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194화 - 투기장(2)
‘15개라……. 2배씩 소모되는 줄 알았으면 어떻게든 더 구해봤을 텐데.’
한 번 강화석을 사용할 때마다 기존에 사용한 수량의 2배가 든 탓에, 강화대란은 5강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끝낼 생각은 없었다.
“남은 건 옷에다 바르면 되니까.”
민성은 휘파람을 불며 남은 강화석을 입고 있는 코트에 갖다 댔다.
[피에 젖은 블랙 코트+5]
등급: ★★★★★
설명: 과거 일만에 달하는 사람을 죽인 비호의 가죽으로 만든 코트. 하지만 독특한 외관 탓에 입는 이가 없어, 유성룡이 곽재우에게 선사하기 전까지 조선왕실의 보고에 잠들어 있었다.
방어력: 485(+1120)
특수능력: 색상변경 가능, 유령 출몰 사용 가능.
본래의 능력보다 강화로 올라간 부가적인 방어력이 높은 아이러니한 상황. 다만 코트는 대검과 한 가지 차이점을 보였다. 붉은 광채를 내뿜는 대검과 달리 코트는 검은색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러했다.
“이 맛에 루비질 합니다.”
민성은 강화로 떡칠한 코트의 능력을 확인하곤 재차 히죽거렸다. 삽시간에 강화석 30개를 모두 소모했지만 실로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당장이라도 강화된 아이템들을 시험해보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오래 기다렸지? 이제 다시 채점 좀 해줄래?”
민성은 허공에 소리치며 다시 거울 앞에 섰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그 대량의 강화석은 어디서 구한 겁니까?]
“어디서 구하긴. 상점에서 구했지.”
[그…… 그걸 물으려 한 게…….]
허공에서 납득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울렸지만, 민성은 어깨만 으쓱여 보였다. 약간의 편법으로 재화를 구했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구매했다. 추궁당해야 할 이유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랭……크 확인을 시작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민성이 알려줄 생각 없다는 것처럼 방긋거리기만 하자, 목소리는 체념한 듯 진행을 이어갔다.
두둥-
작은 북소리와 함께, 민성의 모습이 사라진 거울에 커다란 글자 하나가 새겨졌다.
‘강화가 효과가 있었네.’
민성은 거울에 커다랗게 새겨진 S자를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말도 안 돼! S랭크가 나올 리가 없을 텐데…….]
“나올 리 없고 자시고 간에 나왔잖아. 빨리 랭크에 합당한 보상이나 줘.”
[그…… 그건…….]
목소리가 머뭇거리자 민성은 허공에 손을 내밀며 눈을 찌푸렸다.
“아니면 너희 시스템에 하자가 있다는 걸 스스로 긍정하는 건 아니지? 이 사실을 알면 에드워드가 퍽이나 좋아하겠어. 그치?”
[어…… 어떻게 일개 상점 이용자가 점장님 존함을…….]
대답 대신 민성은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허공에 손을 까딱거렸다.
“어차피 너도 상점 운영진 중 하나일 거 아냐. 그럼 에드워드 따까리일 거고? 너 이름이 뭐야? 에드워드한테 한 소리 해야겠네. 투기장 운영 개떡처럼 한다고…….”
[헉! 추…… 축하드립니다! 귀하의 등급은 S! S랭크에 배정되셨습니다!]
점장의 이름을 판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목소리는 황급히 민성의 말을 틀어막곤 진행을 이어갔다.
“짜식이. 좋게, 좋게 갔으면 서로 좋잖아.”
[S랭크에 배정됨에 따라 해당 랭크에 따른 기초보상이 제공됩니다! 명예석 700개가 기초보상으로 부여됩니다!]
띠링-
[아이템 창에 명예석란이 새로 추가됩니다. 자세한 사항은 아이템 창을 확인해주세요.]
민성은 새로이 나타난 메시지의 내용을 따라 아이템 창을 열어 하단을 확인했다. 코인과 루비 옆에는 작은 타워 모양의 아이콘과 수량 700개가 자리하고 있었다.
‘확실히 A랭크랑 차이가 심하네.’
확인을 끝낸 민성은 아이템 창을 닫곤 다시 허공을 쳐다봤다.
