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197화 - 투기장(5)
“이번 놈은 얼마나 가려나? 비실해 보이는 게 영 맥도 못 출 거 같은데, 어떻게 닐바스를 이긴 거지? 사실 닐바스가 적당히 봐준 거 아냐?”
“알게 뭐야? 강한 놈이면 살아남는 거고 약한 놈이면 뒈지는 거지. 난 한 달 안에 투기장으로 끌려간다는 데 명예석 10개 건다!”
‘생각 외로 반발이 없네.’
민성은 저들끼리 떠들어대는 길드원들을 슬쩍 살폈다. 생판 처음 보는 놈이 길드에 들어왔으니 최소한의 반발은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놈들은 시시덕거리며 내기 판돈을 올리기에 바쁜 모양새였다.
“크……. 얼마만의 길드 하우스야. 그간 전쟁 안 터져서 미치는 줄 알았다고! 나키 요리 솜씨는 여전하려나 모르겠어.”
“그 양반 요리 스킬은 여전히 끝내주지! 빨리 가자고!”
잠시간 떠들어대던 길드원들은 이윽고 하나둘 접수처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나게 움직이는 입과 달리 그들의 시선은 날카롭게 주변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지?’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다면 와중에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 망토로 전신을 가리고 나간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시답잖은 의문은 곧 빠른 속도로 씻겨 나갔다.
“나야 좋지.”
민성에게는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민성이 길드에 들어온 데 불만을 품은 이도 극소수 존재했다.
“하아…….”
대표적으로 닐바스가 그러했다. 놈은 지금도 그가 길드에 들어온 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 했다. 축 처진 어깨와, 누구에게 인사하는지 살짝 펼쳐져 떨리는 손이 그것을 증명하는 듯 했다.
‘그렇게 싫었으면 끝까지 거절했어야지.’
민성은 옅게 히죽이며 경기장에서 닐바스와 막바지에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명예석 상점에서 판다고?”
“그래! 길드 창설권만 구매하면 얼마든지 길드를 설립할 수 있어! 그러니까 괜히 내 길드에 눈독 들이지 마! 마십쇼!”
“애초에 네가 쓸데없이 시비 걸지만 않았으면 이럴 일도 없었어, 짜식아.”
민성은 몇 차례 닐바스의 뺨을 상냥하게 쳐주었다. 마나와 체력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놈이 바닥을 굴러댔지만 이미 그의 관심 밖이었다.
‘역시 직접 창설하는 편이 낫겠지.’
처음에는 닐바스의 길드를 먹을까 했으나, 길드를 창설할 수 있는 아이템이 있다면 구태여 닐바스의 길드를 노리지 않아도 됐다. 그 편이 움직이기에도 여러모로 수월할 것이었다.
“좋아. 일단 이 정도면 됐어. 나머지는 다른 손님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이제 얼른 죽여줄게.”
민성은 싱긋 웃으며 대검을 가볍게 쳐들었다. 그때,
“휴…….”
“음?”
닐바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민성은 먹이를 포착한 뱀의 눈으로 그의 얼굴을 훑었다. 놈의 얼굴에선 마침내 고통에서 해방되어 편안함을 얻은 자의 것이 아닌, 꿍쳐놓은 과자를 지켜냈다는 꼬마의 만족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야. 또 뭐 숨기고 있어.”
“……응? 어? 뭔 소리야? 내가 뭘 숨겨? 알려줄 건 전부 다 알려줬다고! 이제 빨리 죽여줘!”
얇게 흔들리는 닐바스의 목소리는 민성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아! 내가 한 가지 깜박한 게 있었는데 덕분에 기억났다.”
민성은 일부러 목청을 높이며 가볍게 손뼉 쳤다.
“우리 차원에서는 아무 죄 없는 사람을 사기꾼으로 몰아 때리고 겁박하면 피해자한테 깽값, 아니, 그에 따른 보상금을 줘야 하거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무슨 소리긴. 사기꾼으로 몰린 데다 너한테 맞은 게 분하고 억울하니 대가를 받아야 되겠다는 소리지.”
민성의 말이 끝나자, 무릎 꿇고 있던 닐바스는 입만 뻐끔거리며 민성을 멍하니 쳐다봤다. 빈사상태에 이르기 직전마다 체력 포션을 먹여 회복시키곤 재차 고문을 감행하는 놈이 할 소린가 싶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둘만의 시간은 기니까, 우리 차분하게 얘기해보자.”
