라내 명예석을 털어가는, 라이든 희대의 개새끼라고!”
‘호오……. 머리 딸린 머저린 줄 알았는데 나름 한가락 하는 놈이었어?’
민성은 수군거리는 손님들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스벤도 그렇고 도마뱀 대가리도 나름 투기장에서 이름 깨나 날린 놈인 듯했다.
“그렇게 대단한 놈이에요?”
“당연하지. 수많은 길드와의 대전에서도 단 한 번도 명예석을 잃지 않은 놈이라고! 거기다 초심자 킬러 스벤과의 연계공격은 누구도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지! 게다가 소문에 의하면 비킬에 속해 있는 길드원들의 추정 랭크도 최소 B급이라는 소문이 파다해!”
“그렇게 대단한 놈들이면 왜 굳이 초심자들만 노리는 거죠?”
민성 역시 궁금했기에 귀를 더욱 바짝 세웠다.
“그게 명예석 모으기 가장 편한 길 중 하나니까! 아주 빌어먹을 새끼들이지?”
“그……. 그렇군요.”
“3대 길드의 척살령이 무섭지도 않은 거지. 언젠가는 아주 된통 당할걸? 할튼 길드가 꼭 정의구현 해줬으면 좋겠네.”
구경꾼들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들은 노점에서 산 먹을거리들을 우물거리며 사태를 관전했다.
‘초심자 킬러라 할 때 짐작은 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원한관계가 많은 모양이네. 뭐, 나야 내 억울함을 풀어줄 아이템이나 스킬만 받으면 되니까.’
놈의 길드가 타 길드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민성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닐바스의 개인 창고에서 가장 값어치 있는 것을 빼오는 것. 그게 전부였다.
“여기에 있는 이들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오늘부로 투기장의 혼란을 야기하는 네놈과 길드를 분쇄하고 평화를 되찾겠다!”
전신을 검고 두터운 헤비 아머로 중무장하고 머리에는 커다란 양 뿔이 달린 투구를 눌러쓴 이가 할버드를 들어 닐바스를 가리켰다.
“……난 누군지 전혀 모르겠는데? 너희 같은 새끼들이 한둘이어야지…….”
“이놈!”
닐바스가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자, 투구 속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나마 스벤은 양심 있는 새끼였어! 절반만 털어갔으니까! 하지만 네놈은……. 네놈은 1개만 남기고 싸그리 털어갔잖아! 네놈 때문에……. 네놈 때문에 내 동생은…….”
“큭큭큭……. 누구 똥인가 했더니 길드장 똥이었네? 아니지, 어떻게 보면 스벤이 데리고 온 녀석의 똥인가?”
“어이, 닐! 어때? 혼자 상대할 수 있겠어?”
울분이 담긴 포효에 길드원들은 몸을 들썩이며 폭소했다. 그에 따라 검은 망토들도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닐바스는 똥 씹은 얼굴로 길드원들을 째려보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동생이 명예석 꼴았으니까, 복수하러 오셨다? 그것도 쭉정이 새끼들 데리고? 이거 봐라? 이거 웃긴 새끼네? 약한 데다 아무것도 모르고 투기장 온 새끼들 잘못이지, 왜 내 탓을 해? 엉? 목숨 부지하라고 1개라도 남겨준 걸 감사하게 여겨야지, 쯧.”
닐바스는 여태껏 민성에게 당한 것을 분풀이하듯 모멸 섞인 말을 던지며 상대방을 조롱했다.
‘그걸 왜 남겨줘. 등신 새낀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민성은 답답함에 가슴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닐바스들이 표적의 명예석을 굳이 1개만 남기는 이유. 스벤은 자세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다만 명예석 보유수가 0개가 되면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고만 했었다. 그것도 죽음에 가까운. 그렇기에 최소한의 자비로 명예석 1개는 남겨준다는 것이다.
‘미친 거지. 결국 이곳도 직접적으로 목숨을 빼앗지 않을 뿐이지 전쟁터야. 나름 꽤나 전쟁을 겪었을 놈들이 이상한 곳에서 자비를 베풀어? 그러니까 이 꼴을 당하는 거지.’
후환을 남기지 마라! 죽일 거면 확실히 죽여라!
그간 치른 전투에서 뼈저리게 느꼈던 경험의 산물들이었다. 민성은 답답함을 이기고자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계속 상황을 관찰했다.
“…….”
“역시 우리 길드장은 성격 파탄자에 쓰레기라니까!”
“그것도 보통 쓰레기야? 희대의 쓰레기지!”
검정색 아머를 두른 이가 눈에 띄게 몸을 부들거리자, 비킬 길드원들은 배를 잡고 폭소하거나 웃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 모습을 흘낏 노려보던 닐바스는 한숨을 내쉬곤 할튼의 길드장을 바라봤다.
“녀석은……. 녀석은……. 데스나이트 일족의 자랑거리자 내 보배였어…….”
“데스나이트고 나발이고 기억 안 나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것보다 오늘 내가 좀 싱숭생숭 하니까 곱게 돌아가, 알았지?”
닐바스는 퉁명스럽게 대꾸하곤 등을 돌렸다.
“닐! 약 빨았어? 갑자기 왜 그래?”
“푸하하하. 닐! 겁먹은 건 아니지? 아, 아니면 혹시 그건가? 화장실 급하면 내가 대신 상대해주고!”
걸어오는 전투는 마다한 적 없는 길드장이었기에, 그의 낯선 모습은 길드원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닥쳐! 다들 귀환서 사용…….”
닐바스가 길드원들에게 명령하려는 찰나,
“네놈 같은 놈들은 항상 그렇지. 목적을 위해서 아무렇지 않게 남을 상처 입히고 천연덕스럽게 낄낄대. 피해자의 기분 따윈 전혀 생각하지 않아.”
검은 헤비아머 속에서 음험하고 어두운 목소리가 울려왔다.
“하…….”
닐바스는 짜증스럽게 등을 돌리며 할튼의 길드장을 노려봤다.
“네놈 같은 초심자 새끼들은 항상 그래. 투기장의 룰을 합리적으로 이용해도 불만이 많아요. 이래서 초심자 새끼들이랑은 대화가 안…….”
“너도 똑같이 느껴봐. 네놈과 절친했던 스벤도 지금쯤 골로 갔을 테니까.”
음험한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찬찬히 카드를 셔플하던 손도 우뚝 멈췄다.
“엉? 야. 너 다시 말해봐. 지금 뭐라고 했지?”
닐바스는 노란 두 눈을 얇게 뜨곤 투구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한기 어린 소리에 귀 기울였다. 몸을 감싸고 있는 비늘들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무사히 제 차원으로 돌아갔어야 할 놈의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그것도 초심자의 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