“700개? 그거 밖에 안 줘? 사실 더 주는데 숫자로 장난질 한 건 아니지?”
[아…… 아닙니다! 그런 재량까지는…….]
“그래? 장난이야.”
민성은 개구리를 손에 쥔 악동처럼 해맑게 웃었다.
“그럼 여기서 더 볼 일은 없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럼 로비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또 하나의 전쟁터, 투기장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그것을 끝으로 민성의 몸은 빛에 휘감겨 순식간에 사라졌다. 민성의 신형이 사라지자 능력의 방에는 묘한 정적에 휘감겼다.
[시발놈! 점장님이랑 안면 좀 있다고 기고만장하게 구는데 언제까지고 무사할 줄 알아? 콱 뒈져버…….]
허공에서 분노에 휩싸인 목소리가 울려 퍼지던 찰나,
슥-
“저기요? 아무도 없나요?”
[……어서 오십시오. 이곳은 투기장을 이용하기 전 사용자의 능력을 확인하고 그에 따른 랭크를 부여하는 능력의 방입니다.]
새로운 손님이 들어오자 목소리는 으레 그래왔듯 친절한 음성으로 손님을 맞이했다. 서비스업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
“C등급 보스나 몬스터 토벌전 참여하실 분 계세요? 회복계열 스킬 보유하신 분 환영합니다!”
“라이든의 뭉크 길드에서 길드원 모집합니다! 가족같이 따듯한 정을 가진 길드원들이 새 길드원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길드 들어오셔서 정보도 얻으시고 다른 길드원들과 미리 연계도 해보세요! 나중에 진영전에서 큰 도움이 됩니다! 아, 철새는 사절이니 장기적으로 활약하실 분 모집합니다!”
로비로 돌아오자 시끌벅적한 음성이 민성을 반겼다.
“어이! 진영 선택 다 끝냈으면 이쪽으로 와!”
민성은 접수처 구석에서 그를 부르는 스벤을 보곤 걸음을 옮겼다.
“간만에 불러서 한다는 소리가 은퇴? 하아……. 천하의 스벤이 은퇴라니. 이제 초심자 새끼들 동정은 누가 떼 주나?”
“큭큭. 가는 놈 안 막고 오는 놈 막는 게 우리 길드 신조인 거 알잖아? 그리고 너도 처음에 스벤한테 동정 떼였으면서……. 아, 아픈 추억을 건드렸나?”
“닥쳐! 암흑기는 오래전에 기억 속에서 지웠으니까.”
처음 보는 손님들이 스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랜 시간 투기장에 있었다니 이곳에서 사귄 지인일 터였다.
“크……. 이제 은퇴한다고 초심자 뒷바라지까지 하는 거야? 캬……. 스벤도 이제 죽을 때가 됐구먼.”
민성의 차림을 힐끗 살핀 이들은 스벤을 보며 킬킬거렸다. 길고 검은 코트야 그렇다 치더라도 낡아빠진 대검은 그의 신원을 짐작케 했기 때문이었다.
‘쓰레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유용하네.’
민성은 붉은 빛이 사라진 대검을 곁눈질했다. 연속 강화에 성공한 것은 만족스러웠지만 붉은 빛은 너무 시선을 끌었다.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고, 아이템 창에 쟁여놓았던 아이템 중 하나이자 물체의 본모습을 가려주는 ‘왜곡된 진실’은 민성의 목적에 들어맞았다.
“난 고용주랑 얘기할 게 있으니까 잠시만 기다려.”
“엉? 고용주? 저 초심자가? 흐흐흐흐! 진짜 맛이 가서 은퇴하는 건 아니지?”
“닥치고 비키기나 해.”
민성이 가까이 다가오자 스벤은 그의 지인들을 뒤로 물렸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친구 만들 생각을 하지?’
민성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스벤에게 다가섰다.
“확실히 얘기했던 거랑 크게 다르지 않았어. 목소리도, 거울도.”
“구태여 속일 이유가 없으니까. 그나저나 라이든이라……. 뭐,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
스벤은 민성의 팔뚝에 달린 큰 나무 문양을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곧 머리를 긁적이곤 큼지막한 손을 내밀었다.