민성의 보드라운 미소 속에 숨겨진 악마의 형상을 본 닐바스는 몸을 잘게 떨었다. 놈은 악마다. 악마가 분명했다.
“제…… 제발…….”
“어, 안 돼.”
“으아아아아아악!”
지속되는 고문 끝에 결국 닐바스는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놈의 말에 따르면 길드 하우스 내에는 길드원들이 사용하는 공용 창고 외에도, 오로지 길드장만이 사용할 수 있는 개인 창고가 존재한다 했다. 그리고 개인 창고 안에는 여태껏 그가 활동하며 모은 아이템들과 스킬 북이 있다고 실토 받았다. 깽값으로 그중 한 가지 아이템을 받기로 약조 받고 나서야 민성의 고문시간도 끝을 맺었다.
‘전부 안 털어가는 걸 고맙게 여겨야지.
회상을 끝낸 민성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길드 하우스에는 같은 길드원 이외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조건을 알게 된 이상, 깽값을 받아낼 때까지는 닐바스의 길드원으로 속해 있을 생각이었다. 솔직히 당장이라도 그만의 독립 길드를 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깽값도 받고 닐바스에게서 투기장에 대한 정보를 빼먹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길드 하우스는 어디에 있는 건데? 이 근처야?”
마지막으로 빠져나가는 길드원들을 바라보던 민성은 동상처럼 서 있는 닐바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놈은 아련한 얼굴로 이미 보이지도 않는 스벤의 등에 손을 흔들 뿐,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즐거웠었다. 잘 가라…….”
한참 손을 흔들던 닐바스는 천천히 손을 내리곤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변을 살폈다. 접수하거나 돈을 거는 손님들 사이사이에서 살의가 그득 담긴 시선들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마 간만에 접수처에 등장한 스벤 덕에 꼬인 벌레들일 확률이 높았다. 녀석의 몸집은 금방 눈에 띌 뿐더러 그간 베풀었던 어설픈 자비 역시 한몫했을 게 뻔했다.
“아, 맞다. 멍청한 자식. 망토 입고 나가라고 했어야 했는데…….”
환각의 망토. 다른 이들에게 착시를 일으켜 착용자의 본 모습을 가릴 수 있게 해주는 아이템이었다. 그들같이 원한을 달고 사는 이에게는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길드원들에게 지참하고 다니라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감성에 젖어 중요한 사실을 깜박한 닐바스는 머리를 부여잡고 한탄했다. 평상시라면 그가 옆에서 챙겨줬겠으나, 지금 그의 옆에는 동료가 아닌 미친놈이 있을 뿐이었다.
스벤 그 자식은 옛날부터 그랬다. 딸을 위한 것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행동했다. 그래서 정작 자신의 신변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딸의 목숨이 귀중하다 해도 그렇지 자신의 목숨만은 못할 터였다.
백번 이해해 민성을 데려온 것까지는 어떻게 납득할 수 있었다. 처음에야 사기꾼인 줄 알았지만 맞으며 놈의 말을 들어보니 민성의 성격도 대강은 파악할 수 있었다. 성격이나 언사는 거지같아도 실력 하나는 확실하다. 거스르지만 않으면 해를 가할 놈은 아니다. 닐바스가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이목이 있는 중앙대로에서 환각의 망토를 입지 않은 것은 대체 무슨 만용이란 말인가? 접수처 안에서야 환각이 먹히지 않고 오히려 망토가 시선을 끄니 착용하지 않는 게 맞지만, 바깥은 아니었다. 차원전쟁을 끝내고 곧장 투기장으로 올라와 운 좋게 발견하고 따라왔으니 망정이었지, 분명 녀석에게 원한을 품은 놈들은 기회다 싶어 속한 길드에 연락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따가운 눈초리들이 그것을 반증했다.
“어디 가서 처맞고 다닐 새끼는 아니지만……. 빌어먹을…….”
딸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눈을 빛내던 스벤을 보곤 말문이 막혔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건 오직 으레 길드원들이 나갈 때처럼 잘 가라는 인사를 건네는 것과 별 탈 없이 돌아가길 기원해주는 것뿐이었다.
“시원하게 놓아주려 해도 더럽게 생각나네. 계속 있어도 됐잖아. 그놈의 딸이 뭐라고…….”
닐바스는 작게 중얼거리며 길드 하우스에서 스벤과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했다.
과거, 길드 하우스의 거실 안.
“어이, 벤! 아무리 딸의 목숨이 소중하다고 해도 명예석을 코인으로 바꿀 정도로 가치 있는 거야? 희박한 확률에 빠지는 건 싫다며?”