“진영 선택까지 끝냈으면 내 할 일은 다 한 것 같은데. 필요한 정보도 전부 제공한 것 같고. 이제 주는 게 어때?”
“확실히 그렇긴 한데 아직 빠진 게 하나 있잖아? 내가 예전에 후불로 받으려다 귀찮은 일을 겪어서 이제 무조건 선불만 받거든.”
민성은 피식 웃으며 마주 손을 내밀었다.
“……하아…….”
민성이 내민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스벤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민성의 손을 감싸듯 잡았다.
“혹시 더 갖고 있는 건 아니지?”
“300개. 내가 가진 전부야. 한 개는 필수로 갖고 있어야 하니까 이해해줘.”
스벤은 민성의 눈치를 살피며 저도 모르게 몸을 숙여 보였다.
“흠…….”
스벤 쪽에서 거래 창에 명예석 300개를 등록하고 눈치를 살피자, 민성은 눈살을 찌푸리곤 스벤을 바라봤다. 애초에 딸의 목숨 때문에 이곳에 온 놈이다. 이제 와 구태여 그를 속일 이유는 없을 것이었다.
“좋아. 안내해줘서 고마웠다. 딸 병도 잘 고치고.”
민성은 상냥한 웃음과 함께 거래 창에 소생단 조각 50개를 올렸다. 이곳까지 안내견 역할을 충실히 해줬으니 덕담 정도야 얼마든 건넬 수 있었다. 이윽고 스벤 쪽에서 거래완료를 요청하자 그 역시 완료 버튼을 눌렀다.
[거래가 완료되었습니다.]
“으으으…….”
마침내 거래가 종료되자, 스벤은 낮게 울부짖었다. 체구에 걸맞지 않게 커다란 외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드디어 딸의 병마를 몰아낼 수 있다는 생각에 감정이 복받친 것 같았다.
“어이, 얼마나 대단한 놈이기에 그리 쩔쩔매는 거야? 300개는 또 뭔 소리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그들의 거래를 주시하고 있던 동료들이 스벤에게 다가왔다.
“으으으……. 드디어…… 끝났어…….”
“끝나? ……야! 너 설마 이 벼룩 같은 새끼한테 명예석 넘긴 건 아니지? 응?”
질책에 가까운 동료의 물음에 스벤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스덴의 병을 고칠 수 있어…….”
“하……. 야, 이 등신 같은 새끼야! 너 저번에도 박하단 조각이랑 착각해서 속을 뻔하고도 또 거래한 거야? 내가 안전하게 경매장에 등록돼 있는 걸 사라고 했잖아! 급한 건 알겠는데……. 환장하겠네.”
“아냐, 닐! 이번엔 진짜…….”
동료가 제 일인 것처럼 언성을 높이며 민성을 노려보자 스벤은 급히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했다. 하지만 동료는 스벤이 채 말릴 틈도 없이 민성에게 다가갔다.
“야. 거기 너! 나 좀 보자.”
‘이 새낀 또 뭐야?’
800개로 불어난 명예석을 만족스럽게 살피고 있던 민성은 아이템 창을 닫고 놈을 쳐다봤다. 온몸을 덮은 오돌토돌한 비늘과 길쭉한 꼬리,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는 꼭 잘 자란 도마뱀을 연상케 했다. 놈이 손에 들고 있는 기묘한 카드들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너 뭐 하는 새끼야! 어? 가끔 너 같은 초심자 새끼들이 주제도 모르고 사기 치려 하는데 상대를 잘못 골랐어, 인마! 좋은 말 할 때 스벤이 준 명예석 뱉어놓고 꺼져!”
민성은 피식 웃으며 놈의 노란 눈동자를 바라봤다.
“당사자가 가만히 있는데 왜 네가 지랄이야?”
“뭐……. 뭐! 이 새끼야!”
“양심은 있지? 무고한 사람 사기꾼으로 모는 빌어먹을 놈이 진짜 사기꾼 아닐까? 아, 아니면 상식적인 판단이 불가능할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나? 그럼 이해해줄 수는 있는데.”
“이놈이!”
민성이 한껏 빈정거리자, 도마뱀은 눈이 뒤집혀 몸에 차고 있던 얇은 갑주 틈 사이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