닐바스는 화롯불 앞에 궁상맞게 앉아 토파즈 스파이더의 실로 뜨개질하는 스벤의 등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제대로 된 전투능력이 없는 펫을 어디에 쓸까 했는데, 나름 잘 사용한다.
“……닐. 아직 자식 없지?”
“뭐? 당연히 없지! 나 좋다고 쫓아다니던 리자드들은 많았지만 말이야.”
닐바스는 한껏 우쭐거리며 스벤의 앞을 거닐었다. 잠시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벤은 빙긋 웃으며 뜨개질을 이어갔다. 스벤이 손을 놀릴 때마다, 뜨개실 밑으로 커다란 옷이 점차 형태를 갖춰갔다.
“자식은 그 무엇보다 소중해. 코인이나 명예석으로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이해할 수가 없네. 자식이야 또 낳으면 되잖아? 널리고 널린 게 암컷들인데 그중에 몇 골라서 낳게 하면 되지!”
닐바스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스벤을 바라봤다.
“닐. 자식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야. 내 육체를 빌려 세상에 나왔을지는 몰라도 전쟁의 신께서 나를 점지해서 내려주신 하나뿐인 보석이야. 그리고 난 그 보석을 아름답게 그리고 소중하게 다룰 임무를 부여받은 세공사고.”
“……하여튼 딸 얘기만 하면 쓸데없이 눈이 빛나. 전투할 때나 그렇게 열정적으로 해라, 새끼야. 됐고! 에페리얼 깔 거니까 얼른 내려오기나 해! 다른 녀석들도 기다리고 있으니까. 알았어?”
낯간지러운 스벤의 말에 닐바스는 홱 몸을 돌렸다.
“지금은 몰라도 분명 너도 자식이 생기면 생각이 바뀔 거야. 항상 무언가를 해주고 싶고 그러면서도 부족하다 생각이 들게 만드는…… 그런 감정 말이야.”
“어이고. 등치가 아깝다, 이 호구새끼야!”
닐바스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문을 닫고 나가자, 스벤은 옅은 미소를 짓곤 다시 말없이 손을 놀렸다. 그것이 최근 스벤과 공유했던, 둘만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젠장…….”
항상 모질게 대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더 이상 녀석을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인지 뒤늦게 진한 미안함이 몰려왔다.
“망할 놈……. 무사히 돌아가라, 새끼야.”
그래도 녀석과 함께했던 추억들은 닐바스의 가슴 한구석을 따스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총 20번 불렀다.”
민성의 나지막하면서도 차가운 음성은 추억 속에 묻혀 있던 닐바스를 현실로 끌고 왔다.
“뭐…… 뭐가?”
‘얼씨구? 도마뱀이 눈물도 흘려?’
민성은 닐바스의 눈가에 살짝 고인 물기를 보곤 고개를 저었다. 이미 떠난 이에게 미련 두는 것은, 죽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돌아오라 소리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길드 하우스는 어디에 박혀 있는 거냐고, 새끼야!”
“아아아악!”
민성이 손을 들어 올리자, 닐바스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며 소리 질러댔다. 상점 내에서 공격이 불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경기장에서 조련된 신체는 정직할 정도로 반응했다. 그 사실이 영 못마땅했는지, 닐바스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를 째려봤다.
“어때? 이제 정신이 좀 들어?”
“빌어먹을! 난 길드장이야! 내 길드에 들어왔으면 최소한의 대우는 해줘야 할 것 아냐!”
“대우?”
민성은 억울함에 몸을 부들거리는 닐바스를 보며 코웃음 쳤다. 이용가치가 있어 잠시 머물다 갈 길드다. 제대로 대우해줄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대우받고 싶으면 나보다 강해지든가. 그러면 인정해줄게.”
“이런 시바아아알 새끼!”
“뭐?”
민성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걸리자, 닐바스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꼬리를 내렸다.
“그, 그래서 뭐가 궁금한 건데? 급한 거 아니면 하우스에서 알려주마. 슬슬 튀어야 할 것 같거든.”
“튀어야 한다는 놈이 뭔 잡생각을 그리 오래 하는데? 길드 하우스. 어디에 붙어 있냐고. 이 근처야?”
“……겨우 그딴 거 가지고 마지막 배웅을 망쳐? 사나이의 낭만도 모르는 새끼 같으니라고. 난 이래서 초심자 새끼들이 싫…….”
닐바스의 중얼거림에 민성은 싱긋 웃으며 손을 높이 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